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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두어 명 전학 보내버린 교장

by 답설재 2008. 9. 1.

    「총 차고 수업하는 교사들」이라는 신문기사를 봤습니다(조선일보,2008.8.30.16면).

 

  손에는 책을 들고 주머니에는 총을 찬 채 수업하는 교사들이 등장할 예정이다. 미국 텍사스 주의 한 학교에서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교사들에게 총기 휴대를 허용해 논란이 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29일 보도했다. 총기 사용법과 위기 대처법 등을 교육받은 교사들은 다음 달 1일부터 이사회에 신고만 하면 학교에서 총을 갖고 다닐 수 있게 된다. …(중략)… 데이비드 서웨트 헤럴드 교육위원회 대의원은 “교실에 CCTV와 전화기를 설치해도 무작위 총기난사는 막을 수 없었다”며 “이런 경우, 학생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전문경호요원이 아닌 교사들이 총을 갖고 다니는 것 역시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총기 폭력을 막기 위한 브래디(Brady) 캠페인’의 대변인 더그 패닝턴은 “미치광이가 들어와 무작위로 총을 쏘는 확률과 교실에 놔둔 총에 아이들이 맞을 확률 중 어느 것이 높겠느냐”고 반문하며 “전문경호요원을 두는 등 다른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직 우리나라 학교의 분위기는 미국에 비하면 훨씬 아늑하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까?

 

  CCTV가 어떻게 총기난사 같은 난동을 막을 수 있습니까. 그건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을 위한 조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CCTV를 의식하는 범인이라면 ‘찍히면 난처해진다’는 생각은 하겠지만 그처럼 흉악하고 지능적인 범인들이 일반인과 같은 자제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걱정을 훨씬 덜 해도 좋은 세상일 것입니다.

 

  119에 전화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범죄에는, 저 멀리서 그야말로 총알처럼 달려올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해도 역시 ‘사후약방문’이 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더구나 1500명의 ‘병아리들’을 주로 여 선생님들에게 맡기고 있을 수밖에 없는 교장으로서는, 어디서 무슨 사고가 났다는 보도를 볼 때마다 그야말로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솔직한 토로입니다.

 

  며칠 전에는 지역자치단체장과 경찰, 금융기관, 학교 등 이른바 각종 기관장들 여남은 명이 모여 점심을 같이했습니다. 마침 119에서도 자리를 함께했기에 “학교에는 핫라인이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꺼내봤습니다. 옆에서 누가 그게 뭐냐고 묻기에 전화벨이 울리기만 하면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이 달려올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했습니다(이 블로그 7월 29일 경기신문 ‘시론’으로 실린 「범행에 무방비 상태인 교문」이라는 제 원고는 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러고 나서 어느 중학교 교장 한 명이 얘기를 들었는데 “119가 있는데 핫라인이 어디에 쓰이겠느냐?”며 시종일관 부정적이었습니다. 설명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화제(話題)가 요즘 중·고등학생들의 생활태도로 옮겨갔습니다.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나는 또 나서서 “요즘은 어른들도 중·고등학생들을 다루기기 참 어려워졌다. 우리 학교 숙직기사는 일흔이 가까운 노인이어서 그런 애들이 오거든 조심해서 다루라고 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또 어느 아주머니가 담배를 피우는 여중생들을 타이르다가 산비탈에 끌려가 몰매를 맞은 후로는 여중생들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게 됐더라는 얘기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청소년을 대하는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나로서는 인도를 걷지 않고 도로를 느릿느릿 횡단하는 그 한때의 만용을 너그럽게 볼 줄도 아는, 우리도 그랬지 않았느냐는 관점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이 관점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 <학교장칼럼> 중 「퇴근길에 만난 졸업생들」을 보십시오).

 

  그러자 그 중학교 교장이 당장 튀어나와 ‘어째 그 모양이냐?’는 듯 자랑스레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나는 우리 학교에 부임해 와서 말썽을 피우는 여학생 두 명을 당장 전학시켜버렸더니 그 후로는 전교생이 꼼짝도 못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그 ‘자랑스러운’, 초등학교 교장은 중학교 교장에게 좀 배워야 한다는 듯 얘기한 그 사례를 듣고 제가 ‘하아- 과연! 중학교 교장은 달라도 한참 다르구나.’ 그랬을까요? 참 가관(可觀)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중학교 교장이라니요. 교육학 시간에 뭘 배우고 교장자격증을 땄을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교장이라면 중학교 교장은 아무나 해도 되지 않을까요?

