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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한국의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 개관

by 답설재 2008. 12. 11.

한국교과서연구재단『교과서연구』제55호(2008.12)에 실은 글입니다. 부드러운 문체로 쓰려고 노력했으므로 그렇게 딱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독하시면서 우리나라 지역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敎授要目에 들어 놓은 諸 單位는 標本的 學級을 標準삼아 普通的인 것으로 짜아 놓은 것이다. 따라서 各 地方에서는 特히 그 地方 兒童들에게 必要한 것과 그 고장의 特殊性을 考慮하여 더 適當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適當히 單位를 削除 補充하여도 좋다. 要컨대, 이 敎授要目의 精神을 把握하여 各 地方에 꼭 맞는 敎授를 하도록 힘쓰기 바란다.”

- 美 軍政廳 編修局, 1946.9.1,「國民學校 社會生活科 敎授要目」중 社會生活科 敎授要目의 運用法 5. 各 地方의 特殊性을 考慮할 것(全文)

 

 

Ⅰ. 왜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을 검토해야 하는가?

 

 

우리나라 교육과정의 역사에서 1992년에 개정 고시된 제6차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은 몇 가지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교육과정이다. 그것은 교육부 자체로- 교육부의 힘만으로- 교육과정 개정을 계획하고 실행한 교육과정 개정이었으므로 교육과정 행정가들이 우리 교육의 실태와 발전방향에 대한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그들이 의도한 변화와 발전을 구체적으로 반영할 수 있었던 교육과정이었다는 점이다.

 

또, 종전의 교육과정 개정이 대체로 교육내용의 변화와 발전을 의도한 교육과정이었다면 제6차 교육과정은 교육과정의 구성(편성)과 운영 시스템까지 크게 변화시킨 교육과정이기도 하다. 즉, 제6차 교육과정은 우리나라 교육과정 사상 처음으로 시․도교육청과 각 학교에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에 관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시․도교육청에서도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에 관한 지침을 제시하게 되었고, 학교에서도 처음으로 학교교육과정의 의미를 수용하고 그것을 편성해보는 경험을 갖게 된 것이다.

 

교육부에서 이러한 변화를 추구한 의도는, 우리 교육이 전국적으로 교과서 중심의 단편적 지식주입식 수업에 매몰된 획일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므로1) 교육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교육을 지양할 수 있는 길은 학교교육이 교육과정 운영자료일 뿐인 교과서에 집착하여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개별 학교에서 그 특성을 반영하여 편성하는 ‘학교교육과정(school program)'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견해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따라서 각 지역의 교육청은 그 지역의 실정과 특성에 따라 각 학교의 교육과정 활동을 지원하는 교육행정기관으로서의 당연하고 핵심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교육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각 교육청에는 처음으로 ‘교육과정’ 업무를 담당하는 전문직이 생겨 연수와 회의를 거듭하면서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게 되었고, 각 학교에서는 종전의 ‘학교경영계획(혹은 학교교육계획)’ 즉, 교육시책 구현 및 관리 중심의 문서와는 별도로, 혹은 그 문서 대신 ‘학교교육과정’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연간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교육과정의 시스템에 관한 이러한 변화는 1997년 말에 개정 고시된 제7차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제7차 교육과정은 1995년 5월 31일,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에서 정보화, 세계화 시대에 대비하여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방안의 하나로 제시하여 탄생한 교육과정이었다. 교육개혁위원회에서는 우리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① 교육공급자 중심에서 학습자 중심 교육으로, ② 획일적인 교육에서 다양하고 특성화된 교육으로, ③ 규제와 통제 중심 교육에서 자율과 책무성에 바탕을 둔 교육으로, ④ 획일적 균일주의 교육에서 자유와 평등이 조화된 교육으로, ⑤ 질 낮은 교육에서 평가를 통한 질 높은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시했던 만큼 국가교육과정에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의 설정, 고등학교 선택중심 교육과정의 운영, 수준별 교육과정 운영 등이 그러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도교육청에서 교육과정 편성․운영지침을 정하여 관리하고, 각 학교에서 개별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는 체제는 제7차 교육과정 개정에서도 변화가 없었으며, 다만 지역교육청에서도 학교교육과정을 지원하는 실천적인 업무를 추진하도록 한 점은 뚜렷한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제7차 교육과정에서 시․도교육청과 지역교육청 및 각 학교에서 할 일에 대한 별다른 조치가 없었던 것은, 그러한 정책의 방향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더욱 발전적인 조치를 포함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평가는 제7차 교육과정기의 각 시․도교육청 교육과정 지침의 수준이 제6차 교육과정기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점, 안타깝게도 각 학교별 교육과정이 교과, 재량활동, 특별활동 및 교육과정 지원활동 등 교육과정 중심에서 벗어나 다시 학교 경영․관리 혹은 교육시책 중심으로 회귀하는 듯한 경향을 보이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새로 말하면, 우리나라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은 제6차 교육과정기를 기점으로 현장에 도입되었으나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의 적용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도 그 당시의 수준을 되풀이하는 정체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교과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제6차 교육과정기의 초등학교 4학년 1학기『사회과탐구』교과서와 교사용지도서를 시․도별 편수인력을 양성․확보하면서 국정교과서로 편찬하고2), 이어서 제7차 교육과정기에는 그 인력을 기반으로 시․도별 지역교과서를 인정교과서로 편찬하게 한 이후 그 이상의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3). 시․도별로는 한자, 환경, 논술 등 재량활동 영역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인정도서를 승인해주고 있으나, 인정도서는 날로 늘어나는 그 종류에 비해 활용범위가 극히 제한적이어서 이 또한 별다른 발전적 계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Ⅱ.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이 실재하고 있는가?

