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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부모로서의 삶과 생각을 자녀에게 지금 알려주십시오

by 답설재 2008. 10. 7.

 

 

 

이 글은 지난해 10월 우리 학교 신문에 실었던 글입니다. 올해도 6학년의 졸업기념문집(지난해의 표제『소중하고 특별한 분들』)을 부모님들 이야기를 쓴 글로써 만들기로 했으므로 이 글을 다시 보내드립니다.

 

 

 

부모로서의 삶과 생각을 자녀에게 지금 알려주십시오

-특별히 6학년 학부모님들께-

 

 

 

나의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마흔 여덟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7남매를 낳았고, 하교하여 그 얼굴을 보려면 집으로 가기보다는 밭에 나가 콩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찾아가는 것이 더 쉬웠습니다. 1년 365일, 남편과 함께 들일을 나가고 함께 귀가하는데도 남편이 귀가하는 시각에 맞추어 저녁식사를 준비해낸 분입니다. 겨우 한글을 읽기는 했지만 평생 손에 책을 든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내가 집에 없을 때 ‘이게 내 아들이 읽는 책이구나’ 하고 쓰다듬어보기는 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제 몇 가지 일화만 떠오르게 되었으나, 예순을 넘긴 이 나이에도 삶이 너무나 힘들 때는 “엄마” 하고 가만히 불러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도 떠나게 되면 맨 처음 그분을 찾아볼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분이었는데, 그럴듯한 내용은 무엇이든 한번 들으면 차곡차곡 기억해두었다가 나를 나무랄 때마다 하나씩 인용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런 걸 써먹으려고 나를 혼낸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령 내가 참을성 없이 굴면, ‘관운장’은 화살촉을 꺼내는 수술을 받으면서도 바둑을 두었다는『삼국지』이야기를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분은 유달리 나를 자주 꾸짖었기 때문에 나는 마침내 주눅이 들어 키조차 크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10여 년 간 온갖 병으로 수없이 병원을 드나들었고, 좀 남긴 농토는 내가 그 뒤처리를 하고 보니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오늘까지 남에게 칭찬 한번 듣지 못하고 덕지덕지 비난만 들으며 사는 불효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출신 성분은 참 보잘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집안 내력을 찾아서 위로 또 위로 가물가물하게 거슬러 올라가보아도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아 생활한 미관말직 하나 찾을 수가 없고, 그렇게 약 500년을 헤아려 올라가면 드디어 관리로 살다간 분들을 찾을 수 있으니,『조선왕조실록』사초에 세조의 즉위를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함으로써 1498년(연산군 4년), 저 유명한 무오사화가 일어나 능지처참의 극형을 당한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 할아버지나, 그분의 조카로서 역시 그 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겨우 풀려나기는 했지만 1519년의 기묘사화 때 또다시 관직을 박탈당한 김대유金大有 할아버지(직계)가 바로 그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들 이후의 아득한 세월에 제 조상들은 농사일 이외로는 한번도 직업을 바꾸지 않고 살았으며, 나의 선친先親 또한 윗대의 어른들보다 하나도 더 나은 것 없는 세상을 살다갔습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분들이 바로 그 선친과 선비先妣 두 분입니다. 그분들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이일저일 나를 못살게 군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 없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나는 그분들이 두고두고 그립고 안타깝고 송구스러울 뿐이며, 나도 그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 때 덜 부끄럽도록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간단히 생각해보아도, 내가 건강하고 편안하게 지내기를, 그분들만큼 애타게 기원한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입니다.

 

더불어, 참으로 신기한 것은,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이나 추억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일들이라는 점입니다. 그 시절에 그분들과 함께 했던 일들이나 그분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가슴 저 깊은 곳에 자리 잡아 그것이 책에서는 읽을 수 없는 교훈이 되고 뼛속까지 사무치는 정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기야, 그런 일, 그런 이야기도 어렸을 때라야 먹혀들지 좀 자라면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지도 않고 눈치나 살피게 되며, 도움이 될 이야기도 귀찮아하여 ‘또, 저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제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기 전에 우리가 겪었던 일들, 어려웠던 일들, 꿈으로만 남기고 만 일들, 두 분이 만나 사랑한 일들, 그렇게 살아오면서 잊지 못하고 있는 일들을, 지금은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이 아이들에게 전해주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안하면, “내가 살아온 것은 이 아이에게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의 남루하기 이를 데 없는 사례까지 들어 이야기하였으므로, 여러분께서도 다시 한 번 생각을 가다듬어 보시면 내 생각에 동의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놈이 더 크면 이야기해주리라’ 생각하신다면, 그때는 이미 늦다는 것을, 그때의 이 아이들은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으려는 자세를 갖지 않고 있을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두 분 중 한 분이 언제, 시간을 좀 내셔서 차근차근 가슴속에 묻어두고 계신 그 일화들 중 몇 가지를 골라 들려주시면, 우리 아이들은 그 일화를 나름대로 기억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 명심해야 할 점, 앞으로 노력해야 할 점 같은 것들을 덧붙여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 않는 특별한 기록으로 간직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소박하면 소박한 대로,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어떤 내용이든 하나하나 주옥같은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자녀에게는 부모님의 생애만큼 특별한 이야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모님만큼 특별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2008년 10월, 또 이처럼 찬란한 가을에

 

                                                                                                                                                      교장 ○○○ 올림.

 

 

추 신 : 나는 이 학교 교장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마치는 날까지 이 자랑스러움을 간직하며 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에 매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질정叱正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