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전에 본 여러 문서 중에는 제8회「산림문화작품 공모전」이라는 공문서도 있었습니다. 산림청과 산림조합중앙회 주최로 열리는 행사로, 학생부와 일반부로 나누어 학생은 그림이나 글짓기 작품, 일반인은 사진이나 시, 수필을 오는 16일까지 산림조합중앙회로 내면, 학생부의 경우 대상 각 1명에게는 농림수산식품부장관상, 금상 각 1명, 은상 각 5명에게는 산림청장상, 동상 각 10명에게는 산림조합중앙회장상이나 경향신문사장상, 장려 180명, 가작 250명, 입선 100명에게도 산림조합중앙회장상을 주겠다는 내용입니다.
학교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의 문서가 자주 옵니다. 올해도 곧 오겠지만 가령 불조심 포스터와 표어, 글짓기 작품을 내라는 공문서도 그런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각 학교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지만 전교생 혹은 고학년을 대상으로 공모하는 학교도 있겠고, 어느 학년이나 학급을 지정해서 무조건 작품을 내게 하거나 그 분야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에게만 기회를 주는 학교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육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알레르기를 가진, 아주 못마땅해 하는 편입니다. 불조심 포스터는 소방서나 교육청으로 제출하는 데 목적을 두고 그려서는 비교육적인 활동이 될 것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그런 기관에서는 불조심 포스터를 보여주지 않아도 불조심을 철저히 하고 오히려 어떤 곳에 불이 날까봐 걱정을 하거나 다른 곳에서 불이나면 달려가 그 불을 끄는 일을 합니다. 또 생각해보십시오. “얘들아, 불조심 포스터 좀 그려내라. 잘 그리면 소방서장이 주는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한다면, 자신감이나 의욕을 가질 아이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하면, “얘들아, 불조심 포스터를 그리자. 잘 그려서 집에 돌아가 각자 주방의 가스레인지 옆에 붙이고, 작품이 어떤지 부모님께 한 말씀 해달라고 하자.”고 하면, 소질이 있는 아이나 그렇지 않은 아이나 잘 그리려고 노력할 것은 당연하며, 그렇게 해야 그 수준이 향상되고 공부를 왜 하는지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 그리면 한두 명 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포스터 그리는 시간이 분명 지겨울 것입니다.
지난해 9월이 생각납니다. 곧 운동회를 한다기에 이런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러면 5,6학년에서 미술 준비가 된 두어 반에 운동회 포스터 좀 그리게 해서 잘된 작품이나 그렇지 않은 작품이나 현관이나 복도 등 학교의 여러 곳에 붙이게 해주십시오.” 그 정도 부탁이라면 그날 오후에 당장 실현될 줄 알았는데, 며칠을 기다려도 결과가 보이지 않더니 출장을 다녀온 이튿날 아침에 현관을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온 학교가 온통 운동회 포스터였기 때문입니다. 전교생이 다 그려 붙였다고 했습니다. 시쳇말로 “사인이 맞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고, 좀 거창하게 얘기하면 “교육관(敎育觀)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육 현장의 정서를 감안하면 그런 사태가 벌어진 이유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모든 교육활동은 그 의도가 분명해야 할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두어 반’이라고 한 것은,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지나가며 보고 “에이, 저 정도면 나도 그리겠다.” “와, 운동회 한다고 포스터도 붙었네?” 할 것이고 그게 바로 ‘교육’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뛰어난 아이, 잘난 사람만 나서게 한다면 그게 무슨 ‘오고 싶은 학교’, ‘살기 좋은 세상’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제 이야기를 들은 분이 ‘교장이 뭘 망설여. 두어 반이라니. 전교생에게 다 그리라고 해도 다 그릴 텐데.’ 그랬을까요? 물론 그렇게 해도 좋을 경우가 있습니다. 전교생에게 그런 활동을 시키면 당연히 다양한, 그야말로 온갖 작품이 다 나오게 됩니다. 그걸 끈에 매달아서 교문부터 저 앞 학교 진입로까지 죽 내걸면 아이들도 자랑스러워하고, 학부모들도 내 아이 작품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한 운동회 붐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잘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잘 되지 않은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볼까요? 지난봄에는 ‘영어말하기대회’를 한다기에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영어말하기대회 담당 선생님은 바쁘실 테니까 다른 분에게 부탁했습니다. “구경하는 아이들에게 A4용지를 3~4등분해서 나누어주고, 16명의 아이들이 발표하는 걸 다 들은 후에 자신이 그 영어의 내용을 잘 알아들은 내용을 한 가지만 적어내면 경품을 준다고 하십시오. 아이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말고, 적어낸 내용들을 간단히 살펴보고 발표회가 끝난 시간에 당장 <상>자 도장을 찍은 공책을 한 권씩 나누어주십시오.”