 

 

우리나라 교육현장은 제6차, 제7차 교육과정기를 거치면서 교육과정 행정은 정교하게 발달하고 있으나 교실현장의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제6차 교육과정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논리는 우리의 전통적인 ‘교과서 중심 학교교육’을 ‘교육과정 중심 교육체제’로 전환함으로써 의도한 교육과 실현된 교육을 최대한 접근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즉, 교과서 중심 학교교육에서는 교육부가 국가교육과정을 정하고 교과서를 편찬․공급하면, 교사들은 그 교과서에 따라 마련하는 진도표와 시간표, 문제지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므로 시․도교육청과 학교는 교육과정에 관한 한 별도의 할 일이 없었다. 이에 비해 제6차 교육과정에서는 교육부에서 국가교육과정을 정하고 교과서를 편찬․공급하는 일을 담당한 것은 종전과 같으나, 시․도교육청 및 지역교육청에서도 국가교육과정을 실천하기 위한 편성․운영지침을 정하고 실천 중심의 장학자료, 교육자료 등을 제공하며, 학교는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교육과정과 교육청의 지침, 장학자료에 따라 학교교육과정을 편성하여 그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6차 교육과정 이래의 이에 관한 노력들이 교실현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평가해보면 ‘교육과정 행정이 과연 수업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즉, 교과서 중심 학교교육이 학교교육과정 중심 교육체제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러한 견해를 설명할 수 있는 수업 사례로, 가장 탐구적․활동적이어야 할 과학과의 교육과학기술부 교사용지도서의 내용이다4).

 

 

☞ 산소를 발생시켜 성질 알아보기 (6-1-6 여러 가지 기체 2~3/9)

 

① 산소 발생시키기

 

○ 모둠별로 산소 발생 장치를 꾸밀 여러 가지 기구와 약품을 나누어준다. ○ ‘실험관찰’ 45쪽을 보면서 교사가 실험기구를 하나씩 보여주며 이름을 가르쳐준다. ※ 유리 기구 및 약품을 취급하게 되므로 사전에 충분한 안전지도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학생들에게 보안경을 착용하게 한다. ○ 교사는 ‘실험관찰’ 45쪽에 나온 순서에 따라 장치 꾸미는 방법을 설명해준다.  <산소 발생 장치 꾸미는 순서 : ‘실험관찰’ 45쪽> ● 가지달린 삼각플라스크에 이산화망간을 1g 정도 넣고 물을 조금 부어 적신다. ● 고무마개에 유리관을 끼운 다음 가지달린 삼각 플라스크에 끼운다. ● 이 유리관과 깔때기를 핀치클램프를 끼운 고무관으로 연결한다.

 (이하 생략)

 

 

과학교육에 관심이 깊은, 혹은 그동안의 교사용지도서 체제에 익숙해진 교사들은 이 사례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첫 부분부터 하나하나 분석해보면, ‘~을 나누어준다.’ ‘~를 하나씩 보여주며 이름을 가르쳐준다.’ ‘~을 설명해준다.’ ‘가지달린 삼각플라스크에 이산화망간을 1g 정도 넣고 물을 조금 부어 적신다.’로 이어지는 이 수업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게 되는지 의심스럽다5).

