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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빛나는 편집인

by 답설재 2009. 4. 23.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멋진 글 한 편을 소개합니다. 이미 한국교과서연구재단『교과서연구』제56호(2009년 4월)에「교과서 편집자의 변」으로 게재된 글입니다. 이 글을 제 블로그에도 탑재하고 싶어서 미래엔컬쳐그룹(옛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윤광원 상무에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해서 필자의 승낙을 받았습니다. 이 글의 필자가 미래엔컬쳐그룹 검정교과서팀의 국어과 과장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저보고 “열심히 일해 본 것이 언제였나?” 묻는다면, 1990년대에 지역교과서를 포함한 사회과 교과서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던 일, 2000년대 전반부에 제7차 교육과정의 적용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것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글은, 저에게 분투 노력하던 그 1990년대가 떠오르게 했습니다. 이제는 국정교과서가 거의 없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편수관이 교과서 편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국정교과서가 많았습니다. 그 교과서들을 만든다고, 팽개쳐서는 안 되는 일들을 팽개쳐서 지금도 저는 그 ‘상처’가 깊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는 것도 몰랐고,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칼이 하얗게 변하고 있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때는 눈에 뵈는 게 오직 교과서뿐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제 4, 50대는 흔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여 지금 제가 60대의 중반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 아픈 ‘상처’가 후회롭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글의 필자 황은주 과장처럼 그때 그 시절, 편수관들이 하던 일을 이어받아 그 청춘을 불사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제 상처를 영광스런 상처라고 증언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필자 황은주 과장은, 그러므로 제 아픈 상처를 덧나게 하는 분이지만, 그럼에도 저는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싶기도 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우리나라의 교과서가 ‘인정교과서’ 중심으로 가게 되는 날, 훌륭한 선생님들은 1990년대의 저처럼, 오늘 이 황은주 과장처럼 직접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선생님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육은 그만큼 힘이 있는 교육으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긴 시간 속에서 얻어 낸 값진 열매

 

 

미래엔컬처그룹 검정교과서팀 국어과 과장 황은주

 

 

 

‘교과서 개발’이라는 과제를 안고 새해를 맞이하다

 

2008년 새해가 밝으면서 올해 이뤄가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가장 먼저 꼽은 것이 ‘최고의 국어 교과서 개발’이었다. 이는 내가 지니고 있는 여러 타이틀 중에서 올해만큼은 ‘미래엔 검정교과서팀 국어과 과장’이란 직함이 가장 힘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7차 개정 교육과정(2007년 개정 교육과정; 옮긴이 주)에서는 지금까지 국정교과서로 개발되었던 <국어>, <도덕>, <국사> 과목을 검정교과서로 개발하게 되었다. 검정화란 아주 쉽게 말하자면, 이제껏 모두가 똑같은 교과서로 공부했던 것이 학교마다 다른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교육과정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교과서의 모습이 각양각색으로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국어> 교과서는 출판 시장의 뜨거운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국어 교과서가 학교 현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또한 출판사의 학습 참고서 시장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등의 문제들에서 해결의 열쇠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과서를 합격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과서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편집자들에게 있어 ‘교과서 개발과 합격’은 그 해 최대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이 목표를 위해 1년이라는 긴 시간을 어떻게 달려야 할까를 고민하며 새해를 맞이했던 것 같다.

 

 

첫 단추를 꿰기 시작하다

 

마음을 굳게 다잡고 본격적으로 교과서 개발에 착수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새로운 개정 교육과정이 과연 7차 교육과정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름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7차 교육과정에 따라 개발된 국어 교과서는 <국어>와 <생활 국어> 두 권 체재였고, <국어>는 문학과 읽기 영역을 위주로, <생활 국어>는 말하기∙듣기∙쓰기∙문법 영역을 위주로 학습할 수 있도록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국어>와 <생활 국어> 모두 여섯 영역을 다루어야 하고, 각 단원별로 서로 연계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에서 새로 개발될 국어 교과서는 기존의 <국어>, <생활 국어>와는 기본 성격 자체를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국어>와 <생활 국어>는 각각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까? 교육과정에는 듣기 넷, 말하기 넷, 읽기 다섯, 쓰기 다섯, 문법 다섯, 문학 넷으로 각 영역별 성취기준이 제시되어 있었다. 이 성취 기준을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 단원별 성격이나 영역 통합의 모습이 달라질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첫 틀을 짜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 영역 통합이 자연스럽게 될 수 있는 성취 기준들을 찾기 위해 수없이 많은 가상 시뮬레이션을 실행해 보았다. 수십 번의 수정과 재배합의 과정을 통해 연관을 지닌 성취 기준들을 적절하게 묶어서 13개의 단원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하여 각 단원별로 성취 기준을 조합한 후에는 이들에게 어떤 성격을 부여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주된 성취 기준을 무엇으로 하여 영역을 통합하느냐에 따라 단원의 성격이 변하기 때문이었다. 16명이나 되는 집필진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각 단원들에 숨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였다.

