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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가을葉書(Ⅱ)

by 답설재 2008. 9. 16.

추석이 왔기 때문에 차례를 지냈습니다.

아직 한낮에는 기온이 30도를 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합니다. 그 기운도 얼마나 갈까요.

어차피 다시 찾아온 가을이라면, 세상이 더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정치인들은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82일만엔가 문을 열었다면서, 국회가 열리지 않으면 국회의원으로서의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이므로 세비(歲費)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유치한 생각이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도 국회의원입니다. 재산을 수십억 원씩 가지고 있다는데, 그까짓 세비 주지 않는다고 걱정할 국회의원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행정도 더 수준 높아져야 합니다. 경부운하를 포기하고 경인운하를 파든, 그린벨트를 허물어 집을 짓든 옛 사람들이 이룩해놓은 일들을 보고 배우면 더 현명해질 것입니다. 옛날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저수지가 환경문제를 일으킨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누가 그린벨트를 더 풀어도 된다는 연구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겠지요- 그린벨트는 '조성(造成)'된 숲이므로 조성한 사람들에게 '고마움'(혹은 "있으나마나해서 이렇게 힘들여 풀어야 할 걸 뭐 하려고 그랬느냐?"며 원망할 수도 있을까요?)을 표하고 허물 수도 있으나 허물어도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건, 저 숲의 나무가 좀 없어져도 우리 생활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이곳 한반도의 우리도 때로는 지구 반대편의 브라질 밀림에서 정화된 공기로 숨을 쉬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인공(人工)은 불필요한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자연(自然)은 필요도 없이 그곳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선생님들도 더 깊은 생각으로 가르치기를 기원합니다. 다른 학교에서 1시간 가르칠 것을 2시간씩 가르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건 쓸데없는 짓입니다. ‘연구(硏究)’란 남과 같은 시간에 가르쳤지만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 할 때 값진 것입니다. 언젠가 얘기했지만, 가령 ‘영어말하기대회’를 한다면 듣고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해!” “박수!”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종이라도 나누어주고 “그 종이에 잘 알아들은 발표 내용을 10자 이내로 써보자” 혹은 “잘 발표한 사람이 누군지 각자 심사해서 써보자”고 하고, 제대로 써낸 아이에게 경품을 주겠다고 하면 좌석에 앉아 부러운 눈빛으로 구경만 하던 아이들도 공부를 하게 되고, 그야말로 멋진, 더 수준 높은 대회가 될 것입니다. 공부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발표 잘 하는 아이만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발표를 잘 하지 못하는 아이도 주눅 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직 용기가 없어서 하루 종일 발표 한번 하지 않지만 무슨 일이든 깊이 생각하는 그 아이도 참 멋진 아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습관처럼 가르치던 행위를 다시 생각해보고 어떤 장면에서나 ‘이렇게 해야 하나?’ 의문을 가지면 더 훌륭한 교육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의문에서 ‘아, 이렇게 가르쳐보자!’는 아이디어가 발휘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더 여유로워지면 좋겠습니다. 마음은 자꾸 각박해지는데 물질적으로는 자꾸만 더 여유로운 생활은 오히려 한심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게 악다구니로 살면 뭐합니까. 학교에 자녀를 맡기는 사람들이 “이것들이 오늘은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나 보자”는 마음으로 교사들을 대하고 학교를 바라보면 우리는 그 눈치를 보면서 가르치게 되고 그러면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맡겨놓은 저 아이들을 저들은 성심껏 가르치는 사람들’이라는 마음으로 쳐다본다면, 우리는 학부모들의 그 눈빛만 봐도 다 알 수 있으므로, 그 마음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잘 가르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진 분이 있다면 그러지 마십시오. 학교 국기게양대의 태극기가 깨끗하지 않으면 교장에게 전화하면 당장 새 국기를 내걸 수 있습니다. 국가에서는 우리 학교의 이런 저런 일들을 잘 살펴보고 처리하라고 교장에게 대통령의 커다란 임명장을 주었습니다. 그걸 왜 교육청에 전화해서 창피하게 합니까? 뭐가 그리 분통이 터집니까? 교육청에 이야기하면 “아, 그 참 훌륭한 분이구나” 하겠습니까, 혹은 “그렇게 보지 않았더니 그 동네에는 참 똑똑한 분이 계시는구나.” 하겠습니까? 학교 일은 더 높은 사람이 뭐라고 해도 교장의 허락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즘은 그런 걸 가지고 교장을 혼내주는 교육청도 아닙니다. 교육청은 학교에 ‘호령’을 하던 옛날과 달리 오늘날에는 학교교육을 지원해주는 기관입니다. 그런 전화가 왔더라는 연락을 받으면 속된 표현으로 그냥 잠시 기분 잡치기만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그런 일로 기분 잡치지도 않기로 했습니다. 제가 기분 잡치면 제가 바라보아야 하는 아이들도 기분 잡치는 불행이 따를까봐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더 여유로워지는 가을, 그런 세상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기분이나 잡치고 그렇게 하기에는 이 가을이 아깝고, 저를 쳐다보는 그 아이들의 눈, 눈, 눈들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잠시 기분 잡친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하늘이 참 맑고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