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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아멜리 노통브 『아담도 이브도 없는』

by 답설재 2009. 4. 13.

 

 

 

 

 

아멜리 노통브 아담도 이브도 없는』

이상해 옮김, 문학세계사, 2008.

 

 

 

 

벨기에인 아멜리와 일본인 린리와의 첫사랑 이야기. 표지에 적힌 대로라면 '애틋하고 발랄하고 섬세한'. 가령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그는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나는 그를 만나면 늘 즐거웠다. 나는 그에게 우정과 애정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없어도 그립지는 않았다. 그에 대한 내 감정의 방정식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우리의 이야기가 더없이 멋져 보였다.

내가 답변 혹은 상호성을 요구할 수도 있는 사랑고백을 두려워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영역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 하나의 형벌이었다. 나는 곧 내 두려움의 근거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린리가 나에게 기대하는 건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뿐이었다. 그가 옳았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 그것만 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내가 그 청년에 대해 느꼈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 현대 프랑스어에는 없었다. 하지만 일본어에는 그것에 딱 어울리는 '코이(戀)'라는 용어가 있었다. '코이'는 고전적인 프랑스어로는 'goȗt'(우리말로는 기호, 취미, 취향, 애착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 역자 주)로 번역될 수 있다. 나는 그에 대해 'goȗt'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의 '코이비토(戀人)', 다시 말해 나와 '코이'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이 내 취향에 맞았다.

현대 일본어로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커플들은 모두 자신의 짝을 '코이비토'라고 지칭한다. 뿌리 깊은 수치심이 사랑이라는 낱말을 추방해 버렸다. 정열의 광기에 빠지지 않는 한, 그들은 그 거창한 낱말을 문학, 혹은 그러한 종류의 것들에나 나오는 것으로 치부하고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중략)… '코이'는 그 가벼움, 유동성, 신선함, 그리고 심각함의 부재로 날 매료시켰다. ‘코이’는 우아하고, 유희적이고, 재미있고, 세련된 것이었다. '코이'의 매력 중 하나는 사랑을 패러디한다는 데에 있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장난으로 사랑의 몇몇 태도를 흉내냈다.

하지만 나는 린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사랑에 유머가 결여되어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아무래도 난 내가 그에 대해 '아이(愛…)'가 아니라-가끔은 쓸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만큼 아름다운 단어-'코이'를 느끼고 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가 그것을 슬퍼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최초로 테이프를 자른다는 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 내가 그의 첫사랑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내 첫 '코이'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여러 차례 불장난에 빠진 적은 있지만, 누군가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goȗt'를 느껴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두 단어 ‘코이(戀)’와 ‘아이(愛)’ 사이에는 강도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양립불가능성이 있다.(71~74)

 

아멜리 노통브의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언짢다. 그만큼 일본인은 더 잘 그려지고 있다. 가령 이렇다.

 

자동차 한 대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끼어들기를 한 것만으로는 모자라는지 운전수가 차에서 내리더니 린리에게 뭐라고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내 제자는 아주 차분하게 깊이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거친 남자가 씩씩거리며 차로 돌아갔다.

"저 사람이 잘못했잖아요!" 내가 외쳤다.

"그래요." 린리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사과했어요?"

"프랑스어로 뭐라고 하는지 몰라요."

"일본어로 말해 봐요."

"칸코쿠진."

한국인. 나는 이해했다. 나는 속으로 내 제자의 예절 바른 체념을 비웃었다.(23)

 

그 부분을 읽은 후에는, 일본, 일본인에 대한 아멜리 노통브의 관점이 객관적인 것이라 해도 그 거슬림이 되살아났다. 일본, 일본인에 대해서는 심지어 비판까지도 좋은 인식으로 기술된 것으로 보였다.

 

그 주 주말, 난 처음으로 도쿄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기차를 타고 도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 가마쿠라에 갔다. 어린 시절의 한적한 일본을 다시 발견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켜켜이 쌓인 기와로 무거워 보이는 지붕들과 한파에 얼어붙은 공기가 여태 날 기다렸다고, 내가 많이 보고 싶었다고, 세상의 질서가 나의 귀환으로 인해 바로잡혔다고, 내 치세가 만년은 갈 거라고 말했다.(31)

 

"하지만 네 나라에는 유명한 은둔자들도 많잖아."

"바로 그거야. 사람들은 고독을 즐기려면 승려가 되어야 한다고 여겨."

"일본인들은 외국에서는 잘도 모여 다니던데 왜 여기선 그러지 않아?"

"일본인들은 한편으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자신을 닮은 사람들과 지냄으로써 스스로를 안심시키길 원하지."(83)

 

"후지산!"

그것은 내 꿈이었다. 전통에 따르면 모든 일본인은 평생 적어도 한 번은 후지산에 올라가 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토록 명망 높은 국적을 가질 자격이 없다. 일본인이 되기를 열렬히 갈망했던 나에겐 그 등반이 일본 국적을 따기 위한 묘책으로 여겨졌다.(112)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자정부터 환한 행렬들이 산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마도 추위에 너무 오래 떠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밤 산행에 나서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놓치지 말아야 광경은 해돋이였다. 미리 산 정상에 올라가 있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눈물을 머금은 채, 나는 정상을 향해 꿈틀꿈틀 기어 올라오는, 황금빛으로 물든 그 느린 애벌레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 행렬들은 운동선수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을 터였다. 그런 민족을 어떻게 우러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121)

 

"본해는 남성적인 바다야."린리가 말했다.

그것은 내가 이미 일본사람들의 입을 통해 수없이 들어봤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아 한 번도 토를 달아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나의 유치한 상상력은 물결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턱수염을 찾고 있었다.(185)

 

하지만 나는 솔직히 흠모하는 나라를 그런 식으로 떠나야 하는 것에 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모든 것을 능가했다. 난 좋아 어쩔 줄 몰랐다. 비행기의 날개가 내 날개였다.

비행기 조종사는 일부러 후지산 상공을 지났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후지산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는 속으로 그에게 말했다.

'늙은 후지, 난 널 사랑해. 이렇게 떠남으로써 난 널 배반하는 게 아냐. 달아나는 게 사랑의 행위인 경우도 있어. 난 사랑하기 위해 자유로울 필요가 있어. 난 너에 대해 느낀 것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이렇게 떠나. 부디 변치 마.'(223~224)

 

 

소설의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멜리 노통브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소설!" 그럼에도 나는 서너 시간 책을 읽는다는 호사를 누린 것으로 만족하고, 이 소설을 서가에 오래 보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미 '첫사랑' 같은 건 기억의 골짜기를 헤매고 다녀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어서 그렇다고 해도 전혀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왜 읽었느냐 한다면, 어느 서평가가 "일본문화에 대한 흥미롭고 향기로운 분석이 죽여줍니다." "왜 '노통브 노통브' 하는지 단적인 해답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버텨도 자꾸만 손길이 가는 중독성 200%입니다. 급한 볼 일이 있는 분은 첫 장에 손대지 마십시오."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면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에게조차 어떤 때 "싫다"고 말해야 하는지 명쾌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별 다섯 개"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서점에서 많이 팔리는, 섬세한 묘사의, 일본 대중소설, 그런 소설 같은 벨기에 작가의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