 

이 작업과 동시에 진행했던 것이 이들이 살 집을 짓는 일이었다. 각 단원들을 어떤 집에 살게 할 것인가를 놓고 ‘교과서연구재단’을 들락거리며 외국의 교과서 체재를 분석하고, 아예 서점에 앉아 관련 서적들을 훑어보고, 팀원들과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커다란 집을 지은 후에는 각 방들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를 놓고 아이디어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초 작업들을 하면서 새로 개발되는 교과서에 대해 기대를 갖게 되었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신바람이 나기도 했었다.

 

 

원고를 검정기준의 틀에 맞추다

 

발주된 원고의 메일이 들어올 때마다 설렌 마음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던 것 같다. 여러 차례에 거친 단원 집필 계획서를 통해 그 단원의 성격을 규정하고 원고를 집필하였음에도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편집진에서는 각 단원의 원고를 보면서 ‘검정기준’과 ‘교육과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각 단원에 조합된 성취기준에 대한 해설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가면서 놓친 부분은 없는지, 요구하는 사항들을 제대로 반영시켰는지, 내용 요소의 예를 활동으로 잘 구현하였는지 등을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그 단원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 항목들을 나열해 놓고, 하나하나 체크해 가면서 단원의 완성도를 높여 나가기 시작했다.

 

제재 선택의 폭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커다란 고민거리였다. 국어 교과서를 통해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찾기 위해 여러 자료를 뒤적였으나, ‘중1’ 학생들의 수준을 고려한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 설령 작품을 찾았다 하더라도 작가 측면, 내용 측면, 성취기준 측면, 다양성 측면 등에서 확인을 하고 나면 끝까지 살아서 가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성취기준에 맞춰서 시를 쓰고 등단하는 것이 빠르겠다.’는 우스갯소리가 집필진 사이에서 오가기도 했는데, 다 이러한 제재 선정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이 성취기준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이 선정될 것이라는 범주가 보이는 것도 있었으나, 대체 어떤 작품을 염두에 둔 성취기준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것도 많았다. 합격 발표 이후 다른 출판사의 책들을 보게 되면 그 시기에 이러한 고민을 같이 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우리 책에 수록된 작품과 유사한 작품을 보게 되었을 때에는 공감의 끄덕임과 함께 미소를 띠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원고를 검정기준이라는 틀에 맞추면서 교육과정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에 대한 해석의 기준이 모호하여 생기는 의문들을 해당 기관 홈페이지를 통해 질문하였으나 답변이 올라오기까지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답변 또한 명쾌하지 못하고 두루뭉수리하게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어서 고민의 깊이가 더해갔었다. 검정시스템이 좀더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개발자와 이를 주관하는 부서와의 소통이 무엇보다 원활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촉박함과 초조함을 묵묵하게 이겨내다

 

7차 교육과정에 따른 검정교과서 작업에서 처음으로 교과서 세계에 입문을 했던 당시 한 선배가 ‘교과서는 수정한 횟수만큼 퀄리티에서 차이가 난다.’라고 한 말을 떠올렸다. 이번 수정이 마지막이겠지 하고 작업을 했다가 또다시 수정하기 위해 제재를 바꾸고 그에 따른 활동을 바꾸고 하는 작업들을 하면서 이 모든 과정이 더 나은 교과서 개발을 위한 것이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교과서 개발에 처음 참여하는 선생님들이나 후배들을 설득해 가면서 최선의 제재, 최적의 활동을 구현해 나갔다.

