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에 있는 경상남도교육연수원 교감자격연수과정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우선 아침 일찍 택시로 도농역에 가서 전철을 타야 합니다. 왕십리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한 시간 가량 가면 김포공항입니다. 공항에는 좀 일찍 가야 되고, 김해공항에 내리면 창원행 리무진을 탑니다. 창원까지는 한 시간은 잡아야 하고, 그곳 어떤 병원 앞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타면 연수원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택시, 전철, 또 전철, 비행기, 버스, 또 택시, 이렇게 여섯 번입니다.
지난해에 다녀오며 ‘힘들어서 다시는 못 오겠구나’ 했는데, 이번에 또 요청이 있었고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이니까 다시 용기를 낸 것입니다. “정년퇴임을 하면 강의를 다니는 어설픈 짓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공언(公言)하고 있으니까 결국 가고 싶어도 못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길에서조차 후회를 했습니다. 지난해와 또 달리 훨씬 더 힘들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김해공항에 내렸을 때 이미 지쳤고 멀미도 나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몸이 흐느적거렸는데, 게다가 리무진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시에 강의를 시작해야 하는데, 벌써 열두 시가 가까워 배도 고프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리무진이 도착해서 시간을 재었더니 비행기에서 내린지 35분 만에 버스가 들어왔습니다. 제 앞에는 저보다 조금 젊은 남자 승객이 서 있었는데 그는 저보다 직설적으로 짜증을 냈고, 제가 “35분!”이라고 했더니 다짜고짜 운전기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차는 몇 분 간격으로 출발합니까?” 기사가 25분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다시 “우리는 35분을 기다렸습니다. 왜 이제 왔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기사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승객을 노려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승객은 기가 죽었는지 아무 말도 않고 버스를 탔고, 그 기사의 표정에 기가 막힌 제가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저도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말았습니다. 버스비가 6,000원인데 비해 택시를 타면 무조건 40,000원이니 그 돈이 아까워서 버스를 기다린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돌아올 때는 당연한듯 택시를 타버렸지만, 강의료를 감안하면 덜컥 택시를 탈 일도 아니긴 합니다. 그 승객이나 저나 기사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큰일일 것 같아 얌전하게 앉아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사가 화가 난 것이 분명했습니다. 과속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비켜 추월도 하고, 서 있는 승객들은 난폭운전으로 아주 고역을 치렀습니다. 대답도 듣지 못할 일을 공연히 시작하여 화를 자초한 것을 버스를 내릴 때까지 두고두고 후회했습니다.
교육부에 근무하던 1990년대 중반에 정부와 연구기관에서 각각 두 명씩 네 명이 ‘한국관 사업(韓國觀事業, 한국 바로 알리기 사업)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여러 기관을 방문하는 간간히 관광도 했는데, 시드니에서는 드디어 한나절 시티투어 버스를 탔습니다. 시티투어 버스라니 참 시시한 처사였지만, 관광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광은 참 편안했습니다. 겨우 하버브릿지, 시드니항, 오페라하우스, 그리고 무슨 동상 같은 걸 본 것 같은데, 제게는 그런 것들보다도 그 버스의 운전기사가 구경거리였습니다. 관광지야 사진으로 본 거나 직접 보는 거나 차이가 없어서 사진이 정확하구나, 확인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는 그런 것들을 재미가 나서 죽겠다는 듯, 흥미롭게, 여유롭게, 열심히, 전문가처럼 설명했습니다. 게다가 여러 팀 중에는 그 기사가 각 장소에서 5분이나 10분씩 시간을 주면서 쉬고 사진을 찍은 다음 승차하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나 그 기사는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냥 이런 표정이었습니다. ‘그렇지요? 이 하버브릿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렇게 잘 만든 다리, 그것도 총알을 장진한 채 두 명이서 철저히 순찰을 도는 이 다리를 시간이 걸리더라도 잘 보고 가세요. 오스트레일리아의 자랑스런 운전기사인 나는, 우리나라를 찾아온 여러분이 내가 제시한 시간을 지키지 못할 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표정은 참 기분 좋고 자부심이 가득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할까요? 저게 우리가 추구하는 직업인상(職業人像)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면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한국관사업’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장학관 한 명을 데리고 갔었는데, 시골에서는 마을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마을버스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좀 작은 규모의 버스라는 점은 같았습니다. 그러나 왠지 참 편안했습니다. 사실은 '왜 이렇게 편안하지?' 그런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장학관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다니다가 어느 순간 그 나라 마을버스 운전기사들은 승객이 자리에 앉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기사들은 승객에게 얼른 자리에 앉으라거나 뭐라고 하지도 않고 그냥 기다렸습니다. ‘질서는 아름답고 편한 것’ ‘공중도덕 잘 지켜 선진 국가 이룩하자!’ 그런 표어를 붙여 놓아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기야 써 붙이면 뭐 합니까. 그러니까 편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 때문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그 문화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멋쟁이 기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압구정역에서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택시 합승(合乘)은 예사로운 일이었습니다. 그 역에서 전철을 내렸더니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이 여러 명이었습니다. 용하게 올라탄 택시기사를 보았더니 환갑을 지났을 듯하고 제복을 차려입은, 백발에 모자를 쓰고 색안경까지 낀 멋쟁이였습니다. 그 왜 있지 않습니까? 1990년대까지 번화가의 네거리 중앙에 서서 멋지게 교통정리를 하여 출근길을 서두르다가도 한참 그 모습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던 바로 그런 분. 그런데 누가 창문을 두드리며 합승을 하겠다고 하자 그 기사는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뒤에 택시가 오네요.” 저는 그분의 택시를 탄 그 짧은 시간에 그 기사의 여러 가지 행동들을 살펴보면서 행복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그 관광버스 기사가 그립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건강하게 그 버스를 운전하고 있을까요?
피곤하고 배도 고프고 언짢기 짝이 없는, 김해공항에서 창원 시내까지의 그 시간 동안 버스기사가 제발 마음을 가라앉히기를, 버르장머리 없이 대어든 우리를 널리 양해해주기를 기원하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승객의 질문 혹은 항의에, 흡사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을 하는 제 아들을 응시하며 스스로 깨닫도록 침묵으로 응답하는 무서운 아버지처럼 냉랭한 표정으로 응시하며 아무 응답도 없던 그런 기사에게는 다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입니까? 가령, 무지 피곤하거나 어제부터 골치가 아픈 상태이거나 아침부터 상사에게 억울한 꾸중을 들었거나 부부싸움을 했거나……, 그럼 오스트레일리아나 일본 같은 나라들의 운전기사들은 다 천국에서 파견 나온 것일까요? 모든 것은 다 교육 문제일 것입니다. 어떤 교육을 받든, 누가 가르치든…….
교육자의 한 사람인 주제에 사실은 뭐 할 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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