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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교과서의 날」과 빼빼로데이

by 답설재 2008. 11. 10.

 

 

10월에는 국경일과 기념일이 많습니다. 1일은 국군의 날, 2일 노인의 날, 3일 개천절, 5일 세계한인의 날, 8일 재향군인의 날, 9일 한글날, 15일 체육의 날, 18일 문화의 날, 21일 경찰의 날, 24일 국제연합일, 28일 교정의 날 및 저축의 날입니다.

그러고 보면 10월에는 기념일이 참 많습니다. 게다가 10월 5일은 ‘교과서의 날’입니다.

 

쑥스럽지만 교과서의 날은 법정 기념일은 아닙니다.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에서 광복 후 처음 나온 국어 교과서(초등학교 1학년 1학기)『바둑이와 철수』발행일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는 교육부에서 편수(교육과정․교과서 정책)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모임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정부의 공식적인 보조를 받는, 말하자면 공인된 단체는 아닙니다. 그곳에 등록되려면 회원들이 상당한 수준의 ‘버젓한’ 논문을 제출하여 정기적으로 학회지를 발간해야 하고 학술세미나 같은 것도 개최해야 하는데, 부끄럽지만 그런 논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몇 명 이상 들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래 그냥 우리끼리 수준이 되거나말거나 어쭙잖은 원고라도 제출하면 다 실어주는 저널과 수필집을 내고 있습니다. 그나마 책을 내어줄 스폰서를 구하기도 어렵고 원고를 내는 사람도 줄어들어 올해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답니다. 그 외의 활동으로는 1년에 한번 곰탕집 같은 널찍한 식당 2층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2006년 봄, 그 연구회에서 ‘교과서의 날’ 제정 취지와 행사 계획 등을 담은 멋진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회장단에서는 그 문서를 교육부에 제출하고 기념일로 정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무슨 기념일이 수없이 많기 때문에 ‘교과서의 날’은 당연히 법정 기념일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허사(虛事)였습니다. 제정 취지가 그렇게 긴요하지 않다는 판단을 한 것일까요? 정부에서는 우리 회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에서 그냥 기념식을 하고, 관련 행사를 하면 될 것 아니냐고 하더랍니다. 새삼스럽지만 간단해 보이는 일도 그만한 세력이 있어야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해 가을, 우리는 ‘우리끼리’ 기념식을 하고 세미나도 개최했습니다. 처음에 계획하기로는 교과서 편찬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분들을 가려 훈․포장을 상신하고, 세계의 교과서 전시회, 뛰어난 교과서와 디자인 표창, 교과서 수필 공모, 학술발표회 개최 등 교과서의 품질 향상과 교과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다양한 행사들을 구상했지만 처음부터 가당치 않은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해 10월 5일 제1회 교과서의 날은 그럴듯하기는 했습니다. 종로에 있는 프레스센터에서 교육부 장관 표창장도 전수하고, ‘교과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좀 펑퍼짐한 주제의 세미나도 개최했기 때문입니다. 첫 행사여서 그랬는지 서너 군데 출판사들의 협찬도 있었고, 교과서에 관심을 가진 여러 출판사 직원들이 몰려와 자리를 메웠습니다. 나는 그날 그 세미나의 사회를 보면서 ‘나도 이만하면 아주 이름 없는 사람은 아니구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행사에 대해 단 한 줄의 기사라도 실어준 신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끼리’의 잔치가 되고 만 것입니다. 행사를 마친 저녁에 나는 이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행사 전 프레스센터 식당의 그 값비싼 오찬을 우리끼리 했으니……, 기자들을 불러 점심이라도 대접했어야 하나?’ ‘「교과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니, 내가 그만큼「교과서 자유발행제 도입」이나「교과서 정기검정제 도입」처럼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주제를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해도, 선배들은 그런 주제는 정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한다며 묵살해버리더니…….’

 

아니나 다를까 지난해의 제2회 교과서의 날 행사에는 허무할 만큼 찾아온 사람이 적었습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만한 사람도 아주 적어서 프레스센터를 빌려 행사를 치른 것이 호사스러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회에서는 올해의 제3회 교과서의 날 행사를 아주 청빈하게 치렀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10월 5일에 개최하지도 못하고 24일에 개최했는데 나는 그날 대전에 볼일이 있어 참석조차 못했습니다.

 

기사가 실린 신문은 역시 하나도 없었지만 그날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에서는「제3회 ‘교과서의 날’ 기념 축전 조촐 거행 -교과서의 날은 민·관·학계의 협력체제 구축으로 국민적 교육행사로 발전시켜야」라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보도자료란 신문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자료입니다. 그 보도자료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가 교육인적자원부의 후원을 받아 국내 최초로 제정 선포했던 ‘교과서의 날’ 제3회 기념식이 24일 오전 11시 연구회 사무실이 위치한 (주)천재교육 R&D센터 소강당에서 박용진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장과 연구회 회원, 교과서출판사 및 교과서 관련기관 관계자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열렸다.”

 

연구회 회장의 기념사 중에는 이런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교과서의 날’ 기념행사가 우리 연구회에 국한된 게 아니고, 또한 교과서 관련 단체에 한정된 것만이 아닌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이 날의 의의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등 숭고한 뜻을 인식하도록 정부가 선도하고 성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과서의 날’은 민·관·학계의 협력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국민적인 교육행사로 더욱 발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우리 연구회 회장이나 사무총장이 보면 나를 꾸중하겠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교과서가 소중한 거야 누가 모릅니까. 소중하다고 다 기념일을 정하고 거창한 기념행사를 할 수는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내일이 11월 11일 ‘빼빼로데이’라서 이런 글을 써봤습니다. 빼빼로데이, 1994년 부산 여중생들이 처음 시작했다는 설도 있고 롯데의 판촉활동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는 이날, 젊은 남녀들이 빼빼로처럼 키가 크고 날씬해지라는 뜻에서 빼빼로를 주고받는 날이랍니다. 교과서의 날도 차라리 그렇게 시작되었다면 좋을 것을…….

 

그러나 교과서의 날은 그렇게 시작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이 글 자체가 여담(餘談)이지만 여담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교과서를 지긋지긋해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들 말대로 교과서의 날을 정해주면 이런 시험문제를 낼지도 모르겠다.'

 

※ 다음 중 교과서의 날은 언제인가요?

① 10월 1일   ② 10월 5일   ③ 10월 9일   ④ 10월 15일

 

이런 문제도 있지 않습니까.

※ 다음 중 설날은 언제인가요?

① 양력 1월 1일   ② 음력 1월 1일   ③ 양력 1월 15일   ④ 음력 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