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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4․19혁명과 편수용어(編修用語)

by 답설재 2009. 2. 5.

 

 

 

4․19혁명과 편수용어(編修用語)

 

 

 

  지난해 12월, 건국 60주년을 맞아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학습지도 참고용으로 제작한 현대사 영상물에 ‘4․19혁명’이 ‘데모’로 표기되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인터넷에 탑재된 기사에 따르면, 교과부는 80여 개 영상물이 담긴 『기적의 역사』라는 영상물을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배포하고, 교과나 재량활동 등의 지도에 적극 활용해달라고 주문했다. 『기적의 역사』는 1950~2000년대의 우리 역사를 담은 현대사 영상물로, 1960년대를 다루는 부분에 ‘대한뉴스’를 편집한 2분짜리 영상물이 포함되어 있는데, 음성 설명(내레이션) 없이 ‘시민들과 학생들의 데모’ ‘경찰과 시위대 대치’ ‘불타는 건물과 짚차’ 등의 자막을 달고 있으며, 4․19혁명의 배경이나 의미보다는 시위장면을 집중해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여론은 ‘4․19혁명’을 ‘데모’로 표기한 것만 비난한 것이 아니었다. 더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영상물에서 50~70년대 부분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정선거나 독재 등에 대해선 아무 언급 없이 경제발전 등 치적만을 부각했다. 80년대에선 80년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이 아예 빠졌다. 또 2000년대 영상물에선 남북한 정상이 55년 만에 만난 ‘6․15남북정상회담’은 빠지고,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의 치적을 언급한 ‘청계천의 어제와 오늘’이 들어 있다.」

 

  야당들의 비난도 대단했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통탄스러운 역사인식” “도대체 대한민국의 교과부가 교육현장을 이념갈등으로 몰아넣고 인물우상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즉각 수거, 폐기하고 교과서 수정을 빙자한 역사왜곡을 중단해야 한다.” “이 정부는 ‘세미코마’인 혼수상태” “헌법을 내팽개친 것도 모자라 아직도 이 땅에 ‘용비어천가’가 판을 치고 있단 말인가” 등.

 

  그 영상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세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이와 같은 비난이 쏟아지자 교과부는 “‘4․19데모’라는 동영상은 1962년 4월 21일 대한뉴스(제361호) 제목이 그대로 인용된 것”으로 “4․19혁명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밝히면서, 해당 영상물의 제목 ‘4․19데모’를 ‘4․19혁명’으로 고치고, 내용 설명 부분에서도 ‘데모진들 가두시위’란 표현은 삭제하고 ‘시민들과 학생들의 데모’란 표현도 ‘시민들과 학생들의 시위’로 수정했다는 발표를 했다.

 

  최근 담당관에게 직접 문의해본 바로는 교과부에서는 이 영상물을 모두 회수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제 그만인가 싶기도 하고,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답답하기도 하여 『편수업무편람』(편수업무담당자연수자료 : 1995.12)이란 자료에서 ‘근․현대사 관련 주요 역사용어의 이해’라는 부분을 찾아보았다(176~180쪽).

  이 용어 정리는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 연구’의 결과를 반영한 것으로, 1993년 9월에 9명의 역사학자들에게 연구를 위촉하여 1994년 11월까지 연구위원회 주최 학술토론회 개최, 국사편찬위원회 의견서 접수, 연구위원회 보고서 접수, 교육부 준거안 작성, 심의위원회 심의, 국사교과서편찬심의위원회 심의, 국사편찬위원회 심의, 준거안 확정 등의 절차를 거쳐 결정된 것이었다. 이 연구는 또 ‘근․현대사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역사용어의 정리’ ‘역사학계의 새로운 연구성과를 교과서 내용에 반영’ ‘제6차 교육과정의 중․고등학교 교육과정 국사과 내용요소에 따른 서술방향 제시’를 위해 이루어진 것으로, 준거안 작성의 기본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 그동안 축적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충분히 검토하여 정상으로 인정된 사항만을 교과서 내용에 반영한다.

  ◦ 우리 민족사의 주체적인 발전과정을 중시하며, 문화역량이 풍부하였음을 부각시켜 민족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한다.

  ◦ 세계사적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 특정 이데올로기나 역사관에 편향되지 않고 역사교육적 관점에서 역사용어를 정리하고 서술방향을 제시한다.

 

  ○ 4․19혁명

  현행 교과서에 4․19의거로 되어 있는 것을 혁명으로 보는 것은 혁명의 개념으로 볼 때 논리적 비약이라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8․15광복 이후 우리나라 역사의 발전과정을 정치적 측면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으로 볼 때 4․19혁명은 비록 ‘미완성의 혁명’이지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 역사의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혁명으로 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한편, 1994년 12월말 ‘국가유공자등예우에관한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교과서 용어는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정신에 따른다는 원칙에서 4․19혁명으로 확정하였다.

 

  이처럼 명료한 용어의 정의를 두고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왜 논란을 일으켰을까. 다음과 같은 경우들을 가정해보았다.

  ◦ ‘이 용어의 정리는 1993~1994년에 이루어졌으므로 현재의 편수업무 담당자들은 잘 모를 수도 있다.’(그렇기야 하겠나.)

