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오리아빠의 사진이야기』"오리아빠가 교장 하십시오"

by 답설재 2009. 6. 28.

블로그 『오리아빠의 사진이야기』에 우리 학교 이야기가 또 실렸습니다. 이번엔 정말로 멋진 사진, 멋진 이야기입니다. 만약 오리아빠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럼, 다른 이야기는 시시하단 말인가?” 할 수 있으니까 미리 변명해둡니다. “아, 그건 내 ‘새끼들’ 이야기라서 더 그렇게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제목은 「양지초교를 빛낼 뻔한 씩씩한 영웅들」그 파일은 서론, 본론, 결론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본론은 사진으로만 구성되었습니다. 서론은 이렇습니다.

 

“6월 14일 일요일 아침 9시, 일요일 아침을 울고 웃게 만든 아이들이 있었다. 결과로 봐서 정성 들여 만들어온 피켓은 빛을 바랐지만 새벽부터 준비해 나온 아이들 모두는 우승이란 단어에 집착하여 들뜨고 행복한 마음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본론입니다. 남의 블로그에 실린 사진을 가져올 때는 딱 한 장만 가져와야 ‘양심은 있구나’ 할 것 같아서 이 장면 저 장면 오랜 시간 망설였지만 한 장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거의 다 갖고 와버렸습니다. ‘이번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지난번에 우리 학교 선생님들의 강강술래 연수를 주선해주었을 때 이미 그런 마음을 먹고 사진 한 장을 훔쳐 온 적이 있는데, 도둑질이란 본래 그런지 -있지 않습니까.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 이번엔 아주 작정하고 “우당탕!” 털어온 것입니다.

 

한마디 한다면, ‘아하, 신문 같은데 실리는 사진은 이렇게 찍는 거구나.’ 싶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사람들이 떠들거나 움직이면 기다리고 있다가 사람들이 표정을 가다듬고 이쪽을 보거나 똑바로 서서 숨을 고르게 쉬어야 “하나, 둘, 셋!” 하거나 자연스럽게 찍는다고 “치이즈~” “김치~” 해서 셔터를 누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좀 보십시오. 우리 아이들의 저 내달리는 모습, ‘적군’과 맞붙는 모습, 저 표정과 몸놀림과, 거친 숨소리와 기어코 해내고 싶다는 저 집념과…….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그대로 생생하게 다 보이지 않습니까?

 

 

 

<오리아빠의 캡션 : 선취골이자 이날 마지막 득점 순간>

 

 

<오리아빠의 캡션 : 공을 향해 질주하는 무서운 열정> 

 

 

 

<오리아빠의 좀 편파적인 캡션 : 또래보다 훨씬 큰 상대 공격수를 막아내고 있다> 

 

 

<오리아빠의 서정적인 캡션 : 하지만 남은 건 기념사진 한 장>

 

 

 

<오리아빠의 캡션 : 응원 나온 친구들> 

 

 

 

이제 오리아빠의 결론입니다.

 

“결론? 제목에서 보았듯 빛낼 뻔한 모습이었다. 한 경기에 드로윙 파울을 일곱 개나 범할 정도로 덜 훈련된 아이들이 우승을 꿈꾸는 것은 시험공부도 안 하고 100점을 기대하는 것과도 같은 일, 그래서일까? 무모한 도전에서 억울해하는 아이는 없었다. 단지, 다음에 또 기회가 온다면 다시는 오늘 같은 일은 없으리란 다짐만 남았을 뿐……. 이기지는 못했지만 실패를 통해 이기는 법을 눈치챈 아이들……. 승리지상주의의 대한민국 스포츠에서 특기와 적성으로 마음껏 놀듯이 공차는 아이들이 차츰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자에겐 당할 도리가 없다는 어른들의 말씀으로 미래의 박지성을 여럿 보는 듯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승리에 집착하지 않고 행복하게 운동하는 모습이 사회 저변에 인식만 되어도 세상은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무슨 이야기를 더 할까요.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와서 축사를 하거나 대한축구연맹에서 누가 나오거나 FIFA 같은 데서 누가 나온다 해도 바로 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뭔가 잘못된 거겠지요.

 

저로 말하면, 학교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실패해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절대로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 구내에 비치된 전화나 핸드폰으로 무슨 연락을 하면 당장 대응해주고, 아이가 학교에서 뭘 잘못했다면, 혹은 뭘 알아맞히지 못했다면, 그걸 있을 수 없는 일로, 그런 꼴은 두고 볼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 아닙니까. 유치원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학생이 되기를 몽매에도 기원하지 않습니까.

 

그런 결과가 어떻습니까. 그걸 연구한 학자가 있습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는 우리나라 학자가 그걸 연구했습니다. 어떻게 연구했느냐 하면, 1985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23년간 아이비리그 등 미국의 14개 명문대학교에 유학 간 우리나라 학생 1400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보았더니 그 중 784명(56%)만 졸업하고 나머지는 모두 중도 탈락되었는데, 탈락 비율이 중국이나 인도의 2~3배가 되더라니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닙니까? 더구나 그 원인은 고등학교 3학년까지 입시위주의 공부를 해서 도저히 그곳 대학생활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며 “도전과 실패의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슬픔”이 그 교수의 결론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작년 여름에 쓴「베이징 올림픽 관전 단상 ⑶ 웃으며 활을 쏘던 리처드 존슨」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읽어보신 기억이 있습니까? 그 이야기라도 써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에 비하면 영 아니지만.

 

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 같습니다. 우리 학교는 썩 잘하는 아이들을 한껏 빛내주는 일, 우리 학교가 잘하는 부분을 신문, 방송 같은데 자랑하는 일은 별로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아이들이 행복해할만한 판을 자주 벌여주는 일에 힘쓰고 있다는 점. 그래서 어른들 기분 맞춰주는 일에는 ‘젬병’이지만 이 아이들, 이 학교를 지금 자랑하기보다 이렇게 키우면 지금 행복해하고, 나중에도 다 뭐가 돼도 잘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점.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이런 점, 우리 교육의 나아갈 길을 우리보다, 아니 교장보다 더 잘 아는 ‘오리아빠’ 보고 교장을 하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 참. 그러면 제가 곤란해지므로 일단 ‘명예교장’이나 뭐 그런 걸 좀 하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진짜 교장과 교사들이 짜고 오리아빠네 아들을 좀 잘 봐줄 것 같아서 싫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긴 있습니다. 무슨 위원을 하면서 “누구 아들을 어떻게 해주시오!” 기가 막히는 일이지요. 그걸 다 참고 살아갑니다. 아이들이 벌써 다 알고 있는 일을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더구나 오리아빠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지금 그분의 아들을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알아가지고 뭘 하겠습니까. 다만, 부모가 저렇게 살면 자녀는 그 부모를 보며 자라니까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골똘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