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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유치환 「古代龍市圖」

by 답설재 2009. 9. 5.

 

 

 

시인은 왜 시를 쓸까요. 대체로 “쓰지 않고는 공허하여 살 수가 없다.”지만, 그럼 우리는 왜 시를 찾는 것일까요.

 

좀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으나, ‘아, 정말 그래!’ 싶은 한 편의 시를 발견하는 순간 때문에 시를 찾아 읽는 것 아닐까요? 시인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앉아서 돈도 내지 않고 그 시인의 정신세계, 정서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순간의 희열을 위해 시를 읽습니다. 더구나 그 순간의 놀라움으로 나를 돌아보게 하고, 그 놀라움으로 나의 갈 길을 다시 설정하여 새로운 정신세계, 새로운 정서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그 전환점이 그리워서 시를 읽습니다.

 

‘詩’ 하면 바로 떠오르는 시입니다.

 

 

 

古代龍市圖

 

 

아득한 옛날 三神山 山麓 萬里ㅅ벌에는

한 해에 한 번 나라의 龍市가 섰었나니.

이 날이면 안개 자욱한

먼 原始林에 九官鳥 우짖는 이른 아침부터

온 나라에서 길들여 먹이던 龍을 이끌은 數萬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治水하고 鬪龍하고 龍으로써 龍을 사로잡는 家龍을

여기에서 서로 팔고 사고 바꾸기를 행하였나니,

번갯불 뿜는 爛爛한 눈방울과 槍劍같이 곧은 수염의

번쩍이는 비눌에 五色 무지개 燦爛한 靑龍 黃龍 雄龍 雌龍!

머리를 저으면 불길 같은 아가리에 푸른 雲霞가 일고

한 번 꼬리 치면 三神山이 울림하는 아늑한 地鳴---

아아 이 輝煌한 霹靂 사이를 사람들은 사람들로

호사롭게 더불은 鳳凰을 어깨에 얹은 이

봉의 눈 나룻 푸른 젊은 이

나부끼는 흰 눈썹에 童顔의 늙은이

모두가 모두 늠름한 가운데 悠然히 옷자락을 끌고

지나치면 서로 공손히 읍하고

어깨 치며 호탕한 웃음도 섞어

사나운 짐승을 꾸짖어 간색하고 흥정하는

구름같이 펼쳐진 이 저자의 변두리엔 또한

繡緞을 드리운 즐비한 장사치의 帳幕에서 오르는

화려한 彩色 자주빛 연기에 풍악소리 계집들의 歡待의 웃음소리

수많은 구경ㅅ군 건달들과 어울려

古代의 기나긴 하루해가 저물도록 이 龍市는

絢爛한 畵幅처럼 겨울 줄도 모르고 아득히 殷盛하는 것이었다.

 

 

                                            유치환, 「古代龍市圖」, 민음사 세계시인선 21(1974)

 

 

 

‘삼신산 산록 만 리 벌판’이 어디인지 모르겠으나 주인공들이 용들을 사고팔던 그곳은, 적어도 한반도 어디쯤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중국 사람들을 향해 “만주벌판도 한때 우리 땅이었다.”는 유치한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한강 이북의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 땅이었다.”는 지금의 주장은 물론 심지어 “한때는 몽골 땅이기도 했다.”는 유치한 말을 거듭할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우리 아이들의 가슴속에 이런 시 속에 담긴 정서를 담아주고 싶습니다.

 

‘무엇을 왜 가르쳐야 하나?’를 이야기하지 않고, “교과서만 공부해도 수능문제를 풀 수 있어야 한다.” “수능 9등급제는 구분이 안 되어 곤란하다.” “본고사가 부활되어서는 안 된다.” “길고 복잡한 사고 과정을 거쳐 단답식 해답을 내놓아야 하는 현재의 논술고사는 본고사와 다름없다.” “앞으로도 논술고사를 봐야 하나?” 같은, 가르치고 배우는 문제보다 무엇을 어떻게 배웠든 이렇게 저렇게 평가하자는 문제에 두고두고 매달려 있는 현실이 참으로 답답합니다.

 

도대체 이 세상 어느 나라가 이렇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언제 우리 교육이 인간을 가르치는 기본문제를 논의하는 날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 “어떤 수능문제가 수준 높은 문제인가?” “이 정도의 논술 주제가 미국의 ‘어플리케이션 에세이application essay’나 프랑스의 ‘바칼로레아baccalaureat 논술고사’에 버금갈 수 있는가?” “교육과정 기준에 제시된 목표는 교과서만 가지고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가?”와 같은 주제의 세미나, 토론회가 개최되겠습니까.

 

이제 아무도 교육의 본질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로써 사교육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보기가 어려울 것 같고, 그런데도 그걸 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딱하여 한가하게 詩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詩가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詩를 가르쳐야 하며, 그것도 詩의 제목이나 소재, 시 속에 나오는 몇 개의 단어를 분석하는 따위의 공부와 평가로는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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