 

이 지도안의 흐름을 따라가며 학생들이 경험할 것을 예상해보면,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추석날 TV 특집방송 프로그램에서 일본의 마술사 앞에 둘러앉은 남녀 탤런트들이 그 마술사의 주문에 따라 무작위로 하나의 카드를 선택한 다음, 감쪽같은 그 마술의 신기함에 놀란 표정을 지어주는 모습이 떠오른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학생들은 이 수업의 과정에서 과연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며, ‘그래, 산소가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 외에 어떤 것을 학습하게 될까. 이러한 수업에 ‘실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음에도 단편적 지식주입식 수업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수업으로 우리나라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과학교육의 목표들, 즉 ‘자연 탐구를 통하여 과학의 기본개념을 이해하고, 실생활에 이를 적용한다’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능력을 기르고, 실생활에 이를 활용한다’ ‘자연현상과 과학학습에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실생활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기른다’ ‘과학이 기술의 발달과 사회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바르게 인식한다’는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의문은 교육과정의 역할에까지 이어진다. 우리의 교과별 수업이 이렇게 전개된다면, 즉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편찬, 공급하는 가장 권위 있는 교육과정 운영자료로서, 수업의 기본이 되는 교과용도서가 전국적으로 각 교과에서 획일적인 교육을 유도하고 있다면, 국가교육과정은 물론 각 시․도교육청의 교육과정 편성․운영 지침, 심지어 각 학교별로 작성하는 학교교육과정은 어떤 구실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뜻이다. 또한 어차피 이렇게 전개되어야 하는 수업이라면 구태여 그러한 지침이나 학교교육과정을 만들고 그 문서에 따르는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그러한 노력들이 학습지도와 무관한 도로(徒勞)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Ⅲ. 왜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의 발전이 정체되고 있는가?

 

 

이처럼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의 발전이 정체되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찾을 수 있다. 필자는 그 이유를 정부 정책의 부재, 각 지역의 교육행정, 교육과정 전문가들의 무관심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1. 교육부의 정책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의 발전이 정체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PISA에서 우리 학생들의 성적이 최상위권이라는 데 만족하고 있으며, 만약 학생들이 공부하는 총 시간수에 대비하면 우리나라 학생들의 성적은 하위권일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수없이 되풀이된 비판, 즉 전국적으로 획일적인, 교과서 내용 암기위주의, 입시위주의 교육에 대한 비판이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이 개선되려면 다른 어떤 사업보다 교육과정 정책과 행정을 중시하여 수업을 개선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방치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제7차 교육과정에 제시되었던 시․도교육청과 지역교육청의 할 일을 이른바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도 거의 그대로 제시해놓고 있으나6), 그러한 사항들만으로는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을 발전시키거나 수업을 개선하는 데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므로 다시 새로운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데 착안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육과정평가를 하려면 학생평가, 학교평가, 교육행정기관평가도 해야 하지만, 국가교육과정 자체에 대한 평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기본관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가령 남양주시 오남읍의 초등학교 같으면 예상 외로 맑은 오남천 냇물에 신기한 생물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관찰하고도 다시 교과서에 제시된 생물을 잘 기억해두어야 하는 공부를 시키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지역교육과정, 지역교과서가 있다면 우리나라 학생들도 얼마든지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지역교육과정, 지역교과서는 단지 초등학교 사회 4학년 1학기로써 마감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시․도교육청들이 해마다 교육과정 운영에 필요한 장학자료를 경쟁적으로 개발하게 하고 있지만, 학교에서는 그 자료들이 잘 활용되지 않고 서장만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각 교육청에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여 애써서 개발한 수많은 자료를 현장의 교원들이 실제로 활용하면서 개선점을 찾아 ‘업그레이드’하게 되면 저절로 잘 활용될 수 있으며, 교사들의 전문성도 높아지고 예산도 절감된다는 데는 착안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개발․보급의 수량을 보겠다면서 단순한 경쟁을 시켜놓고 교육청평가를 통해 경쟁의 결과를 반영한 예산을 배정한다. 더구나 그 평가의 척도에는 지역의 교육과정정책과 교과서정책이 너무나 미미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교육과정과 교과서 정책에 대한 무관심은 ‘교과용도서에관한규정’ 제3조(교과용도서의 선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학교의 장은 국정도서가 있을 때에는 이를 사용하여야 하고, 국정도서가 없을 때에는 검정도서를 선정·사용하여야 한다. 다만, 국정도서·검정도서가 없는 경우 또는 이를 사용하기 곤란하거나 보충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제16조의 규정에 의하여 인정받은 인정도서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혹 발생할지 모르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창의적이고 다양한 교육과정․교과서 개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전국적으로 획일적인 교육의 원천이 되고 있어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이 발전되기를 기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2. 시․도 및 지역교육청의 교육과정 행정

