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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무서운 운전기사

by 답설재 2009. 8. 26.

창원에 있는 경상남도교육연수원 교감자격연수과정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우선 아침 일찍 택시로 도농역에 가서 전철을 타야 합니다. 왕십리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한 시간 가량 가면 김포공항입니다. 공항에는 좀 일찍 가야 되고, 김해공항에 내리면 창원행 리무진을 탑니다. 창원까지는 한 시간은 잡아야 하고, 그곳 어떤 병원 앞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타면 연수원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택시, 전철, 또 전철, 비행기, 버스, 또 택시, 이렇게 여섯 번입니다.

지난해에 다녀오며 ‘힘들어서 다시는 못 오겠구나’ 했는데, 이번에 또 요청이 있었고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이니까 다시 용기를 낸 것입니다. “정년퇴임을 하면 강의를 다니는 어설픈 짓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공언(公言)하고 있으니까 결국 가고 싶어도 못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길에서조차 후회를 했습니다. 지난해와 또 달리 훨씬 더 힘들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김해공항에 내렸을 때 이미 지쳤고 멀미도 나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몸이 흐느적거렸는데, 게다가 리무진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시에 강의를 시작해야 하는데, 벌써 열두 시가 가까워 배도 고프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리무진이 도착해서 시간을 재었더니 비행기에서 내린지 35분 만에 버스가 들어왔습니다. 제 앞에는 저보다 조금 젊은 남자 승객이 서 있었는데 그는 저보다 직설적으로 짜증을 냈고, 제가 “35분!”이라고 했더니 다짜고짜 운전기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차는 몇 분 간격으로 출발합니까?” 기사가 25분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다시 “우리는 35분을 기다렸습니다. 왜 이제 왔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기사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승객을 노려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승객은 기가 죽었는지 아무 말도 않고 버스를 탔고, 그 기사의 표정에 기가 막힌 제가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저도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말았습니다. 버스비가 6,000원인데 비해 택시를 타면 무조건 40,000원이니 그 돈이 아까워서 버스를 기다린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돌아올 때는 당연한듯 택시를 타버렸지만, 강의료를 감안하면 덜컥 택시를 탈 일도 아니긴 합니다. 그 승객이나 저나 기사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큰일일 것 같아 얌전하게 앉아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사가 화가 난 것이 분명했습니다. 과속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비켜 추월도 하고, 서 있는 승객들은 난폭운전으로 아주 고역을 치렀습니다. 대답도 듣지 못할 일을 공연히 시작하여 화를 자초한 것을 버스를 내릴 때까지 두고두고 후회했습니다.

교육부에 근무하던 1990년대 중반에 정부와 연구기관에서 각각 두 명씩 네 명이 ‘한국관 사업(韓國觀事業, 한국 바로 알리기 사업)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여러 기관을 방문하는 간간히 관광도 했는데, 시드니에서는 드디어 한나절 시티투어 버스를 탔습니다. 시티투어 버스라니 참 시시한 처사였지만, 관광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광은 참 편안했습니다. 겨우 하버브릿지, 시드니항, 오페라하우스, 그리고 무슨 동상 같은 걸 본 것 같은데, 제게는 그런 것들보다도 그 버스의 운전기사가 구경거리였습니다. 관광지야 사진으로 본 거나 직접 보는 거나 차이가 없어서 사진이 정확하구나, 확인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는 그런 것들을 재미가 나서 죽겠다는 듯, 흥미롭게, 여유롭게, 열심히, 전문가처럼 설명했습니다. 게다가 여러 팀 중에는 그 기사가 각 장소에서 5분이나 10분씩 시간을 주면서 쉬고 사진을 찍은 다음 승차하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나 그 기사는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냥 이런 표정이었습니다. ‘그렇지요? 이 하버브릿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렇게 잘 만든 다리, 그것도 총알을 장진한 채 두 명이서 철저히 순찰을 도는 이 다리를 시간이 걸리더라도 잘 보고 가세요. 오스트레일리아의 자랑스런 운전기사인 나는, 우리나라를 찾아온 여러분이 내가 제시한 시간을 지키지 못할 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표정은 참 기분 좋고 자부심이 가득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할까요? 저게 우리가 추구하는 직업인상(職業人像)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면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한국관사업’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장학관 한 명을 데리고 갔었는데, 시골에서는 마을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마을버스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좀 작은 규모의 버스라는 점은 같았습니다. 그러나 왠지 참 편안했습니다. 사실은 '왜 이렇게 편안하지?' 그런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장학관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다니다가 어느 순간 그 나라 마을버스 운전기사들은 승객이 자리에 앉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기사들은 승객에게 얼른 자리에 앉으라거나 뭐라고 하지도 않고 그냥 기다렸습니다. ‘질서는 아름답고 편한 것’ ‘공중도덕 잘 지켜 선진 국가 이룩하자!’ 그런 표어를 붙여 놓아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기야 써 붙이면 뭐 합니까. 그러니까 편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 때문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그 문화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멋쟁이 기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압구정역에서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택시 합승(合乘)은 예사로운 일이었습니다. 그 역에서 전철을 내렸더니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이 여러 명이었습니다. 용하게 올라탄 택시기사를 보았더니 환갑을 지났을 듯하고 제복을 차려입은, 백발에 모자를 쓰고 색안경까지 낀 멋쟁이였습니다. 그 왜 있지 않습니까? 1990년대까지 번화가의 네거리 중앙에 서서 멋지게 교통정리를 하여 출근길을 서두르다가도 한참 그 모습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던 바로 그런 분. 그런데 누가 창문을 두드리며 합승을 하겠다고 하자 그 기사는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뒤에 택시가 오네요.” 저는 그분의 택시를 탄 그 짧은 시간에 그 기사의 여러 가지 행동들을 살펴보면서 행복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그 관광버스 기사가 그립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건강하게 그 버스를 운전하고 있을까요?

피곤하고 배도 고프고 언짢기 짝이 없는, 김해공항에서 창원 시내까지의 그 시간 동안 버스기사가 제발 마음을 가라앉히기를, 버르장머리 없이 대어든 우리를 널리 양해해주기를 기원하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승객의 질문 혹은 항의에, 흡사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을 하는 제 아들을 응시하며 스스로 깨닫도록 침묵으로 응답하는 무서운 아버지처럼 냉랭한 표정으로 응시하며 아무 응답도 없던 그런 기사에게는 다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입니까? 가령, 무지 피곤하거나 어제부터 골치가 아픈 상태이거나 아침부터 상사에게 억울한 꾸중을 들었거나 부부싸움을 했거나……, 그럼 오스트레일리아나 일본 같은 나라들의 운전기사들은 다 천국에서 파견 나온 것일까요? 모든 것은 다 교육 문제일 것입니다. 어떤 교육을 받든, 누가 가르치든…….

교육자의 한 사람인 주제에 사실은 뭐 할 말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