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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막스 피카르트『침묵의 세계』Ⅱ

by 답설재 2009. 4. 9.

막스 피카르트/최승자 옮김

『침묵의 세계』

까치, 1999(5쇄)

 

 

 

 

 

 

 

다시 『침묵의 세계』의 세계를 소개합니다. 「내가 읽은 책」이라는 코너에 싣는 책 속에는, 읽었으므로 그 내용을 정리해 두려는 것도 있고, 구입비가 아깝고 읽은 시간이 아까워서 적어두는 것도 있지만, 남에게는 감추려 했다가 '큰맘먹고' 소개하는 책도 있습니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는 그런 책입니다.

 

우리 학교 교직원 생일 때, 지난해에는 매달 다른 책을 선정해서 사주었는데, 그게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선 "1만원 미만의 책으로 선정해주면 좋겠다"는 행정실장의 통제를 받아야 하니까 그것부터 까다로운 조건이 되었습니다. 교직원들은 잘 모르지만, 교장 혼자서 다 써버리는 줄 아는 '업무추진비' 중에는 교사들이 집행하는 경비, 행정실에서 주관해서 쓰는 경비도 있으므로 한정된 예산으로 1년을 살아간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올해엔 무조건 이 책 『침묵의 세계』로 통일하기로 하고(원어민 영어교사 캐서린에게만은 초콜릿) 연초에 한꺼번에 구입해 두고 선물하고 있는데, 그래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이 어렵다는 평가입니다.

"이 정도가 어렵다면 어떻게 합니까?" 한다면 "당신이 교장이라고 나에게 잘난 체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렵긴 합니다. 마음이 편할 때가 거의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읽으면 무언가 보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잡음어(雜音語)'에 대한 부분입니다.

 

 

 

잡음어

 

 

1

 

오늘날 말은 말과 동시에 침묵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 활동을 통해서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말, 다른 어떤 말의 잡음으로부터 생기고 있다. 말은 또한 이제는 침묵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침묵 속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잡음어 속에서 끝나며 그리하여 그 잡음어의 소음 속에 가라앉는다. 항시 잡음어로부터 말 같은 것이 생기고 항시 잡음어 속으로 말 같은 것이 사라진다.

말은 더 이상 정신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음향적 잡음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정신에서 물질에로의 변형이며, 정신인 말의 물질인 잡음어로의 변형이다.

잡음은 소리 없는 공허를 덮어버리는 소리 나는 공허이다. 그와 반대로 참된 말은 고요한 침묵의 표면 위에 드리워진 소리 나는 충만함이다.

…(후략)…

 

 

3

 

…(전략)…

이 잡음어 속에서는 모든 것이 말해질 수 있지만, 또한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밀려 취소될 것이다. 말해지기 이전에 이미 취소되는 것이다. 잡음어 속에서는 가장 어리석은 것도 혹은 가장 현명한 것도 이야기될 수 있지만, 그 둘 다 잡음어 속에서는 똑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다만 잡음어 전체적인 음조(Ton)일 뿐이다. 그 음조가 만들어지는 것이 현명함에 의해서든 어리석음에 의해서든, 악에 의해서든 선에 의해서든 다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무책임한 기계 장치이다.

이 잡음어 속에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속으로 옮아가며 또한 모든 것이 모든 것 곁에 있는 까닭에 인간 외부에 어떠한 한계도, 인간 내부에 어떠한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가 모든 것에 다가갈 수 있으며 각자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이를테면 누군가가 괴테처럼 휘더린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누군가가 야콥 브르크하르트처럼 렘브란트를 멀리하는 일은 생길 수 없다(진정한 한 인격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 인격 속에 어떤 한계가 있고, 바로 그것이 그 인격을 결정짓는다). 잡음어 속에서는 한 사람이 괴테와 휠더린과 렘브란트와 야콥 부르크하르트를 동시에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잡음어에 붙어다니고, 잡음어로부터 모든 것이 생성, 발전될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이제는 하나의 특별한 행위에 의해서, 어떤 결단이나 창조적 행위에 의해서 생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잡음어로부터 저절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일종의 흉내에 의해서 잡음어로부터 주변 상황이 요구하는 것이 나오게 되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변 세계가 나치적일 때에는 나치적인 것이 인간에게 주어지는데, 그것은 그 인간이 양심의 행위를 통해서 나치즘에 대한 결단을 내리는 일이 없이 일어난다. 인간은 완전히 잡음어의 일부가 되어 자신에게 어떤 것이 주어져도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잡음어가 인간에게 나치적인 것을 가져다주기를 그치는 것은 잡음어가 어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때, 아니 그보다는 잡음어가 스스로 싫증을 내거나 그 음조를 바꾸었을 때이다. 인간의 행동거지는 더 이상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고 잡음어의 움직임에 달려 있다. 인간은 이제는 말과 더불어, 말에 의해서 살지 않는다. 말은 더 이상 인간의 진리를 위한, 혹은 사랑을 위한 결단을 내리는 장소가 아니다. 잡음어에 의해서 인간을 위한 결단이 내려진다. 잡음어가 주된 것이며, 인간은 다만 잡음어가 펼쳐지는 장소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은 잡음어를 위한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후략)…

 

 

4

 

…(전략)…

대략 1920년대까지는 아직도 “작업(Betrieb)”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말하자면, 잡음어는 그래도 아직은 분명하게 구별되는 어떤 일을 둘러싸고 움직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일을 둘러싸고 움직이는 잡음어의 움직임, 그것이 바로 “작업”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사람들은, 예를 들어, 그 잡음어가 둘러싸고 떠들어대는 문학 장르를 알아보았다. 즉 사람들은 표현주의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잡음어보다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또한 사람들은 아직은 “사회 복지”라는 이념을 잡음어가 그것을 휘젓고 뒤덮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분간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어떤 정치적 원칙에 대해서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잡음어보다 분명하게 이해했다.

