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오리아빠’와 풍물패 ‘노름마치’

by 답설재 2009. 6. 7.

오리아빠는 오남 친구입니다. 생각납니까? 학교신문『양지소식』39호(2008년 가을) 표지사진. 운동회 날 2학년 남자애들이 점심시간을 알리는 바구니를 터뜨리고 한 꼴 넣은 우리 축구선수들처럼 두 팔을 높이 쳐들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모습. 그게 오리아빠 작품입니다.

오리 유통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멀쩡한 아들을 두고 ‘오리아빠’란 닉네임을 쓰고 있고 -하기야 그 오리장사가 ‘아들농사’에 직결되니까 그게 그거일 것 같기는 합니다. 그 아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 그의 블로그 이름도 ‘오리아빠의 사진이야기’입니다. 사진 수준은 전문성 문제니까 알 바 아니지만, 그 블로그를 들여다보면 철철 열정이 넘칩니다. 그러다보니 허구한 날 오리 팔 생각을 접고 카메라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외국에까지 나가 돌아다닐 것이 분명하므로 부인으로부터 그 허구한 날 호된 비난을 듣는지, 아니면 곤혹스러운 장면을 잘 피할 수 있는 무슨 좋은 재주가 있는지 궁금하지만 물어본 적은 없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교장과 학부모 사인데 그걸 물어보겠습니까.

아이들의 부채춤을 구경한 오리아빠가 강강술래 얘기를 꺼냈습니다. 자신은 곧 무슨 풍물패(알고 보니 ‘노름마치’)를 따라 일본 나가노(長野)에 사진을 찍으러 간다고 했습니다. 아, 다시 가보고 싶은 그 나가노……. 우리 교포들과 일본인들이 그 노름에 넋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선생님들께 운동회 때 강강술래 좀 하자고 했더니 지난해엔 주요 종목은 이미 3월초에 다 정해진다고 하더니, 올해엔 부채춤 같은 건 교실에서 그룹별로 사전연습을 할 수 있지만 강강술래는 곤란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거 참 어렵구나!’ 하고 있던 차에 이런 신문기사가 생각났습니다.「강강술래, 내년 일본에서 울려 퍼진다」(조선일보, 2008.12.26.A2).

 

내년 9월 일본 도쿄에서 강강술래(중요무형문화재 제8호)가 펼쳐진다. 임진왜란 때 시작됐다고 전해지는 강강술래가 바다 건너 일본에서 공연되기는 처음이다. 제2차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 참석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25일 “2005년부터 해마다 한국에서만 열린 한일축제한마당을 내년에는 9월 도쿄에서 개최한다”면서 “재일교포나 일본인도 참여해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강강술래를 공연 프로그램에 넣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인촌 장관은 “서로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합창하며 빙글빙글 도는 강강술래는 이제 한국과 일본의 협력을 상징하는 놀이”라고 말했다. …(후략)…

 

기사 스크랩을 찾아서 다시 읽어보고는 기자가 장관만 따라다니는지 ‘노름마치’는 모르는구나 싶기도 했고,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습니다. 일본 교과서에는 우리 동요「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 실렸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지만, 우리는 어디 그렇습니까. ‘왜색’ 냄새만 나도 알레르기를 일으킵니다. 그 알레르기가 나쁘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강강술래’는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무찌를 때 마음을 모으기 위해 시작했다는 설이 있는데, 저들은 그 ‘강강술래’를 잘 배워두었다가 언젠가 세월이 많이 흐르면 자기네가 우리보다 먼저 시작했다면서 오리발을 내밀고도 충분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리는 없습니까?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우리를 35년간 지배했다고 하는가. 자신들이 잘못 해서 원자폭탄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가. 강강술래쯤은 간단할 것입니다.

올해도 가을운동회 무용 종목이 이미 정해졌다면, 혹은 ‘강강술래’ 같은 건 교실에서 그룹별 사전연습이 불가능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면, 희망하는 교사들이라도 배우게 하자 싶어서 그 오리아빠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누가 와서 어떤 방법으로 연수를 시킬지 궁금했지만, 그걸 꼬치꼬치 묻기도 어려웠습니다. 드디어 지난 2일 오후, 오리아빠와 함께 머리를 빡빡 깎고 눈이 크고 맑은 김주홍이란 분, 말수가 없고 순수해 보이는 처녀총각 각 한 명 등 네 명이 찾아왔습니다.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에헤라디야’란 닉네임을 가진 한 교사의 연수후기를 보십시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에 이어 강강술래 노래부터 익혔다. 나처럼 몇 차례 전통문화연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익숙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을 텐데 신기하게도 두어 번 따라 부르면서 저절로 음을 익히고 메기고 받게 되었다. 그리고는 모두 일어나서 느린 굿거리에서 빠른 잦은모리로 이어지는 흐름에 맞춰 스텝을 밟았고, 어느새 선생님들은 하나가 되어 흥겨움에 몰입하였다. ‘연수시간이 길고 지겨우면 어쩌나’ 했던 우려와 달리 ‘벌써 끝이야?’ 할 만큼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전문가의 지도란 이런 것이라는 것도 깨닫고, 우리 소리가 얼마나 흥겨운 것인지, 얼마나 우리와 잘 맞는지, 짧은 만남을 통해 몸으로 느껴본 시간이었다.

