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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스승의 날 Ⅱ (살아 있을 때라도 사랑해주자)

by 답설재 2009. 5. 15.

 

 

 

"여보! 이제는 기나긴 34일보다 더 힘들지도 모를 이별 연습을 해야겠지? …(중략)… 아버님 묘소가 있는 고령군 기산면 선산으로 갈 생각이야. 전동차 안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두개골과 한 줌의 뼈 조각밖에 남지 않아 집안 어른들이 화장을 권유했지만 당신에게 같은 아픔을 두 번 겪게 할 수는 없잖아."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의 장례식에 즈음하여, 한 남성이 애끓는 심정을 나타낸 독백의 일부이다.1

 

지하철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그저 '대구에서는 또 지하철 사고가 났구나.' 체념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그러다가 수많은 사람이 불에 타죽은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는 것을 보면서 '아, 이건 전쟁에 못지않은 참사구나' 하였고, 그들이 죽음을 앞둔 순간에 핸드폰으로 사랑하는 가족에게 그 순간의 참혹함과 인간 본성으로서의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는 것을 전할 때에는 이렇게 살아 있는 순간이 새삼스러웠고, 평소에 출퇴근하는 전철은 괜찮은지 한동안 의심스런 눈길로 살펴가며 다녔다. 아닌 게 아니라 대구 지하철 사고 이후에는 웬 일인지 서울에서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더러 일어났다. 전동차 문이 잘 닫히지 않거나 도중에 멈추거나 하는 경미한 사고였지만, 그 순간 승객들은 핸드폰으로 가족을 불러 자신의 소재를 알리느라고 야단들이었다고 했다.

 

대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때였다. 사고 소식을 듣는 순간, 내가 살다가 온 대구에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가까운 사람 중에 변을 당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일단 한숨을 돌렸었다.

 

대구에서는 1학년을 담임하다가 그 해 12월부터 서울에서 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다. 전부터 교육부 출장을 자주 다녔고,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나 학부모, 학교측에 대단히 미안하여 나를 자꾸 부르는 분에게 "이제는 출장을 오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아예 파견 근무를 시킨 것이다. 파견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어려움을 잘 모른다. 근무는 정규 직원보다 힘들고 직원 취급도 잘 해주지 않으면서 봉급은 소속 기관에서 받아야 하기 때문에 1년에 한두 번은 꼭 학교에 찾아가 미안한 마음을 나타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과 헤어진 지 1년 만에 학교를 찾아갔을 때였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행정실에 들어가 봉급 보내주는 분과 마주앉아 있을 때였다. "우리 선생님이다! 우리 선생님! ……." 지난해에 담임했던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와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며 야단들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그 애들의 손을 한 번씩 잡아주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한 아이만은 돌아가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그새 새로 몰려든 아이들 틈에 끼어 있었다. 나는 또 나가서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이젠 모두 돌아가라고 했는데 그 아이는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이미 온 얼굴과 옷소매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애는 변두리의 조그마한 교회 사찰집사의 아들이었다. 지지리도 가난하였다. 게다가 내가 담임하고 있을 때 자전거로 양말과 장갑을 배달하는 일을 하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불구자가 되었다. 마침 그 교회 목사 아들도 우리 반에 함께 다니고 있었는데 목사나 그 부인, 목사 아들이 모두 착하여 사찰집사의 그 아들을 잘 대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가족의 마음들이 오죽했으랴. 아마도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눈물을 머금으며 내 아들이 자라면 훌륭한 사람이 될 테니까 그때까지 온갖 어려움을 참고 잘 키우자는 다짐을 하며 애잔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었다. 태풍이 세차게 불어간 9월 어느 날 밤, 그 애 어머니가 내 아파트 문을 두드리기도 했었다. 일 나가는 과수원에서 마침 태풍에 떨어진 풋사과를 주었겠지. 그 풋사과 한 상자를 선물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 조그마한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래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 어쩔 수 없어 데리고 들어가 무릎에 앉혔을 때 행정실 직원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이 그리워서 그래요." 가난하긴 해도 부모가 다 있지 않느냐고 하자 한참 만에 빙 둘러 "그 어린것이 궁핍한 가정에 태어나 아무 학교나 공립학교에 다니면 될 것을 하필이면 이름난 국립 학교에 다니면서 서러움과 고생이 심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날 그 아이는 끝내 한마디 말도 못하고 흐르는 눈물만 주체할 수 없어하며 내 품에 안겨 있다가 돌아갔다. 그 이후 나는 그 아이의 근황을 모른 채 몇 년이 흘렀고 그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나는 모처럼 한가한 시간에 그동안 쌓아놓은 신문을 넘겨보다가(일주일치 신문을 꼭 일요일 오전 내내 넘겨보며 지냈다.) 대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기사를 꼼꼼히 다시 보게 되었고, 사망자 명단에서 괄호 안에 '中1'이라고 쓰인 그 애의 이름을 발견하고 말았다. 순간 동명이인(同名異人)도 많지만 그 애의 이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면서도 그 애가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햇수를 따지면 중학교 1학년이 틀림없었다. 신문을 펼쳐 놓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 애의 집은 상인동이 아니었을 것이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친구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친구가 되겠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 겨우 한 친구를 사귀었는데 서로 집이 멀리 떨어져 있었겠지. 모처럼 느긋하게 등교해도 좋은 소풍 가는 날, 그날 하루만이라도 그 친구와 둘이서 함께 가고 싶어 멀리 떨어진 친구네 집을 향해 걸어서 상인동 전철역 공사장을 지나게 되었고, 그 순간 망할 놈의 가스가 폭발하여 처참한 모습으로 영영 가게 되었겠지.'

