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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인디언 편수관

by 답설재 2009. 4. 28.

지난 4월 23일「빛나는 편집인」이란 제목으로 미래엔컬쳐그룹 검정교과서팀 국어과 황은주 과장의 글「긴 시간 속에서 얻어낸 값진 열매」라는 글을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필자가 교육부에서 교과서 편찬업무에 골몰하던 때의 일을 적은 글이 있어(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편수의 뒤안길』제6집, 2005.1.) 그 원고를 탑재합니다. 다 추억거리일 뿐이지만, 사실은 그로써 몸까지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디언 편수관

 

 

 

□ 혁명적인 제5차 사회과 교과서

 

지금도 눈에 선하지만 1980년대 후반기의 사회과학편수관실의 위치는 현 교육과정정책과 북쪽 편이었다. 당시 사회과학편수관은 한명희(후에 편수국장 역임) 선생이었고, 그때 중등 지리과와 초등 사회과 편수를 맡은 김용만 편수관(당시 교육연구관)은 훗날 필자처럼 일요일에도 곧잘 사무실에 나와 일을 했다. 대구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필자는 더러 ‘새마을’이나 ‘무궁화’ 열차를 타고 와 그분을 돕기도 했다. 서울은 88서울올림픽 준비가 한창이었고, 회의장으로 정해진 한국교육개발원에 가려고 양재역에서 택시를 타면 그곳은 요금을 더 내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하던 때였다.

김용만 편수관은 초등 사회과 4학년 1학기 첫 단원 48쪽을 지역단원이라는 이름으로 15개 시․도별로 각기 다르게 편집하는 획기적인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교과서를 편찬하게 되었다. 그 ‘혁명’의 내용을 다 살피면 너무 '사회과적(社會科的)인' 이야기가 될 것이고, 예를 들면 단원의 이름조차 시․도별로 달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 ‘우리나라 제일의 항구 도시 부산’……과 같은 식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제4차 교육과정기까지의 그 단원은 전국 공통으로 -당연한 일이었지만- 행정구역의 사례는 충청북도, 자연환경의 사례는 제주도, 특산물의 사례는 강원도 식으로 전국 각 지방의 사례가 골고루 편집되었는데, 평가문항도 당연히 그렇게 출제되어 말하자면 아이들은 자기네 시․도의 행정구역은 몰라도 충청북도의 행정구역은 암기해야 했고, 필자 같은 교사가 일제고사 문제에 대구에 관한 문제를 출제하자 대부분의 관료적인 장학사들은 "희한한 일“이라고 했지만, 아직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까지는 몰랐어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까지는 알게 된 한두 명의 장학사는 그것을 일대 혁신적인 사례라고 칭찬했을 지경이었던데 따른 것이었다.

교과서 편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교육부 직원이든, 연구소 학자든, 대학의 교수나 조교든 이걸 알아야 한다. 뭐냐 하면, 대한민국 교사 치고 ‘교과서를 집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고 선망하지 않을 사람이 없으므로 정신을 차리고 책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필자가 대구직할시(광역시가 되기 이전의 지명) 지역단원 ‘우리 대구의 생활’을 집필하게 된 것은, 딴에는 사회과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사회과교육‘ ‘지리학연구’ 같은 저널에 글을 싣기도 한 덕택이었다. 스스로 보기에 그 단원의 집필을 맡은 것만 해도 대단했는데,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강우철 교수(편찬기관 대표)로부터 필자가 집필한 원고가 단연 뛰어나므로 앞으로 15시․도 집필진 대표 역할을 하라는 평가까지 받았으니 필자로서는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 내 손으로 그린 교과서의 지도

 