 

  사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일지도 모릅니다. 잘난 아이, 말 잘 듣는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 또 어떤 내세울 만한 특징을 가진 아이들은 지낼 만하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기가 죽어서 지내야 하는, 죽고 싶어도 혹이나 싶어서 기웃거려야 하는, 모자라는 점을 채워주기는커녕 어쭙잖은 관점대로 줄이나 세우고, “저 뒤에 있는 저 놈은 고개도 들지 말고 입도 열지 말라”는 관점을 가진 교육, 교육자들, 그러므로 그런 관점에 익숙해진 학부모들…….

 

  이 말을 하면 그 교장(?)은 “보내기 전에 잘 타일렀고, 그 학교에도 잘 부탁해서 전학보냈다”고 변명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해결된다면, 뭐 하려고 전학까지 보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미 전학을 보냈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그렇게 다른 학교로 쫓겨난 그 아이들은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이제 착실히 지내고 있을까요? 아이들은 말썽 피우지 않고 죽은 듯이 지내야 훌륭한 시민이 될까요? 정말로?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그 심정이 오죽할까요? “그래, 학교는 당연히 잘못한 놈들을 전학 보내는 곳이야” 하고 자식들이나 원망하고 있을까요?

 

  그 아이들은 쫓겨난 학교의 친구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른이 되면 그 일들을 잊어버리고 살 수 있을까요? 아, 생각하면 나는 몸서리를 칠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교장을 만난 것이 그 아이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불행이 아닐까요?

 

  지난 초여름의 일도 생각납니다. 우리 학교 어느 학년에 ADHD를 앓는 한 아이가 전학을 왔는데, 공교롭게도 편입된 그 반에는 이미 또 한 명의 ADHD가 있어서 이젠 두 명이 서로 시새우며 말썽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교감이 나서서 그 아이들의 학부모와 여러 차례 상담을 했습니다. 교감은 제게 일일이 얘기해주었는데, “아이의 행동이 고쳐지지 않으면 우리가 맡아서 가르칠 수가 없다”고 했더니 그 아이의 어머니가 그러더랍니다. “이 학교에서도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 말을 전해 듣고 나는 “아, 그럼 우리 학교가 ADHD 수용소랍니까?”하고 애꿎은 교감에게 대어 들다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 학교에서 쫓겨 왔는데, 그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는 우리 양지초등학교를 두고 또 어디로 떠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날 그 중학교 교장과의 대화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눌렀습니다.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를 ‘교육자, 교장’으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사였다니...... 저런 인간과 무슨 대화를 하겠나 싶어서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었는데, 좌중(座中)에는 내가 교육부에서 초중등학교는 교육과정, 교과서 정책을 총괄하던 담당관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분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바탕으로 한 얘기도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참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참 대화를 하다가 그걸 느꼈습니다. 예의 말썽을 피우는 학생은 시범으로, 단호하게, ‘자랑스럽게 전학을 보내버리는 교장’이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교육부 간부로 근무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 그는(누군가 나 몰래 살짝 귀띔을 했겠지요) 곧 내 말을 경청하게 된 것입니다.

 

  엉뚱한 결론을 내립니다. 머리와 가슴이 비어 있는, 학력이 없어서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리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을 다녔어도 헛배운 사람은 상대방의 경력이나 지위, 권력, 재산 같은 것을 보고 기가 막히게 빨리 반응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결론은, 우리 사회는 대학교가 가장 훌륭한 학교, 그다음은 고등학교, 또 그 다음은 중학교이고, 초등학교는 그야말로 한심한(혹은 유치한) 학교라는 의식이 팽배한 사회입니다. 이 '유치한' 사고방식이 고쳐지지 않는 한 우리 교육은 가물가물한 상태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한 인간의 바탕은 초등학교에서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먼 생각은 두고, 우리들 자신을 사례로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은, 초등학교 교장도 별것 아니지만 중학교 교장은 뭐 대단합니까? 신문의 ‘인물란’을 보면 훌륭한 인물들이 어느 초등학교를 다녔는지 소개되지 않지만 중학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런 풍조도 제 눈에는 참 가관(可觀)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 보면, 전학을 떠나야 했던 그 ‘시범조’ 두 여학생도 딱하지만, 그렇게 무참한 결정을 내린 그 교장도 교육적으로는 불쌍합니다. 다수(多數)를 잠재우려고 ‘까짓 두 명쯤’ 버릴 수 있는 게 교육이고 교육자라면, 누가 존경하겠습니까? 존경은 안 된다면 그럼 누가 인정(認定)이나 하겠습니까? 그렇게 간단하다면 『교육학』 『교육원리』는 무엇에 쓰는 학문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