 

더위와 함께 초조함이 극에 달할 무렵, 이렇게 만들어진 교과서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수업시수를 고려하고, 난이도를 조정하고, 단계를 구체화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검토를 의뢰했던 현장 선생님들은 국어 교과서가 처음으로 검정화된다는 사실에 다양함을 기대하면서도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7차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의 학습량이 많아서 교과서를 제대로 수업하지 못했다는 의견이 있었기에 학습량을 줄여야 하는 것은 최대의 과제였다. 이와 동시에 던져 놓기 식의 활동이 아니라 실제 수업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단계화된 활동으로 다듬어나가야 했다.

 

새로운 국어 교과서 개발에 기대를 가지고 있는 현장 선생님들이 열의를 가지고 검토를 하였다. 몇몇 지적들은 개정된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가 미흡한 데에서 비롯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현장의 경험들에서 우러나온 값진 것들이었다. 이러한 지적들을 집필진과 다듬어 나가는 데 또 한 계절을 보냈나 보다.

 

1, 2학기 각각 <국어>와 <생활 국어>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출원 몇 달을 앞두고 몇몇 팀은 포기했다더라, 또 몇몇 팀은 소통의 문제로 와해됐다더라 하는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네 권을 개발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교과서 개발 경험이 없는 출판사나 인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출판사에서 아예 포기하는 사태가 생긴 것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초조함이 심해지던 때에 이런 소식은 그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와해 소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점검 작업을 하면서 집필진과 편집진 모두 신경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물론 모두가 최상의 교과서 개발을 위한 것이지만 서로의 관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일관되지 않은 교과서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와해되었다는 소식은 씁쓸한 웃음을 짓고 넘기기에는 무언가 무거운 짐으로 남겨졌다.

 

 

긴긴 터널을 통과하다

 

주말이라는 개념 없이, 퇴근 시간의 감각 없이 생활하기를 몇 달이나 하였던가. 택시기사 아저씨가 다른 곳은 불황인데 출판사는 무슨 일이 이렇게 많냐며 의아하게 물어보신 적이 있다. 콜이 들어오는 곳이 요새는 출판사뿐이라면서. 우리뿐 아니라 교과서 개발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12월 초, 드디어 그간의 고민과 노력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교과서를 가슴에 품어볼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1년이 넘는 시간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휘릭휘릭 편집되어 감을 느꼈다. 그 속에 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오랜 힘든 시간을 기꺼이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사명감에서였다. 새로운 교과서를 개발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자부심, 이 나라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명감.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힘들수록 더 열의를 모으고 서로를 격려하며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긴긴 터널을 통과한 우리는 간이역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멀리 보이는 빛을 쫓아 달려 온 쓴 인내의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게 뜻있는 결과가 맺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8학년과 10학년 교과서 개발을 위해 몸도 마음도, 팀의 분위기도 재정비하고 달릴 준비를 끝냈다. 이제 새 봄과 함께 한 마음으로 뭉쳐 또 긴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년 중학생들이 우리가 개발한 국어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을 하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또 쉼없이 달릴 것이다.

 

 

올해는 출원 시기가 11월이다. 작년에 비해 한 달이나 앞당겨졌는데, 발표는 한 달이나 늦춰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검정교과서를 준비하는 시기가 과연 몇 달이나 될까. 고통스러운 시간이 짧아진다고 좋아해야 하는가. 아니다. 편집자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자신이 개발한 책이 미흡할 때 밀려드는 후회를. 이건 다름 아닌 교과서인데 개발하는 기간이 6-7개월 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교과서가 개발된 후에 질적인 문제를 논하기보다는 제대로 개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불과 며칠 전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집필 기준을 받아볼 수 있었다. 교육과정 해설서는 아직까지 정식으로 발표되지 않은 상황이다. 중학교 2학년은 1학년 것을 바탕으로 하여 개발한다 해도 고등학교는 기초부터 다시 접근해야 하는데 시간상으로 너무 촉박하다. 숙성될 것은 충분히 숙성할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생각을 벌려 놓기만 하고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지금부터 마음이 다급하다.

 

다음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 개발에서는 이러한 소통과 시간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