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이었지요. 50여 년 전입니다. 아침을 먹는데 아버지가 소를 판다고 선언했습니다. 소를 팔아 작은 소를 사면 돈이 남고 이듬해에는 그럭저럭 일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옛 이야기에서처럼 우애가 깊어 큰댁을 도와주면서도 형편을 더 늘려보려고 애쓰던 때였습니다.
내가 할 말은 있을 수 없었고, 그냥 외양간을 들여다봤습니다. 그게 이별의식이었습니다. 소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소는 사람의 말과 생각을 읽으며, 꿈속에 나타나면 그건 조상의 현현(顯現)이라고 했습니다. 소는 외양간을 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아침이면 순순히 따라 나와 들로 향하던 그 소가 그날 아침에는 그랬습니다.
『워낭소리』는 그런 날들의 얘기였습니다. 몇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1년 안에 죽어요.” 수의사의 ‘별 쓸데없는 소리’에 “에이, 안 죽어.” 하고 애써 부정하던 노인, 늙어서 맛도 없고 질기기만 할 고기값으로 150만원밖에 쳐줄 수 없다는데도 600만원을 달라고 완강하게 버티던 노인, 끝없이 계속되는 아내의 잔소리와 푸념, 그 잔소리와 푸념은 여인들의 ‘필수품’ 같은 것이었지만, 그 여인들은 ‘힘이 다 빠져버린’ 남편을 홀대하거나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때 그렇게 팔려간 그 소의 뒷다리에 달라붙은 그 쇠똥딱지 한번 씻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살아가던, 어렵기만 해서 아무런 꿈조차 꿀 수 없었던, 밋밋하고 밍근하고 밍밍하기만 하던 그 볼품없었던 현실의 기록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우리의 부모 세대, 조부모 세대는 거의 그렇게 살았는데 그걸 벌써 남의 얘기인양 ‘작품’이라고 보고 앉아 있게 되었고, ‘감동’하게 되었나 싶었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삶’이 다 옛 얘기가 되었으므로 이젠 우리가 행복하게 된 것일까요? ‘짐승’하고 ‘함께’ 살기는 고사하고-하기야 애완견을 애지중지하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버려지는 노인의 비율이 OECD 국가 중 최고인 이 나라는 이제 살기 좋은 나라가 된 것일까요?
잊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워낭소리』는 그것들을 기억해두려는 작품이겠지요.
『워낭소리』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습니다. 이충렬 감독이 말했습니다.
“워낭소리는 우리들 기억 속에 화석처럼 잠들어 있는 유년의 고향과 아버지와 소를 되살리는 주술과도 같은 작용을 할 것이다. 삶의 내리막길에서 빚어낸 어쩌면 이 시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소와 아버지의 아름다운 교감과 눈물겨운 헌신을 그리고 싶었다.”
이 작품의 해외에서의 제목은 『Old Partner』라는데, 글쎄요. Old Partner, Old Part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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