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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Ⅱ

by 답설재 2009. 3. 3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에 연재 중인 이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4월호(연재 제4회)에는 지난 번에 소개한 부분에 나오는 그 '어머니'에 대한 회상이 <책읽기>라는, 역자가 임의로 붙인 작은 제목의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음은 그 중의 일부입니다.

 

어머니는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충실하게 읽는 낭독자는 못 되었지만, 무엇인가 진정한 감정의 어조가 느껴진다 싶은 작품의 경우에는, 그 해석이 경건하고 소박하며 그 목소리가 아름답고 부드럽다는 점에서 역시 훌륭한 낭독자였다. 실생활에 있어서도,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예술작품이 아니고 사람인 경우, 그가 전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라면, 당신의 목소리나 태도나 말투에서 그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지도 모르는 어떤 명랑한 빛을 드러내기를 삼가고, 그가 노인이라면 그의 나이를 생각나게 할지도 모르는 생신이나 기념일 같은 화제를 피하고, 그가 젊은 학자라면 그에게는 지루하게 여겨질지도 모르는 집안 살림살이 이야기를 멀리하려고 어머니가 얼마나 겸허한 마음으로 조심하는가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었다. 엄마가 조르주 상드의 산문 문장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산문에서는 언제나 선량한 마음씨와 도덕적 고귀함이 배어나고 있었는데, 엄마는 할머니로부터 그것을 인생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더 귀중한 것으로 여기도록 배웠고, 훨씬 나중에 가서야 나는 어머니에게 책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그 무엇보다도 더 귀중한 것으로 여길 것은 못 된다고 가르쳐주게 될 것이었다. 그 산문을 읽을 때, 엄마는 힘찬 물결이 그 속으로 쇄도하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일체의 잔재주나 선 멋을 당신의 목소리에서 없애도록 유의하면서, 마치 당신의 목소리를 위해서 쓰여진 듯한 문장들, 이를테면 당신의 감수성의 음역에 꽉 들어차는 것 같은 문장들에 요구되는 모든 자연스러운 정다움, 넉넉한 부드러움을 유감없이 쏟아놓는 것이었다. 엄마는 적절한 어조로 읽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문장 이전에 존재하여 그 문장을 암시했던, 그러나 단어 자체가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진심어린 억양을 다시 찾아냈다. 그 어조의 힘으로, 어머니는 낭독을 하면서 동사시제에서 느껴지는 모든 생경한 느낌을 완화시켰고, 반과거와 정과거에는 선량한 마음씨에 담긴 부드러움과 다정함 속에 배어 있는 우수를 부여했고, 음절의 속도를 때로는 빨리하고 때로는 늦추어서 비록 그 길이가 다른 것이라 하더라도 음절들을 균일한 리듬 속에 담도록 함으로써 끝나는 문장을 다음에 시작되는 문장 쪽으로 이어가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어머니는 그렇게도 평범한 그 산문에다가 감정이 살아 있고 연속성 있는 일종의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었다.(59~60)

 

이 글에서 어머니가 읽어주는 '조르주 상드의 소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역자의 주가 달려 있습니다. 좀 긴 편입니다.

 

아버지가 다른 방으로 잠자러 간 동안 어머니가 아들의 방 “침대에 앉아서” 읽어주는 소설로『프랑수아 르 샹피』가 선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장 루세, 도미니크 페르낭데즈, 장 피에르 리샤르, 줄리아 크리스테바, 폴커 롤로프, 에니드 마란츠 등 많은 비평가와 주석자들이 이 점을 지적하고 심층 분석한 바 있다.『프랑수아 르 샹피』(1850)는 상드의 다른 소설에 비하여 ‘전원적’인 성격이 덜 강조된 사랑의 이야기다. 프랑수아는 방앗간 여주인 마들렌 블랑셰가 거두어들인 고아(양자)로 장차 양모인 마들렌의 연인이 된다. ‘르 샹피’는 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고장 베리 지방의 사투리로 ‘주워온 아이’라는 의미다. 양자에 대한 아내의 지극한 사랑을 질투하는 남편 때문에 방앗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프랑수아 르 샹피는 나중에 마들렌이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었을 때 성장하여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양모와의 사이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녀와 결혼하여 남편이 된다. 이 소설의 한 장면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고아 프랑수아는 방앗간 여주인에게 거두어졌을 때 아들이나 된 듯이 그녀의 키스를 받고 싶은 마음을 은근히 내비친다. 그리고 실제로 키스를 받자 그는 보이지 않는 한구석으로 가서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간단히 말해서 책의 내용은 어머니와 아들의 사랑이 남녀 간의 사랑, 즉 결혼으로 변한 근친상간적 테마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르주 상드의 이 소설은 프루스트 소설을 요약하여 비추는 거울, 즉 일종의 ‘심연체계’의 관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프루스트는 1909년에 쓴 원고에서 어머니가 화자인 “나”에게 상드의 소설 두 권(『프랑수아 르 샹피』와『마의 늪』)을 읽어주는 것으로 이 장면을 구성했었다. 그러나 결국『마의 늪』은 삭제하고 근친상간적인 테마가 개입된프랑수아 르 샹피』만을 낭독용으로 남겼다. 이 한밤중의 소설책 읽기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가장 핵심적이 “의식”인 입맞춤이 스완의 방문으로 좌절되었을 때 그 보상, 입맞춤을 대신하여 수행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한밤에 이루어지는 이 “행복한 근친상간”(장 피에르 리샤르)의 테마는 이처럼 앞서 본 “잠자리의 드라마”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면서 심층 의식적인 여운을 남긴다. 주인공인 아들은 어머니가 읽어주는 이 이야기에서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경험하고 있는 행복감을 발견한다. 그런데 과연 어머니는 마치 이 행동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이 소설이 누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듯, 다시 말해서 “소리 내어” 읽는 동안 그 진정한 의미의 노출을 꺼리듯, “연애 장면이 나오면 모조리 건너뛰어버”린다. 그러나 이런 ‘검열’은 오히려 아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신비감’을 자극할 뿐이다. 그의 관심은 텍스트가 드러내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검열되고 은폐되어 있는 의미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 신비감의 근원은 소설의 제목, 즉 ‘샹피’라는 ‘불그스레하고’ ‘달콤하고’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것은 사랑의 상상을 자아낸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이 소설의 근친상간적 어머니의 이름이 뒤에 나오는 과자와 동일한 “마들렌”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이름은 성서적 함축을 통해서 ‘금지된 성性’의 테마를 한층 더 강화한다. 한편,『프랑수아 르 샹피』가 “이때까지 소설다운 소설을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던 화자에게 문학에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상기할 필요가 있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장차 이 소설의 마지막 권인『되찾은 시간』에서 화자는 게르망트 대공 댁 서재에서 우연히 이 소설을 또다시 발견한다. 그것은 그가 네 번째의 “불수의 기억”을 경험하는 계기가 된다. 이는 바로 화자가 ‘미학적 계시’를 받아 작가가 되겠다는 소명의식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렇게 『프랑수아 르 샹피』는 소설의 모두와 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덧붙임>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동경"(1955년, 알베르 까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