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중이는 제 외손자입니다. 곧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갑니다. 둘째 딸이 낳았습니다. ‘선중(宣中)’이라는 이름은 제가 지었습니다. ‘가운데에 펼쳐라’, 다른 이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거기에는 제 희망과 기대, 욕심이 들어 있습니다.
제 핸드폰 앨범에는 그 애 사진이 대부분입니다. 조용할 때 들여다보면 사진 크기가 작아서 안타깝고 그 애가 더 그리워집니다.
그 애는 좀처럼 전화를 하지 않습니다. 며칠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막막한 느낌입니다. 내가 이런데도 그 애는 전화를 하지 않으니 참 무심한 아이입니다.
설에 다녀갔고, 그 얼마 전에 며칠 머물다 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전화를 기다리지는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아주 오래 된 것 같습니다. 전에는 우리와 함께 지내고 싶어 하면서도 제 부모와 헤어져 있는 걸 안타까워했습니다. 저 구석에 가서 제 엄마나 아빠에게 소곤소곤 전화하는 소리를 듣거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우습기도 하지만 가슴이 좀 아프기도 했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외조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여기는 천국이야.”
‘천국’, 그렇겠지요. 하고 싶은 걸 말리는 사람이 있나, 먹고 싶은 걸 말리나, 사고 싶은 걸 못 사게 하나, 하루에 30여 분씩 컴퓨터 게임도 즐길 수 있고, 무엇이든 생각나는 게임을 하자고 하면 그 애 외조모는 싫은 내색 하지 않고 그 지루한 시간을 함께해주니 천국이겠지요. 게다가 제 집에서는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이곳에 오면 거꾸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해주니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가령 현관에 들어서면 신발 벗을 생각도 않고 거실에 들어서면 옷 벗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 집에서는 제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저와 제 아내 그러니까 그 애의 외조부와 외조모가 스스로 해주는 일 중에는 밥을 먹여주는 일도 포함됩니다. 때로 그 애는 책을 들여다보며 과일 조각, 밥숟갈을 제 입에 넣어주기를 기다리는데, 우리도 그걸 즐기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도 물론 아이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 같은 걸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걸 알면서도 “저 같은 나이에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도 받아봐야 한다”고 합리화합니다.
그 애가 제 외갓집을 ‘천국’이라고 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집에서는 제 엄마가 정해준 규율에 따라 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도 저는 마음속으로는 제 딸이 그 애에게 조금만 더 잘 대해주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 생각을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실제로는 제 딸이 그리 ‘극성스런 엄마’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중에서 고르라면 아무래도 “얘야, 네가 선중이에게 너무 극성스럽게는 하지는 않는 거지?” 하고 확인해보고 싶은 쪽입니다.
그 애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한가지만 들어보면, 가령 그 애가 왔을 때 외식을 하자고 제안하며 "뭘 먹고 싶으냐?"고 물으면 "그냥 집에서 먹어요. 저는 할머니가 해주시는 식사가 훨 맛있어요." 합니다. 그러면 제 외조모가 감격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입에 바른 소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증거를 댑니다. 조개와 다시마, '닭똥집'(모래주머니)을 넣은 시원한 국을, 그 애는 참 좋아합니다. '으으으으---' 신음 같은 소리를 내거나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 국을 떠먹는 모습을 지켜본 그 애의 외조모는 두고두고 심심하면 그 얘기를 꺼냅니다.
그 애가 좋아하는 것은 책과 기기(機器) 같은 것들입니다. 책을 주면 어디서든 우선 죽 한번 훑어봅니다. 그 시간이 너무 짧아서 ‘저게 뭘 알고 책장을 넘기나?’ 싶어 물어보면, 줄거리를 다 꿰고 있어서 저를 놀라게 합니다. 하기야 그 애에게 놀라는 사람은 세상에 저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대충 읽고 나서 조금 있다가 틀림없이 차근차근 다시 읽습니다. 이런 스타일은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를 생각나게 합니다(그를 닮았다면 참 좋을 일이지요). 책을 볼 때 그 애는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 같은 것들의 기능에 대해서는, 제가 ‘기계치’이기는 하지만 저보다 훨씬 낫습니다. 자랑이 아닙니다. 새로 구입한 제 핸드폰에 담긴 기능을 그 애는 순식간에 다 알아냅니다. 이것도 저 혼자 신통해하는 일일 것입니다. 요즘은 다른 아이들도 다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이나 기기 같은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나중에 뭐가 되어도 될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라면 저는, 그 애가 뭐가 될 때까지 살아 있을 자신이 없습니다.
그 애는 한번 화가 나면 공연히 머리끝까지 치미는 화를 나타냅니다. 겨우 말을 배우며 우리 집에 와 있을 때였습니다. 평균 신장보다 키는 크지만 너무 호리호리한 주제에 밥을 잘 받아먹지 않으려고 해서 화를 냈더니 당장 제 외조모를 보고 소리쳤습니다. “할아버지 죽여!” 세상에……. 어디 간다고 말도 하지 않고 약국에 가서 밥을 잘 먹게 된다는 영양제를 사왔더니 달려와 안겼습니다. 죽이라고 하더니 제가 보이지 않자 당장 “할아버지 어디 갔느냐?”고 야단이 나더랍니다.
그 일 이야기를 하니까 딱 한 가지 걱정이 떠오릅니다. 그 애는 좀 들뜰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 애 엄마는 ‘오버 액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몇 년 전 종로의 ‘인서각’이란 도장방에 부탁해서 기다란 나무판에 이런 글을 새겨서 그 애의 방에 걸어두게 했습니다.「한 번 더 살펴보고 한 번 더 생각하고」. 장차 그것만은 지켜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들 자신의 그 단점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하게 되며, 얼마나 참회하며 살게 됩니까. 그 애도 그럴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안타깝습니다. 이건 좀 비밀스런 이야기입니다. 그 애의 부모는 그 애가 자신들을 1/2씩 닮았다고 생각할 것이 당연하고, 그 논리에 따라 외조모, 외조부인 우리는 1/4씩 닮았다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사실은 그 애의 모든 것이 저를 닮은 것 같아서 그런 단점을 보면 참 미안해집니다.
이것도 좀 비밀스런 이야긴데, 그 애는 제 친조부보다 저를 더 좋아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책이나 선물을 사주기 때문이라고 하더니 이번에 왔을 때는 제 외조모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할아버지는 멋있잖아요.” 제가 어디가 멋있겠습니까. 제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저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외손자 딱 하나뿐이라니까.”
이번 설날 아침에는 인천에서 용산으로 가는 중에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왜 남양주 할아버지 댁에 가서 차례를 지내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런 말도 하더랍니다. “남양주 할아버지가 죽으면 난 많이 울 거야.” 또 제게는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는 왜 머리가 많이 세었어요?” “나는 이제 64세이고 죽을 때가 가까워오는 거지.” 하면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요즘은 100세까지 사는 사람도 많아요.” 100세, 그 애를 쳐다보고 있으면 100세까지 살 이유가 있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으니 그게 한심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헤어질 때는 차창 밖으로 “행복하세요오!” 하고 소리치기도 하지만, 가까이에서 “할아버지, 건강하셔야 해요?” 하고 다짐받듯 할 때는 목이 메기도 합니다. ‘그래, 그래야 하겠지만 나는 이곳저곳 자주 아프단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쑥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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