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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메달이 없어서 더 빛나는 이배영

by 답설재 2008. 8. 20.

메달이 없어서 더 빛나는 이배영

-2008 베이징 올림픽 관전 단상⑵-

 

 

 

 

2021.1.21. 당시의 연합뉴스 사진을 가져옴.

 

 

 

‘실격패’한 이배영 선수가 유명해졌습니다. 그가 바벨 들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날, 그러니까 남자 역도 경기가 벌어진 지난 8월 12일 이후 일주일 동안 점점 더 유명해졌으므로 앞으로 얼마나 더 유명해질는지 모르겠습니다.

 

8월 13일만해도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습니다. 신문도 그저 무덤덤하게 “역도 이배영, 경기 중 부상으로 실격패” 정도의 제목을 붙였고, 그것도 저 뒤의 25면에 2단 정도로 실었습니다. 다만 용상 3차 시기까지 실패했을 때 바벨을 움켜잡고 기막혀하는 사진이 기사 옆에 실렸을 뿐이었습니다. 그 사진은 그가 하도 안타까워하며 쓰러져 있으니까 ‘기사가 되겠구나!’ 하고 찍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겨우 25면에 짤막한 기사로 실렸던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지금 1면을 금메달리스트 이야기로 채운 기자들에게 비아냥거리거나 어떻게 그리 센스가 없느냐고 묻는 건 절대 아닙니다. 누구는 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누가 1등인가?’ 우선 거기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고, 지내놓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 금메달리스트와 함께 이런 선수를 보기 위해 경기를 하고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 아닌가?’ 싶고, 그러면서 그의 진면목이 빛나기 시작했으니까요.

 

마지막 3차 도전에 나선 이배영 선수는, 자신의 몸에 스스로 용기를 불어넣으려고 관중들의 박수를 유도해보기도 했고, 발로 바닥을 힘차게 굴러보기도 했습니다. 내 다리는 괜찮다고 스스로 다짐한 것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떻게 되나…….’ 가슴을 졸였습니다. 그러나 바벨을 어깨까지 올리며 일어서려는 순간, 이번에도 그는 무릎을 꿇었고 앞으로 넘어지면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바벨이 그의 몸을 덮치지 않기만을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바벨을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엎드린 채 주먹으로 바닥을 쳤습니다. 자세히 기억되지는 않지만, 그 순간 그는 억누를 길 없는 안타까움으로 높고 길게 포효했던 것 같고, 우리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그에게 보낸 그 응원도 한없는 안타까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부디 그가 앞으로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기를 빌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가, 그 슬픔으로 술을 많이 마시거나, 까짓것 부모님 말씀도 듣지 않거나, 심지어 모든 일 다 접어 좌절하거나 하지 말고, 역도 코치나 감독 등 지도자의 길을 가도 충분하다고 격려하고 있었습니다. 글로 쓰니까 제법 여러 줄이 되었지만, 사실은 그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까지 한 것은 거의 순간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스물아홉으로 올림픽에는 세 번째 도전이었고, 지난번 아테네에서는 은메달도 받았답니다. 이제 베이징에서 그 바벨을 들지 못하면 영영 그만이지 누가 또 “다음에도 네가 나가거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185kg을 들기 위한 1,2차 시기에 왼쪽 종아리에 경련이 일어나서 두 번이나 바벨을 떨어뜨린 그는, 대기실로 돌아가 바늘로 다리를 사정없이 찔러 피를 낸 것입니다. 생애 마지막 기회를 ‘그까짓 경련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배영 선수가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쓰러진 그를 보며 안타까워한 그 순간에 또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렇게 울부짖으며 쓰러져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자신을 포기하게 한 그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관중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높이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숨죽이던 우리나라 응원단은 물론 더러 고약한 응원을 한다는 중국 관중들까지도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저런 모습이 운동선수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구나!’, ‘저 장면을 베이징 항공항천대학교 체육관에까지 가서 지켜본 사람들은, 멀리까지 비행기 타고 간 보람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나는, 우리 남양주양지초등학교에서도 이배영 선수 같은 인물이 많이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운동선수만이 아닙니다. 그런 교육자, 그런 정치가, 그런 의사와 한의사, 그런 기업가, 그런 학자……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불굴의 투혼(鬪魂)을 보여준, 씩씩하고 아름다운 이배영 선수, 그런 사람, 그런 명장(名將, 名匠, …)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2008년에 올림픽이 열린 것은 이미 세계적인 행사로 예정된 일이지만 참 복된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배영 선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개막식 때는 미국이나 우리나라 대통령 등 세계 80여 개국 지도자들이, 저 옛날 중국의 변방 국가들이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러 가서 줄을 서서 기다리던 그 모습으로 20분 정도나 기다려 후진타오 주석과 악수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것, 중국은 때로 그렇게 오만하기도 한 나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류샹(劉翔)이 중국의 ‘육상 영웅’, ‘중국의 자존심’이며 그래서 광고에도 많이 나온 인물이라는 것도 신문을 보고 안 일이지만, 그가 남자 110m 허들 예선에서 남보다 앞서 출발했다가 부정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다리를 절룩거리더니 다시 출발선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퇴장하고 말았답니다. 운동선수라고 해서 다 이배영 선수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 이배영 선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칭찬한다고 다른 이들처럼 굴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고 있겠지요.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재미난 토크쇼에 나오거나 개그맨들과 함께 우리를 웃기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더 좋겠습니다. 그냥 우리의 가슴속에 ‘영웅’으로만 살아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삶은 '메달 획득'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실패와 탈락, 오욕, 수치 같은 것의 연속이기가 더 쉽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피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삶의 신산함이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따뜻하게 해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