 

시․도교육청이나 지역교육청들은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과 행정에 대한 비중을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은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의 구현은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이루어진다는 관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행정가들은 교원들의 교육과정 관련 연수회 인삿말에서 “이 연수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언급을 하고 곧 돌아갈 뿐이며, 그것조차 다른 ‘바쁜 업무’ 때문에 교사들에게 진행을 맡기는 경우도 있다(교육과정 행정은 언제나 그리 바쁠 일이 아니라는 점은 불행한 것일까, 다행한 일일까).

 

우리의 교육행정은 아직도 중앙집권적이기 때문에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는 일을 시․도나 지역교육청에서 들고 일어설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의 문제점들은, 기본적으로 교육과학기술부의 정책 부재(不在)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각 지역별 교육청에서도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문제점이 된다.

 

다음은「180개 지역교육청 감사․행정 기능 폐지, ‘교육지원센터’로 전환」이라는 신문기사의 일부이다(문화일보, 2008.4.21,3면).

 

“시․도교육청 산하 180개 시․군․구 지역교육청이 교육지원센터로 바뀌고 감사․지도 기능 중심에서 지원 및 컨설팅 기능 중심으로 전환된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시․군․구 지역교육청의 종합감사 권한과 행정기능 등을 폐지하고 방과후학교, 수준별 수업지도, 학생상담 등 학교지원업무를 전담토록 법령 및 조직을 정비하고 있다고 21일 밝혔다. 교과부는 지난 15일 학교자율화 이행계획 발표에서 현재 시․도교육청의 하급행정기관에 머물러 있는 지역교육청을 학교자율화 지원기능 중심으로 조정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교과부는 교육지원센터가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이나 수준별 수업지도 방안 안내, 학생상담 주선 같은 실질적인 장학지원을 할 수 있도록 기능을 대폭 개편할 계획이다.“ (이하 생략)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의되어온 이 과제가 이번에는 해결될지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지역교육청을 실제적인 교육지원센터로 전환하려는 의도에 대해 분명히 저항하는 세력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는 지금도 학교현장 지원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종합감사 권한과 행정지도 기능이 있어야 능률적”이라는 논리를 전개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역교육청이 현장지원센터로 전환될 경우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과 학교교육과정 정책은 수준 높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또한 분명하다.

 

3. 교육과정 전문가들의 행태

 

우리나라 교육과정 전문가들은 국가교육과정에 대한 관심은 크지만, 지역교육과정이나 학교교육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겉으로는 그렇게 언급하지 않겠지만, 마치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비해 응용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경시한 것과 비슷한 현상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국가교육과정에 대해 시시비비를 하는 학자들은 많지만, 정작 지역교육과정이나 학교교육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란이 없고, 따라서 학자들은 교육과정 현장의 발전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밝히기가 미안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한국교육과정연구회’의 연간 세미나에서 학교교육과정이나 지역교육과정을 다루는 사례가 거의 없는 데서도 드러나고 있다7).

 

2008년 9월 26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최 국제학술세미나에서 호주 커틴대학교 교수 콜린 마쉬(Colin Marsh)는 오늘날 수많은 국가들이 학교교육개혁에 뜨거운 열정을 보이고 있으나, 교육정책 입안가들은 여전히 표준교육 및 필수학습을 우려하고 있으며, 너무 제한적인 교사들의 전문지식이 강화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는 또 학교교육 선진화를 위해서는 3C, 즉 교육과정(Curriculum), 창의성(Creativity), 협동(Collaboration)이 기본적 요소라고 하면서 한국은 국가교육과정에는 관심이 많은 나라지만, “덜 가르치고 더 많이 배운다(Teach less, learn more)”는 싱가포르의 교육정책처럼 학생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교육과정 운영이 세계적 추세이므로 한국의 교사들도 각 학교에서 학생중심의 다양한 교육과정 개발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장교원들은 이 견해가 우리나라 교육과정 전문가들에게 실제적인 자극이 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Ⅳ.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의 발전은 지속 가능한가?