오늘날에는 전혀 다르다. 이제는 대상이 예전처럼 자기 자신의 주위에 잡음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잡음어가 우선적이며 잡음어가 대상을 찾는다. 잡음어와 대상이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작업과 대상이 어떤 하나의 잡음 속에 잠겨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이러저러한 특정한 문학적 혹은 정치적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만 잡음 안의 길 표지판들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대상들이 전체적인 잡음 속으로 들어가는 자리일 뿐이며, 그리하여 거기에서 인간도 그 대상들을 뒤쫓아 그 대상들과 함께 잡음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5

 

잡음어는 모든 것을 평준화시키고 모든 것을 똑같게 만든다. 그것은 하나의 평준화 기계가 될 뿐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잡음어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거기에서는 또한 어떠한 것도 더 이상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전체적인 소음 안에 쏟아져 있다.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나아가고,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한 요구권을 가진다. 군중의 신분은 정당화된다. 군중은 잡음어와 짝을 이룬다.

군중은 잡음어와 같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가득 채우지만 어디서도 붙잡을 수가 없다.

 

잡음어는 아주 멀리까지 미치고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인간은 무엇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다. 잡음어는 들끓는 벌레떼와 같다. 분명치 않은 구름장, 벌레들의 구름장만이 보일 뿐이다. 그 구름장으로부터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와 모든 것을 뒤덮고 모든 것을 똑같게 만든다.

인간은 그 무엇인가가 나타나서 그 분명찮은 잡음어들을 날카로운 소리로 산산이 부수어버리기를 기다린다. 인간은 그 윙윙거림의 단조로움에 지쳐버렸다. 그리고 형체도 없이 분명찮게 이러저리 움직이는 그 잡음어 자신도 그 무엇인가가 자기 자신 속으로 떨어져내려 자신을 파열시키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독재자의 외침과 독재자의 슬로건, 그것이 바로 잡음어가 기다리는 것이다. 독재자의 외침과 그 명확함, 잡음어와 그 불분명함이 서로 호응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불러내고, 하나는 다른 하나가 없이는 생존 불가능하다.

이 독재자의 슬로건에서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오직 그 소리높음과 명확함뿐이다. 인간은 이제 하나의 표지판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안다. 이전에는 인간은 불분명한 잡음어의 한 부분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명확한 슬로건1의 한 부분이다.

독재자의 슬로건은 내용 없는 외침일 뿐이다. 독재자가 한 나라를 침략할 때, 그 중요성은 마치 결코 국경선의 확대가 아니라 고함의 확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나라의 외침, 다른 나라의 침묵하는 현실을 고함으로 눌러버리려고 한다. 이전에는 침묵이 있던 곳에 고함을 내던지는 것이다.

슬로건은 잡음어에 속한다고 우리는 말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불거져 나온 야만성, 잔혹한 행위, 침략 전쟁 또한 잡음어에 상응한다. 잡음어는 무정형(無定形)이고 그래서 그 어떤 정형(定形)의 것, 분명한 것이 자기 안에 굴러오기를 기다린다. 잡음어 속에서 헤매는 인간은 자신 앞에 나타난 전쟁이라는 확고한 구조물을 통해서, 심지어 잔혹한 행위라는 확고한 구조물을 통해서 구제받는다. 그 때문에 잡음어의 세계에서는 그토록 쉽게 전쟁과 잔학 행위가 벌어지게 된다. 그 잡음어 세계의 공허가 전쟁과 폭탄들을 흡수한다.

세계가 시작되었을 때에 거의 들리지 않게 말들이 행위를 선행했듯이 ─ 말이 마치 마술처럼 어떤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아는 까닭에 인간은 겁이 나서 말소리를 낮추는 것이다 ─ 세계가 끝날 때에도 행위들은 거의 언어 없이 나타날 것인데, 그것은 말이 더 이상 창조적인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을 파괴되어버린 것이다.

…(하략)…

 

 

소설이 아닙니다. 그래서 재미 없을지도 모르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이 납니다. 마음이 조용할 때 펼치게 되고, 그러면 그 마음이 더 조용해집니다.

나중에라도 '가만 있어 봐! 이 책 좋잖아!' 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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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슬로건과 상투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상투어에서는 그 상투어가 유래한 말이 아직 느껴진다. 그 말이 그 말의 본질에서, 말하자면 그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상투어가 되었다. 그러나 슬로건은 결코 말에서 떨어져나온 것이 아니다. 슬로건은 무엇인가 말 비슷한 것으로 꾸며진 순전히 음향학적 소리에서 생긴다. 슬로건은 잡음어를 기계적으로 압축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