  ◦ ‘지금은 편수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아주 적어서 어떤 단체 같은 곳에 개발을 위탁하여 마련한 그 자료를 일일이 살펴보지 못했을 것이다.’(그럴 경우 외부 인력을 동원해서라도 그 내용을 검토․점검하는 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 교과부에서는 ‘4․19를「데모」라고 표현한 부분이 당시의 원 자료를 인용한 것이라 해도 적절하지 않다는 검토를 했으나『기적의 역사』라는 영상자료를 개발한 측에서 수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그 자료를 그대로 배포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위 세 가지 가정 중에서 고르라면 아마 세 번째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포 경위는 가정과 다를 수도 있다. 무슨 ‘역학관계’ 같은 것이 있었을까? 에이, 모르겠다. 위 세 가지 가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당시에 이루어진 그 용어의 정의에서 다른 사례들도 덧붙인다. 그동안 새로운 해석에 의해 용어가 변한 것도 있을 수 있다. 특히 ‘12․12사태’를 예로 들어 “지금까지 사회과학적 관심에서의 논설과 정치학적 관점에서의 논문은 있으나, 역사학자에 의한 논고는 거의 없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유동적인 현대사(Current History) 관련 사건은 타당한 자료에 의한 연구결과에 따라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이었다.”는 해설 등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부분들이 다시금 눈에 띄기 때문이다.

 

 

  ○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

  조선왕조는 이미 중국,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어 무역을 해왔었고,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이 강경하게 선회한 것은 상대국의 접근방법이 조선의 관행에 어긋나고 위압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쇄국정책’이라는 용어에는 우리나라를 전근대적인 폐쇄사회로 규정하고 당시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문호개방을 합리화시키려는 식민사관이 숨어 있기 때문에 ‘통상 수교 거부’라는 용어로 바꾸기로 했다.

 

  ○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전쟁’으로 할 경우 전쟁의 당사자가 불분명하고 ‘혁명’으로 표기할 경우 혁명의 개념을 둘러싸고 문제가 제기될 뿐만 아니라 1940년 천도계의 역사 서술가 오지영의 ‘동학사’에 대한 사료로서의 비판도 크게 제기되었다. 더욱이 전봉준은 혁명가라기보다는 당시 집권세력인 민비(명성황후) 척족세력을 타도하고 대원군 중심의 보수정권을 재건하려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봉기’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아 현행대로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하기로 하였다.

 

  ○ 창씨개명

  우리 국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자행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식 성명 강요’로 변경하기로 하였다.

 

  ○ 8․15광복

  ‘광복’이라는 용어는 우리 민족이 적극적인 독립투쟁에 의하여 주권을 회복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해방’은 외세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소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현행대로 ‘광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광복’은 정치적 성격의 용어이고 ‘해방’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인권문제까지도 포괄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행 법규상으로도 ‘광복절’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현행 체제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 대구 10․1폭동사건과 제주도 4․3사건

  이들 사건은 당시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항쟁’으로 표기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피해자의 입장과 역사적 평가와는 다르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대구폭동사건은 미군정 시기인 1946년 10월 1일 좌익세력의 사주에 의하여 야기된 대규모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소요사건으로서 그 뒤 남한의 거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던 공산집단의 남한 교란작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 전체를 적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일으켰던 사회 교란작전이었기 때문에 ‘폭동’이라는 용어는 종전대로 사용하면서 ‘제주도 4․3사건’과 같이 발생 일자를 명시하여 ‘대구 10․1폭동사건’으로 표기하기로 하였다.

 

  ○ 여수․순천 10․19사건

  ‘여수․순천 반란 사건’으로 표기할 경우 이 지역 주민 전체를 반란자로 고착시키는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발생 일자를 명시하여 ‘여수․순천 10․19사건’으로 표기하면서 반란의 주체는 내용 서술에 밝히기로 하였다. 즉, 당시 여수․순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내부의 일부 좌익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지역에 잠입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합세하였다는 것을 명시하고자 한다.

 

  ○ 6․25전쟁

  영문표기를 감안하여 ‘한국전쟁(Korea War)’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외국인은 그렇게 부를 수 있으나 한국인 자신이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많아 현행대로 ‘6․25전쟁’으로 표기하기로 하였다.

  또한 학계의 일각에서는 동족간의 싸움을 ‘전쟁’으로 부를 수 있느냐 하는 반론도 있었으나, 서양사의 경우에도 왕실간의 싸움을 ‘전쟁’으로 한 사례가 있고 특히 6․25전쟁은 냉전체제에서 국제적 성격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현행대로 표기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보았다.

 

  ○ 5․16군사정변

  5․16은 ‘쿠테타’로 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전문적 학술서가 아닌 교과서에 외래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수용하였다. ‘정변’이라는 용어는 쿠테타, 혁명 또는 불법적인 방법에 의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5․16군사정변’으로 표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5․16 이후 30년간의 역사는 전근대적인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강조하여 ‘5․16군사혁명’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 10․26사태 이후의 역사 용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사태 이후, ‘12․12사태’는 특정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실 위주 내용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하였고, ‘5․18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도 현행대로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하였다.

  특히 ‘12․12사태’는 지금까지 사회과학적 관심에서의 논설과 정치학적 관점에서의 논문은 있으나, 역사학자에 의한 논고는 거의 없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유동적인 현대사(Current History) 관련 사건은 타당한 자료에 의한 연구결과에 따라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이었다.

  따라서 아직 학문적 연구가 미약하고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유동적인 현대사 관련 사건을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칠 경우 교육적 입장에서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12․12사태’는 역사학계의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교과서에서는 특정 용어 사용을 보류하면서 실제 상황을 문장으로 풀어 서술하도록 하였다.

 

  ○ 만주

  청나라 시대나 중국 국민당 정부 시대에도 ‘만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역사용어는 당시에 사용하던 용어 표기에 따른다는 원칙에 의해 ‘만주’로 사용하되, 중국과의 수교관계를 고려하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만주 표기는 ‘중국 동북 지방’으로 표기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