 

 

초등학교 사회과 4학년 1학기 1단원 ‘우리가 사는 시․도’는, 제4차 교육과정기(1981~1987)에는 ‘우리가 사는 시․도’인데도 행정구역은 전라남도를 배우고, 관광은 강원도, 축척 비교는 인천, 지형은 충청남도, 산업은 제주도와 경상남도, 교통은 부산과 전라북도를 배웠으며, 서울에 대해서는 전국에서 공통으로 배우는 식이었다.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심지어 학업성취도평가 문제도 그렇게 출제했다.

 

제5차 교육과정기에는 그 단원을 시․도별로 각각 다르게 편집했다. 연구․개발기관인 이화여자대학교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강우철)에서 시․도 담당자들을 불러 연수를 시키면서 집필하게 했고, 그 담당자들은 ‘우리도 교과서를 집필한다’는 자부심으로 참여했다. 서울은 서울 내용으로, 부산은 부산 내용으로 꾸몄기 때문에 국정교과서주식회사 담당 편집인이 그 48쪽을 인쇄하면서 “교과서가 이렇게 인쇄될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 단원의 편집과 인쇄가 우리 교과서 편찬사에서는 하나의 작은 ‘혁명’이었다.

 

제6차 교육과정기에 그 단원은 한 학기분으로 확대되었다. 획기적인 것은 교육과정부터 그렇게 구성되었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필자가 시․도별 편찬진을 구성하여『사회과탐구』교과서와 지도서를 시․도별 국정도서로 발행했다. 교육부 편수국 고위층은 그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필자는 꿈은 실현될 수 있다는 견해로 일관하여 이루어낸 일이었다8).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그 도서들을 시․도별 인정도서로 발행하게 된 점만 달라졌지만 시․도별로 보면 그것 또한 큰 변화였다.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의 발전은 지속 가능하다는 신념이 필요하다. 교육과정 학자들은 흔히 지역적으로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소개하면서도 획일적인 우리나라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을 고수하는 범위에서 교과서의 다양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편협한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어느 교사의 교실, 어느 학교, 어느 교육청에서 작지만 획기적이고 본질적인 ‘교육혁명’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혁명이 우리나라 지역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을 바꿀 수 있는 힘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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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5차 교육과정기까지의 우리 교실은 국가교육과정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든, 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도 좋을 만큼 국정이든 검정이든 정부가 생산․공급하거나 인가하는 교과서에 따라 전국적으로 어느 학교나 그 내용을 잘 전달하는 데 치중한 교육이었다. 그러므로 국가교육과정은 교과서를 편찬하는 사람들이나 살펴보면 그만인 하나의 문서에 지나지 않았다.

 

2) 제6차 교육과정에 따른 초등학교 4학년 1학기『사회과탐구』및 교사용지도서는 1박2일, 2박3일 등 12회에 걸친 집중적인 연수를 실시하면서 시․도별 국정도서로 편찬되었고, 1996년 8월, 그 인력이 모여 ‘한국초등교육과정연구회’ 및 시․도별 ‘초등교육과정연구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각 시․도에서『사회과탐구』및 교사용지도서를 인정도서로 편찬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의 그 경험과 인력이 축적․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이 시기에 초등학교 1학년 입학초기 적응활동에 사용되는 시․도별『우리들은 1학년』교과서도 함께 편찬되었다.

 

4) 교육과학기술부,『초등학교 교사용지도서 과학 6-1』(2007,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52~153쪽.

 

5) 이 사례는 특별한 관점으로 선정한 것이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가장 전형적인 실험학습 사례의 하나라고 판단되는 주제를 찾아보았을 뿐이므로, 같은 관점으로 보면 이와 같은 사례를 과학과는 물론, 다른 교과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6)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시․도교육청의 각급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 지침이 포함해야 할 22개 사항(예 ①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과 교과, 재량활동, 특별활동의 시간 확보와 운영에 관한 사항)을 제시하고 있으며, 시․군․구의 지역교육청에 대해서도 실천 중심의 장학자료에 포함되어야 할 8개 사항(예 ① 지역의 특수성에 바탕을 둔 중점 교육활동에 관한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7) 이 글을 쓰는 동안에 받아본 ‘한국교육과정학회’ 이메일에는 2008.10.25. 제2차 국가교육과정 포럼의 주제가 ‘국가교육과정기준 연구개발에서 총론과 각론의 관계 정립‘이라고 되어 있다.

 

8) 교과서 원고 집필 과정에서는 대학교수들도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시․도별 담당자와 편찬진들은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게 참여했고, 초고가 대학생 리포트 수준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자 드디어 교과서 집필, 편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으므로, 필자는 사회과 교육과정 해설로부터 일련의 그 연수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