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by 답설재 2009. 4. 15.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김재혁 옮김, 이레 2005

 

 

 

 

 

 


 

블로그를 찾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이쯤에서 '아, 우리가 볼 만한 글이 아니구나' 하고 돌아가진 않을 것이므로.

 

「케이트 윈슬렛, 생애 마지막 전라 누드 공개」

 

『스포츠조선』(2009.3.12)은 동명의 영화를 이런 제목으로 소개했습니다. 영화가 잘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보지 않았고, 볼 기회도 없었습니다. 어느 영화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문화일보』 2009.4.1, 오동진).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를 영화로 만든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원작보다 훨씬 더 풍만하고 성숙하며 나름 요염한 작품이다. 그건 전적으로 주인공 한나 역을 맡은 케이트 윈즐릿 때문인데 이 영화를 만든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윈즐릿의, 적절하게 살집이 있는 몸매를 마치 한 폭의 명화 속 여인의 나신(裸身)을 그려내듯 카메라에 담아냈다.

…(중략)…

영화의 배경은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다. 고등학생인 마이클은 열병에 걸려 길거리에서 신음하던 자신을 데려가 보살펴 준 한나에게 마음이 끌린다. 끌리는 정도가 아니다. 어떻게든 이 30대 여인에게 구애를 해보려고 애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일을 계기로 여인은 아이의 욕망을 받아주기 시작한다. 한번 열린 육체의 문은 걷잡을 수 없는 불꽃을 만드는 법이다.

한나는 마이클만큼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욕망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위태위태한 둘의 관계를 이어주는 일이 생긴다. 그건 바로 마이클의 ‘책읽기’다. 언제부턴가 한나는 섹스를 하기 전 아이에게 꼭 책을 읽어 달라고 한다. 마이클은 여인과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열과 성을 다해 ‘임무’를 수행한다.

셰익스피어에서부터 (짐작컨대) 톨스토이에 이르기까지 마이클은 한나에게 열심히 책을 읽어 주고 한나는 마이클에게 열심히 섹스를 해준다. 둘은 그렇게 점점 더 깊은 관계에 빠져들게 되지만 파국은 엉뚱한 방향에서 터진

 

 

다른 어느 기자는 후반부의 줄거리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문화일보』 2009.3.23, 김구철 기자).

 

 

영화는 한나의 비밀스런 과거와 그녀가 지닌 콤플렉스를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8년 후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나치전범을 재판하는 법정에서 한나를 보게 된다. 피고석에 선 한나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자존심을 지키기 위해’란 그녀 자신이 글자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말함; 옮긴이 주) 모든 죄를 떠안은 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런 한나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마이클은 안타까운 눈물을 흘린다.

후반부는 20년간 떨어져 지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며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성인이 된 마이클은 감옥에 있는 한나에게 오래 전 읽어줬던 책들을 녹음해서 보내고, 한나는 마이클의 목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는다. 애절하게 사랑의 감정을 이어온 두 사람은 담담한 재회의 시간을 갖는다.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의 몇 장면입니다. 영화 이야기에서 추측해 볼 만큼 소설에는 '에로틱한 부분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이게 다"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에서, 슬립이 감추기보다는 살짝 드러내 보이고 있는 그녀의 젖가슴에서, 발을 무릎 위에서 의자로 옮겨갈 때 슬립을 팽팽하게 만들던 그녀의 엉덩이에서, 그리고 처음에는 창백한 맨살이었다가 스타킹 속에서 비단처럼 은은하게 빛나던 그녀의 다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17)

 

나는 두려웠다. 서로의 몸을 더듬는 것이, 키스가, 그리고 내가 혹시 그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내가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그러나 잠깐 동안 서로를 끌어안은 채, 그녀 몸의 냄새를 맡고 그녀의 체온과 힘을 느끼고 나자,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손과 입을 통한 몸의 탐색, 입들의 만남, 마지막으로 그녀가 내 몸 위로 올라왔고 우리는 눈과 눈을 마주쳤다. 이윽고 절정에 도달했을 때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처음에는 자제해보려고 했으나 다음 순간 나는 너무나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녀는 손으로 내 입을 막아 나의 절규를 잠재웠다.(31)

 

하지만 다음 날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몸을 뺐다.

“그 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는 진지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 전 반 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 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또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 이것이 우리의 만남의 의식(儀式)이 되었다.(50~51)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148)

 

나는 단 한 번도 한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위해 책을 낭독하는 일을 계속했다. 1년 동안 미국에 가 있을 때에도 나는 그녀에게 그곳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보냈다. 나는 특별히 기간을 정해놓지는 않았다. 어떤 때에는 카세트테이프를 일주일이나 보름마다 부쳤으며, 어떤 때에는 3주나 4주만에 부치는 경우도 있었다. 한나가 이제 혼자서 글을 읽는 법을 익혔으므로 내가 보내는 카세트테이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거라는 우려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것 외에도 책을 읽으면 그만이었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