강강술래는 한가위에 부녀자들이 하는 놀이라는 관념 때문이었는지 강사는 당연히 여자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미래관’에 들어서면서 젊은 남녀로 구성된, 카리스마 넘치는 연수팀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었다.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들로 이루어진 전통음악 공연팀 ‘노름마치’ 단원들이었다. ‘노름마치’란 남사당의 은어로, ‘놀음을 마치다’란 뜻인데 최고의 잽이가 놀아버린 이상 그 판에서 다른 사람이 노는 것은 무의미해 놀음을 마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들은 창작활동에도 힘쓰고 있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놀이판’이라는 전통음악 워크샵을 전개한지가 15년째라고 했다.

‘놀이판’은 재일교포를 위해 1985년에 만들어진 모임이라고 한다. 교포들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인도 아니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두고 괴로워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노름마치’는 그들에게 뿌리를 일깨워주려고 전통무용, 사물놀이, 설장고, 소리 등을 통해 ‘우리 소리’를 전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워크샵이 입소문을 타면서 지금은 우리 교포들과 일본인의 비율이 반반이 되었다고 하는데, 동영상 속에는 간간이 서양인도 보였다. 국경과 국적을 넘어 땀을 흘리며 흥겹게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우리 음악이 가진 힘, 월드뮤직으로서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아쉬움이 있다면, 분명히 우리 소리임에도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일반인들은 ‘제대로 된’ 우리 소리와 놀이에 인연이 닿기가 어려워서, 특별연수를 받거나 전공과정을 밟아야만 체득하게 된다는 점이다. 아이들에게 우리 소리의 그 흥겨운 맛을 느끼게 하고 전통의 맥을 잇게 하자면 전통문화교육 프로그램 개발이 숙제일 것이다.

 

 

 

 

 

 

 

‘김주홍과 노름마치’는 우리 소리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순식간에 익힐 수 있는 피를 가진 쪽이 한국인이라는 걸 증명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세계인과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김주홍 노름마치』음반을 열어보았더니 이렇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 진도 출생• 이광수, 김덕수에게 사물놀이, 무속장단, 비나리 사사• 이광수와 노름마치 창단(1993년)• 노름마치 대표(1995년)• 인간문화재 안숙선, 한승호에게 판소리 사사• 국립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판소리) 졸업• 영화『왕의 남자』풍물지도 및 출연• 연극『아름다운 남자』(남미정 연출) 2006 서울연극제 ‘음악상’ 수상• 현 노름마치 예술감독1989년 겨울,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셨다.“음… 그래, 북 속은 비어 있다.”비었음은 부족이요, 부족은 갈구해야 하고, 갈구는 열정이 필요하고, 열정은 힘이며 생명력이다.

 

 

 

 

블로그 『오리아빠의 사진이야기』 「신애원에서 천사들을 만나다」(2009.6.1)에서 캡쳐해온 사진

 

 

 

 

제게 ‘교육’을 위한 시간이 좀 남아 있다면, 그날 만난 김주홍, 그리고 말없고 온화한 표정 속에 우리 소리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는 그 처녀총각을 사랑하며 지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 파란편지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2007. 8. 13).

 

노는 것을 공부처럼, 공부를 노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려니까 우리의 '진도아리랑'이 생각납니다. 저는 자라면서 "나는 장차 무엇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더러 변하기는 했지만 저에게도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한 강렬한 욕구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걸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 '한가한(?)' 이야기를 할 겨를도 없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드디어 오십이 된 어느 날, 우연히 국악강좌를 들었는데 그 강사가 불러주는 저 '진도아리랑'을 들으며 '아, 나는 다시 태어나면 국악을 하고 싶다!'는 강하고 때늦은 욕심을 느꼈고, 당장 누군가에게 난생 처음 그 말을 해보았습니다. 그걸 하면 삶이 고달프지도 궁색하지도 않고 물처럼 구름처럼 그렇게 흘러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