필자는 내친 김에 한 가지 일을 더 하기로 했다. 그때까지 사회과 교과서의 지도는 모두 전문가가 그린 것으로 아이들 눈높이에는 맞지 않으므로 필자가 맡은 단원의 지도는 필자가 직접 그려보기로 한 것이다. 도구를 사려고 문방구점에 가서 비로소 지도를 그리는 펜은 일본제보다 독일제가 좋고 트레싱페이퍼도 상질이 있고 하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질은 습기에 강하고 얇고 투명해서 여러 장을 겹쳐 그리기에 좋은 종이였다. 무턱대고 시작한 일이지만 네 귀퉁이의 점을 맞추고 한 가지 색깔에 한 장의 트레싱페이퍼를 사용하여 그린 지도 원고를 가지고 당시 대방동의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송주순 사회과 편집인을 찾아갔을 때의 조마조마한 가슴을 필자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선 하나를 긋는 데 1시간은 걸려 그린 피눈물 나는 작품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러 장의 지도를 각각 7~11장의 트레싱페이퍼를 사용하여 그렸는데 송 선생은 우선 네 귀퉁이의 점이 맞는지 눈대중으로 가늠해보더니 그걸 제판실 직원한테 내밀었고, 그 직원은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국민학교 선생님이십니까?” 그 날 저녁 필자는 필자가 그린 것이 지도가 되어 나오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또 그 제판실 직원으로부터 “요즘은 일본에 가서 배워와 맥(컴퓨터)으로 지도를 그릴 줄 아는 사람도 생겼는데 교과서의 지도는 아직 전부 전문가들이 손으로 그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맥이고 뭐고 아무리 새로운 방법과 기술이 개발된다 해도 지도에 관한 한 손으로 그릴 줄 아는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정말로 터무니없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국정교과서의 그 송 선생이 대단한 교사 하나가 나타났다는 광고를 하고 다녔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놀라운 인물들

 

그 일로 지역단원 편찬 업무에 관한 한 필자의 입지는 확고해졌고, 공동으로 대구 지역단원의 원고를 집필하기로 한 장학사는 원고 전체를 다 필자에게 맡기고 이름만 두 사람을 넣자고 했다. 서울에서 열리는 회의에도 필자 혼자서 올라오게 되었다. 이전에는 서울의 유명한 교수나 교사들이 교과서 원고 집필을 맡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각 시․도에서는 이름난 장학사, 교사들이라 해도 편수관이나 편찬기관 대표가 보기에는 결국 어중이떠중이들로 구성된 집필진이었다. 그래서 집필진 회의는 연수회 겸 회의 형식으로 1박2일, 2박3일 식으로 자주 열렸는데 강우철 교수와 김용만 편수관은 전체적인 일을 맡고 한면희 교수, 구연무․박환이 교장 등은 몇 개 시․도씩 나누어 맡아 지도했는데 필자도 그 지도위원 구실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김용만 편수관께서는 필자에게 3~6학년 사회과 교과서 편찬의 전체적인 심부름도 시켰다. 말하자면 다음 출장을 올 때까지 교과서 한 권 전체의 원고를 읽고 의견을 내거나 수정․보완해 오라는 등의 일이었다. 그러자 필자는 좀 우쭐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그 오만이 단번에 깨어지게 되었다.

한강호텔에서였다. 각 시․도 원고에 대한 품평회에서 다른 사람들은 필자가 쓴 대구의 원고에 대해 칭찬을 하거나 이견이 있어도 지도위원에게 무슨 말을 하기가 거북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강우철 교수께서 단 한마디로 필자의 허상을 깨고 만 것이었다. 그분은 그랬다. “김 선생은 원고를 쓸 때 교재 펴놓고 강의들은 것을 생각하나, 아이들 생활을 생각하나?” 필자는 결국 그 한마디를 지금까지 잊지 못하게 되었다. 아이들 생활을 생각하며 원고를 써야 한다는 것, 그것은 교육대학에서도 사범대학에서도 또 대학원에서도 배우지 못한 가르침이었다. 그때는 원고다운 원고를 써보지 않았으니 그런 가르침을 받았다 해도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그때까지 배운 수많은 것들이 다락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시시한 내용 같은 느낌을 받았고, ‘이제 나는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런 각오를 갖게 되었다. 그분은 역사를 전공했는데 역사교육학으로 전향(?)하여 역사 전공 교수들 사이에서 평판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두고두고 되풀이하기도 했다. 그분은 이미 1979년에 교과서 구조개선 연구를 위한 세미나에서 교과서가 무풍지대에서 성경이나 고전과 같이 신성하고도 권위 있는 자세를 지키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제언한 분이었다(강우철, 1979,「교과서의 개발」, 한국교육개발원,『교과서 구조개선에 관한 연구(부록)』,23~32쪽 참조).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필자는 두고두고 놀랍다.