이튿날 아침에 또 놀랐습니다. A4용지를 3~4등분하기는커녕 A4 전지에 아예 표를 만들어 발표할 아이 16명의 명단, 발표 제목을 영어로 다 적어주고는 그 16명의 아이들이 발표한 내용을 모두 적도록 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 아래에 종합의견까지 적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수준의 아이들은 엄두도 낼 수 없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16명의 발표자들이 이야기한 내용을 능통하게 알아들은 수준의 아이, 1시간 이상 진행되었을 그 시간에 화장실도 가지 않은 채 꼼짝 않고 들은 아이 말고는 아예 경품을 포기해야 할 형편의 듣기평가기록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아직 경품을 주지 않은 것도 당연했습니다. 일단 교장을 놀라게 한 다음에 그 경품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재미있게 듣고, 가벼운 마음으로 듣고, 가끔 박수도 보내며 듣고,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며 듣고, 간단하게 적어냈는데 경품까지 받는, 다음에 이런 기회가 있으면 또 오고 싶은 그런 교육활동이 아니라 “이제 이런 대회 구경 오라고 하면 다시는 오지 않겠다. 그렇게 적어내게 하고는 겨우 공책이라니!” 할 그런 결과가 되어버렸으니, 아이디어를 낸 저로서는 참 기가 막히는 일이어서 우선 그 기록지를 꼼꼼하게 메운 그 아이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목적을 둔, 어떤 것을 목표로 한, 어떤 내용을 가르치고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저기 플로어에 있는 아이들은 발표를 듣는 동안 아무 할 일 없이 조용히 하기만 하면 되고, 만약 재미가 없어도 장난을 치거나 떠들면 꾸중을 들어야 하고, 발표가 끝나면 우레와 같은 박수나 보내면 되는 교육(?)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잘난 아이, 뛰어난 아이의 발표를 위해 동원(?)되는 아이들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발표하는 아이나 듣고 있는 아이나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약, 전교어린이회 회장단 선거를 앞두고 입후보자의 연설을 듣는 시간이라면 입후보자도 아닌 ‘못난 주제들’은 그 연설이나 듣고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해야 하는 교육이 아니라, 그 입후보자들을 스스로 정한 관점에 따라 구체적으로 평가해보고 높은 점수가 나온 입후보자에게 표를 던지게 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듣기’입니다. 그저 국어시험지의 첫 부분에 제시된 두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선생님께서 불러주시는 글을 잘 들어야 하는 ‘듣기’는 오히려 ‘진정한 듣기’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여름방학 과제물 전시회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학년별로 복도에 과제물을 전시해놓으니까 참 볼 만했습니다. 이렇게 전시해두었다가 곧 거두어들이기에는 너무 아까웠습니다. 이런 전시는 누가 보라고 준비하는 것일까요? 교장? 다른 학년 선생님? 학부모들? 아이들? 어느 선생님께 부탁했습니다. “아이들이 이 전시물들을 보고 ‘자신이 다음 방학 때 해보고 싶은 과제물의 이름과 그 이유를 적어내면 상품을 주겠다는 공고를 하십시오. 적어내는 종이는 아무 종이라도 좋겠지만, 난처해하거나 망설일 수 있으므로 색종이에 적어서 그 전시장 코너의 어디에 붙이라고 하십시오. 나중에 검토해보고 웬만큼 적은 아이에게는 상품을 주십시오.”
어제는 그렇게 붙인 색종이들을 구경했습니다. 제대로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어느 학년에서는 또 선생님께서 나서서 “얘들아, 이렇게 저렇게 해라.”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런 교육은 그만두면 좋겠습니다. 유심히 살피며 다니는 아이는 공고를 보고 스스로, 우리가 좋아하는 용어를 빌리면 ‘자율적으로’ ‘주체적으로’ 응모하는 아이들이 되게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아이들을 언제까지 그렇게 가르치겠습니까? 물가로 끌고 가기도 어려운데 일일이 그 물을 마시게 해주겠습니까. 당장은 응모한 아이가 서너 명밖에 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가르쳐나가면 나중에는 감당 못할 정도로 많은 아이들이 응모할 것입니다.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올해도 오는 9월 10일에 운동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올해는 포스터 그리기를 어떻게 하고, 운동회 붐은 어떻게 조성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장인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누군가에게 다 이야기했기 때문에 같은 말을 또 하기가 싫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이야기를 또 하면 “이놈의 교장은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는 잔소리장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 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올해는 교장이 어떤 메시지를 주려나?’ 하신다면, 교장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혹은 저의 교육관이나 인간성에 대해 착각 혹은 오해를 하신 겁니다. 매년 하는 운동회인데, 일일이 그렇게 ‘지시’해야 한다면 교장 노릇은 참 한심하고 따분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잔소리나 할 사람에게 대통령이 교장 임명장을 주었다면 대한민국도 한심한 나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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