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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主演의식과 助演의식(Ⅱ)

by 답설재 2008. 10. 13.

소설이나 영화, 연극에서는 주인공이 한 명이거나 두어 명입니다. 대체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이야기가 되고, 재미있게 됩니다(『삼국지』나『수호지』같은 그야말로 ‘대하소설’을 들고,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많다.”고 하면 이 이야기의 취지와 어긋나는 사례가 됩니다). 그러나 교육에서는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이 보조 역할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습니다.

 

학교의 주인공은 학생이라고 하면, 그것은 공감하시겠습니까? 누가 “교장이 주인공이 아닌가?” 한다면 그는 제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하기야 교장이 감시․감독․통제의 역할을 담당하면 그가 주인공 행세를 하는 것이고, 그러면 그 학교 교육은 이미 따져보나 마나 실패한 경우가 될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딱 한 가지 예만 들어볼까요? 교실은 물론이고 복도, 현관 같은 곳의 환경을 아이들이 좋아하고, 아이들이 호기심을 갖고, 아이들이 편리하게 꾸미면 그건 주인공을 위한 환경이 되고, 교장이 보기에 흡족하도록 꾸미면 그건 실패하려고 작정한 교육의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 차이가 바로 교장이 주연의식을 가졌는가, 조연의식을 가졌는가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획일주의, 관료주의, 말도 하기 싫은 행정 위주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그런 흔적이 완연합니다. 불쌍하게도 그런 의식에 물든 교육자는 그 머리나 가슴이 ‘박살’ 나기 전에는 그걸 깨닫지 못할 것 같은 암담함을 느끼게 합니다.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감시․감독․통제를 하여 이른바 ‘관리자’ -나쁜 의미의 관리자- 가 되고 싶을 때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의 체제가 갖추어지면 교장은 자문(諮問 ; 어떤 일을 좀 더 효율적이고 바르게 처리하려고 그 방면의 전문가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기구에 의견을 물음) 혹은 고문(顧問 ; 어떤 분야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자문에 응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조언을 하는 직책. 또는 그런 직책에 있는 사람)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만 ‘자문’ ‘고문’ 하면 왠지 ‘마음 편한’ 심지어 ‘약간은 방관자적’ 일 것 같아서 학교의 장이 회사의 고문과 다른 점은 전적으로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교장은 경력도 많고 그러므로 보다 많이 읽었고, 보다 많이 경험했으므로 교사들이 교육적 판단을 하고 그러한 판단에 의한 교육활동을 전개하면서 의문을 갖거나 더 나은 길을 찾을 때 “이렇게 해!”가 아니라 충분한 전문성을 가졌거나 그러한 전문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자질(자격)을 가졌다고 판단되어 국가로부터 ‘자격증(資格證)’을 받은 그 교사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그러한 교육활동의 계획과 실천, 평가, 지원활동에 책임을 지면 그는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값어치를 하는 교장일 것입니다(반성하면서 이 부분을 씁니다.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여러분”, “얘들아, 미안하다. 고칠게.”).

 

저의 경우에는 그러한 이유로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은 단순한 절차로 계획하여 시행해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활동들에 대해서는 꼭 그 활동의 계획을 구성원 전체에게 알리고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밟아야 소위 ‘결재(決裁)’라는 것을 해주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면 “제가 뭘(누굴) 믿고 결재할까요?” 묻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혼자(담당자) 계획하고 혼자(교장) 결재하는 스타일은 참 우습지만 우리 교육계에는 아직 그러한 스타일이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대체로 발전의 기회를 교장이 독점하고 교사에게는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병폐가 있지만, 결재자나 기안자나 서로 편하기는 한없이 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 기회에 속내를 다 드러내고 말까요? 사실은, 학교라는 곳에서는 그야말로 각자 숨 쉬는 일 말고는 모든 일에 대해 계획-실천-평가-피드백 하는 일이 필요하고, 그러므로 당연히 의견수렴도 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조금만 더 어려운 질문입니다. 학교가 주인공일까요, 교육청이나 교육부가 주인공일까요? 알쏭달쏭하다면, 교육부나 교육청을 위해 학교가 있을까요, 아니면 학교를 위해 교육부나 교육청이 있을까요? (만약 교육부에서, 우리는 너희들 학교를 위한 일 말고도 할 일이 많다고 한다면, 그 대답은 이 질문의 의도를 왜곡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으나마나한 질문입니까? 그러나 참 희한한 교육장이지만, 교장들을 모아놓고 취임사를 하면서 “여러분이 각자 학교에서 말썽을 피우지 않고, 민원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단속하면 그것이 바로 교육장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고 호기롭게 주장하는 ‘주제넘은 주인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설마 그런 교육장이 있겠나, 대어보라!”고 하고 싶습니까?

 

‘학교 자율화’가 뭐고 ‘학교장 책임경영’이 뭡니까? “그럼, 한번 해봐!” 해놓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따지고 혼내주자는 겁니까? 그렇다면 다 ‘반납’하고 싶습니다. 학생과 교사가 있을 때는 당연히 학생이 주인공이고, 교사와 교장이 있을 때는 당연히 교사가 주인공이고, 학교와 교육부(청)가 있을 때는 당연히 학교가 주인공인 것은 맞지만, 현실적으로는 주인공의 수가 워낙 많아서 우리가 지휘하고 통제하고 감시․감독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저는 “그래도 주인공이 주인공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행정의 본질”이라고 끝까지 주장할 것입니다. 해석하면, ‘학생이’ ‘교사가’ ‘학교가’ 주연(主演) 의식을 갖게 하고, ‘교사가’ ‘교장이’ ‘교육부(청)가’ 조연(助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국회의원 선거 때가 되면 “제발 제가 여러분의 머슴역할을 하게 해 달라”고 머리 숙이고, 허리 굽히고, 목이 쉬고, 온갖 돈 다 끌어대어 애걸복걸해놓고는 일단 당선만 되면 “내가 언제?” 하며 주인 역할을 하고, 주연 의식을 발휘하는 사람을 본다면, 여러분은 “사실은 그렇게 변하는 게 옳다”고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