① 교과별로 특색과 개성이 강한 교과서가 나타날 것이다. 종전에 국어와 사회(도덕)는 교과서로서의 개성을 잃은 것들이었다. 교과별로 개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학습지도에서도 그 만큼 책임 있는 수행을 하게 될 것이며, 국민학교 고학년에서는 교과교사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② 다음과 같은 미신은 단연 타파해야 할 것이다 : ▶교과서의 이름과 교과명의 일치 ▶1교과 1교과서(책)주의 ▶국판 이외의 크기에 대한 기피증 ▶색도가 많을수록 좋다는 미신 ▶학생 자습서와 교과서를 애써 구분하려는 태도 ▶교과서는 내용을 간추린 골자이기 때문에 매력 없고 재미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는 책임 회피증 ▶일본식 교과서 모형에 대한 공감 ▶미국식 교과서 모형에 대한 열등의식 내지는 자포자기 ▶교과서는 학생 전원이 고루 구비해야만 한다는 생각 ▶교과서는 학교와 집 사이를 반드시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고정관념 ▶배우기보다는 가르치기에 더 편리하게 만들려는 의도 ▶교과서에 대한 지나친 신성시 내지는 권위 부여 ▶교과서의 내용은 시험에 낼 주요 사실의 조직이라는 관점 ▶교과마다 교과서는 반드시 있어야 편리하다는 생각 ▶미술, 음악 등은 자료와 이론을 따로 편찬하기 어렵다는 단정 ▶도덕 교과서는 사례집, 예화집으로 구성하면 교과서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생각

③ 새 교과서의 모형은 어떤 형태로든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시키되 교과의 개성을 살려야 할 것이다 : ▶흥미 유발 ▶내용의 개념구조, 개념의 설명 및 최소한의 사실 ▶탐구과정 ▶자학자습의 기회 ▶탐구를 돕는 자료

④ 교과서 제작에는 최소한 다음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해야 할 것이다 : ▶교육과정 이론가 ▶교과 교육 전문가 ▶해당 학교 교과교사 ▶교과 내용 학자 ▶교과서 삽화(그림, 사진) 전문가 ▶교과서 연구가 ▶교과서 Lay-out 전문가 ▶윤문가 또는 국어 전문가 ▶문교부 교과 연구관 ▶기타(사회, 학부모의 의견)

그분은 그 옛날에 이미 이렇게 주장하면서 좋은 교과서는 가르치기 편리하고, 배우는 데 유용하고, 교과 교육목표의 특성을 잘 반영시켜야 하고, 학생들이 매력을 느끼도록 해야 하고, 교과목표 달성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이 경주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좀 안다고 까불면 안 된다는 것을 한 번 더 깨달은 것은 국정교과서주식회사에서였다. 5학년 교과서를 편집하다가 삽화 하나가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김용만 편수관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그분은 필자의 말을 듣자마자, “아, 그 내용이라면 현재 교과서 ○쪽에 있는 삽화가 적당하겠네.” 했다. 얼른 그 교과서를 펴보았더니 페이지까지 정확하게 맞았다. 필자는 김용만 편수관을 그야말로 ‘귀신’이라고 여겼고 ‘어쩌면 저런 사람이 될 수 있나’ 감탄하며 언젠가 흉내라도 내는 사람이 되어보았으면 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이렇게 서울 출장이나 다니다가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는커녕 내팽개치는 꼴이 되겠다’ 싶어서 “이제 출장을 오기가 어렵다”는 말을 꺼내게 되었고, 그러자 김용만 편수관께서는 서울로 파견을 오도록 조치해 주었으며, 파견 3년을 마치고나자 이어서 교육부에서 일하도록 해주었다. 교육연구사가 된 그 날이 1993년 6월 11일이었다.

