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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큰 인물이 되자”(?)

by 답설재 2009. 8. 23.

 

 

 

 

 

"큰 인물이 되자"

 

 

 

 

 

  대학 동기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41년 만에 만난 친구도 있었습니다. 아주 조금만 잘난 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이가 드니까 대체로 친밀감이 더 짙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 8월말 인사에서 P 교장이 끝내 교육장이 되지 못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습니다. 40여 년 간 지켜보며 모두들 “바로 저런 인물이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이구동성의 평판을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그 지방의 중요한 일들을 수없이 이루어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하나하나 챙기면서도 그 공은 동료와 후배들에게 돌리는 ‘진실한 교육자’입니다.

  그 소식에 이어서 자연스럽게 혹은 당연한 듯 교육감 선거 얘기가 나왔고, 선거에서 승리하는 자의 3대 요건이니 5대 요건이니 하는 얘기, 교육장이 되고자 하는 사람의 요건에 대한, 그게 사실인지 의심스러워서 드러내기가 곤란한 얘기들도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느 교육장은 중년에 교무부장을 할 때조차 그런 방법으로 등장했다는, 얘기하는 것 자체가 치사하고 부끄러운 얘기도 나왔습니다.

  이미 퇴임한 사람도 더러 있고, 이제 반년이나 일이 년 후에는 모두 퇴임해야 할 교육자들이 영광스러운 이야기는커녕 이런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허탈하고 서글펐습니다. 그런 말들 끝에 제가 나섰습니다. “P 교장은 교육내용 전문가인데, 짐작이지만 교육내용 전문가와 교육행정 전문가는 그 자질이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해놓고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P 교장은 교육내용만 아는 사람은 아니다. 교육장을 시켜만 주면 어떤 일이든, 누구보다 잘 할 사람이다. 그도 시장을 만나 지자체 지원 예산 확보 같은 일도 잘 하고, 그 지역의 기관․단체장들과 얼마든지 잘 협력하며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이다.’

  ‘교육감 선거에 대해 이렇게 야단들이지만, 정부에서는 직선제를 도입하면서 이런 문제점을 분명히 짚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도기이기 때문일까? 과도기에는 부작용이 있어도 허용되는 것일까?’ …….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볼일을 보며 쳐다본 쪽지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 바른 마음 갖자

  ∘ 큰 인물이 되자

  ∘ 애국 애족 하자

  ∘ 세계를 리드하자

 

  무슨 협회 아니면 협의회에서 ‘아름다운 화장실은 우리의 얼굴입니다’ 옆에 나란히 붙여놓은 쪽지였습니다. 에둘러 표현한다고 했겠지만, 아무래도 직설적인 ‘아름다운 화장실은 우리의 얼굴입니다’라는 쪽지조차 이제 그만 붙여도 좋겠지만, 휴게소 화장실에 볼일 보러 들어간 사람에게 ‘바른 마음을 가지라’니요, 더구나 ‘큰 인물이 되라’니요, ‘애국 애족 하라’니요, 더더구나 ‘세계를 리드하라’니요. 어처구니없는 일 아닙니까. 오늘 P 교장 이야기를 들은 제 기분으로는 ‘누구를 놀리나!’ 싶기조차 했습니다. 도대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보고 바른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겠습니까. 휴게소에서 바라보면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한 걸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제 입장을 생각하면 이제 서글픈 마음으로 퇴임할 날이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제가 중학생입니까, 고등학생입니까, 이제 와서 큰 인물이 되라니요. …….

  사실은, 이처럼 ‘엉뚱한’ 일은 학교에서도 흔히 일어납니다. 좀 과격한 지적일지 모르지만 내친 김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교장이므로 교장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의 기념사진첩의 맨 앞면을 왜 교장이 차지합니까? 그것도 한 페이지짜리 독사진으로도 모자라 집무 모습이니 뭐니 하고 어설픈 사진까지 덧붙입니까? 교장이 주인공입니까, 아니면 제일 높은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아이들에게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교장, 교감은 왜 1년에 한두 번, 기껏해야 네 번 정도 발간되는 학교신문의 첫 페이지를 당연한 듯 차지합니까? ‘바른 마음을 가지자’ ‘훌륭한 인물이 되자’ ‘자율적인 생활을 하자’ '도전을 즐기자' '나 자신을 사랑하자' '남과 다르게 생각하자' '남을 배려하자' '내일의 꿈을 가꾸자' '성실한 사람이 되자' '최선을 다하자' '나눔을 실천하자' 심지어 '정든 교단을 떠나며'……, 무슨 특별한 방법을 동원하지도 않은 그런 이야기를, 그 소중한 한 페이지 가득 직설적으로 늘어놓고 컬러판 인물사진을 덧붙이는 것입니까?

  교장은 왜 ‘학교행사’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갖가지 활동에 나서서 으레 인사말을 합니까? 아이들이 “우리는 인사말을 할 줄 모르니까 교장선생님이 좀 해주십시오.” 그런 부탁을 합니까? 인사말을 해야 교장입니까? 그 행사가 원활히 이루어지고 빛납니까?

  사실은 사진관에서 나와서 사진 찍어 간 것이고, 학교신문 담당 교사가 글과 사진을 달라고 애걸복걸한 것이고, 그 행사 담당 교사가 교장이 인사말을 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까? 겨우, 그런 사람이 시키는 대로나 하는 사람이 교장입니까?

 

  제가 훌륭한 교장이 아닌 건 분명하지만 나름대로 속이 터져서 한 소리이니 양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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