 

우리는 흔히 학생들에게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애에게 교육은 무엇이고 장래는 다 무엇이었을까. 장래는 고사하고 하루하루 얼마나 고달픈 삶으로써 고사리 같은 짧은 인생을 채우고 마감하게 되었는가. 그걸 살아간다고, 어린 나이에 뿌린 눈물은 얼마였을까. 그러므로 교육의 구실은 우선 그 날 그 날 하루하루가 행복하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애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그 머나먼 길을 갔을까. '세상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며 갔을까. 짧은 그 생애에 잊어야 할 것은 별로 없었으므로 레테의 강2 대신 눈물의 강이나 건넜을까.

 

그 여린 영혼, 이 세상에 잠시만 머물렀던 그 영혼을 담고 있던 초라한 모습의 애잔함이 가슴을 저민다. 이제 무디어진 가슴인데도 녹아내린다.

 

 

<메모>

이 원고는 졸저 『보고 읽고 생각하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2005, 아침나라)에 실은 글입니다. '스승의 날'을 보내고 돌아와 앉은 밤, 저는 그 아이가 또 생각났습니다. 모처럼 만나 웃으며 헤어졌어도 그리울 아이, 그 아이는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울기만 하고 헤어졌는데, 저도 죽어 저승에 가면서 그 '레테의 강'을 건너버리면 그 아이를 어떻게 알아볼까요. 그냥 '눈물의 강'만 건넜으므로 그 아이가 먼저 저를 알아볼까요? 그러면 뭘 합니까. 저는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할 텐데요. 그러면 그 아이는 분명히 그날처럼 또 그렇게 울 것입니다. 또 한 번 기막힐 일이지요.

유치하게 "제발 가난한 아이에게도 정을 주자", "차별하지 말자"는 말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 꾸중을 듣고 매를 맞으면서라도 끽 소리 말고 잘 배워야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말 좀 그만하자는 뜻을 강조하고 싶어서 '살아있을 때라도 사랑해주자'는 어처구니없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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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일보, 2003. 3. 26, 31면, '불 속에 당신을 두 번 넣을 수야…'(한강우 기자).
2. 레테(Lethe)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후 세계의 강. 죽은 사람의 혼이 그 냇물을 마시면 자기의 과거를 모두 잊어버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