 

□ 분주하게 지낸 7년

 

교육부에서는 그야말로 분주하게 지냈다. 김용만 편수관은 필자에게 일을 하나하나 가르쳤다. 그분은 시켜놓고 그냥 지켜보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모든 것이 필자에게 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차 교과서를 만들 때, 필자가 경험한 일 중에 ‘청동거울’에 관한 것이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교과서에 실린 사진의 실물을 보지 못하면 제대로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예를 들어 청동거울은 대개 화려한 무늬가 있는 뒷면을 찍은 사진이 교과서에 실리게 마련인데도 아이들은 그 무늬가 있는 거울에 어떻게 얼굴을 비쳐볼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 편수관께 건의하여 ‘청동거울’이라고 되어 있는 그 사진의 설명을 ‘청동거울(뒷면)’으로 고치고 흐뭇해한 적이 있는데, 필자는 실무를 맡게 되자마자 그런 관점으로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자니 수많은 교과서의 수많은 내용이 모두 검토 대상이었고, 하루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게 되었다. 사회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문장도 정확하고 보편적이어야 하지만 그 내용 요소도 다양하기 짝이 없어서 이 세상의 모든 자료를 살펴보고 준비해 두어야 하며, 그 내용이라는 것이 시시각각 변하므로 확인했다고 안심하고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필자는 “정말로 경복궁 근정전 사진인가? 내일도 경복궁 근정전일까?”라는 항목을 교과서 검토 100대 관점의 하나로 설정하기도 했다. 실제로 ‘남대문’이 ‘서울 숭례문’으로 바뀌어 불리게 된 사례도 있지 않은가. 하다못해 등장인물의 이름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1단원에서는 정석이네 아버지가 농촌에서 원예농업을 한다고 해놓고 4단원에서는 정석이는 도시 한가운데에서 생활하는 가정의 아이라고 하면 되겠는가. 또 있다. 이제 와서 순이니 철수니 하면 대한민국 평균 이름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노라’ ‘슬기’ ‘미소’ ‘민국’이가 등장하면 아이들 중에는 교재 내용에 정신을 쏟기보다는 ‘그 이름 참 희한하네.’ 혹은 ‘이 이름이 내 이름보다 훨씬 더 좋구나.’ 하고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지도에 대한 개념은 언제부터 어떤 방법으로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희소가치에 대하여 초등학교 5학년이 인식하기에 적절한 사례는 어떤 것인가?’ 등 가르쳐야 할 개념의 학습원리는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보다 기본적인 관점이 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교과서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로 간단하지가 않은 일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막상 교과서가 생산되어 나왔을 때의 반응은 전혀 그런 게 아니다. 연대가 틀리거나 산의 높이가 1미터라도 틀리면 당장 ‘엉터리 사회 교과서’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고 교육부 담당자는 죄인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필자는 그 일에 만족하며 지냈다. 전국에서 1년에 65만 명 정도의 학생들이, 아니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이 교과서로 공부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해볼만하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리에서, 전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저 사람도 내가 만드는 교과서로 공부한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이 직업은 내 천직이므로 승진이 되지 않는다 해도 이 일에만 전념하며 살 수 있도록 해준다면 평생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지역단원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했지만, 그렇게 살면서 필자는 김용만 편수관께서 한 단원을 지역화한 것을 발전시켜 시․도별로 한 권의 지역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로 만들게 했고(6차 교육과정기), 다시 그 지역 교과서를 시․도별 교육감 인정도서로 발행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편수국이 폐지되고 몇 명만 남아 모든 일을 감당하는 설움을 겪으며 살았다. 더 바빠도 더 바쁘다는 소리도 못한 채 그렇게 살았다.

 

□ 또 4년 반, 그리고 ‘익숙한 것과의 결별’

 

더 바빠도 더 바쁘다는 소리조차 못한 것은, 우리 편수직이 일하는 방법이 틀렸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중앙정부에서는 정책을 다루어야지 집행 업무나 하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996년에는 ‘편수국’이 없어지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탄생했고, 교육부에는 겨우 ‘교육과정담당관실’ ‘교육과정평가담당관실’이 남더니 ‘교육과정평가정책과’ ‘교과서정책과’로 바뀌고 드디어 ‘교육과정정책과’만 남아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교육과정에 대한 ‘정책’을 다루는 부서가 된 것이다.

편수국이 없어질 때 장기근무를 하던 편수관들은 모두 사라지고 애송이들만 남아 ‘정책’ ‘기획’ ‘평가’ ‘집행’ 등의 말을 자주 들으면서도 거의 변함없는 업무에 매달려 살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늘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해찬 장관은 편수업무를 별 것 아닌 것으로 평가하다가 정책토론을 거치게 한 다음에는 그 중요성을 인정하여 조직을 보강하고 편수제도도 여러 가지로 바꾸게 했지만 -심지어 교육부지정 연구학교는 모두 없애되, 교육과정 연구학교는 그냥 두라는 지시까지 했을 정도로- 우리가 밤낮으로 교과서를 수정․보완한 자료를 보고는 “교육부 직원이 교과서 토씨나 고치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두고두고 강조했으니 우리가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알게 모르게 차츰 하는 일이 달라지고 있었고, 공개채용으로 들어오는 직원들 중에는 ‘편수관’이 하던 일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그런 일을 하느니 가만히 앉아 있겠다는 듯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했으며, 일상적으로 하는 이야기들도 옛날에 우리가 나누던 대화와 다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는 가슴이 써늘한 느낌을 주는 책을 읽게 되었다.『익숙한 것과의 결별』. ‘IMF를 넘어 새로운 시대로 가는 개혁의 이론과 방법’ ‘대량실업시대의 자기혁명’이란 부제가 붙어 있어 기업의 변신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바로 다음의 인용이 가슴을 찌른 대목이었다(구본형,『익숙한 것과의 결별』,생각의나무,1998,77,79쪽).

어제 했던 일을 하며 평생을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격랑과 같이 사나운 지금이다. 부지런함은 미덕이지만, 무엇을 위한 부지런함인지가 더욱 중요하다. 그저 바쁜 사람은 위험에 처한 사람이다.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영역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 또한 매우 위험하다. 단순 반복적인 일로 매일을 보내고 있는 사람 역시 위험하다. 그가 성실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개혁은 항상 치명적 급소를 노출시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혼돈과 혼란’이라는 것이다. 변혁기의 특징인 카오스(Chaos)는 누구에게나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개혁 세력은 그 속에서 희망을 보고, 기득권층은 그 속에서 절망을 본다.

그때부터 필자는 우리 고참 편수관은 ‘인디언 편수관’이 아닐까 생각하며 지내게 되었다. 지금은 목숨이 붙어 있지만 언젠가 우리만 가고 나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인디언 편수관’. 편수국이 되살아난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런 날이 올까. 와야 하는 것일까. 무턱대고 그날을 기다리기보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필자는 1999년 9월 1일에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감으로 나갔었고, 제7차 교육과정의 적용 문제로 현장이 시끄러워 안 되겠다 해서 2000년 3월 1일에 다시 장학관이 되어 들어갔었다. 그리고 다시 4년 반 만인 2004년 9월 1일에 이곳 경기도 광교산 기슭의 조그마한 학교를 찾아왔지만, 나오면서도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인디언 편수관이 아니었을까.’

‘스스로 성실한 사람이라고 자처하고 더러는 남들도 그걸 인정한다 하더라도, 나는 역시 변화에 약한, 바쁘기만 한,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을 한, 단순 반복적인 일로 하루하루를 보낸, 직접적으로 털어놓고 말하면 1970년대에 한 선구자가 말한 것의 뜻도 모른 채 세월만 보낸 한 사람의 인디언이 아니었을까.’

1993~1999, 2000~2004

사회과 편수관, 장학관, 교육과정정책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