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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주연의식과 조연의식(Ⅲ) : 아이들과 교사의 관계

by 답설재 2008. 10. 29.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기 전에 배워야 하는 것들을, 우리는 그것을 함으로써 배운다.”(아리스토텔레스)

“누군가에게 뭔가를 가르칠 수는 없다. 당신은 오직 그가 스스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을 도울 수 있을 뿐이다.”(갈릴레오 갈릴레이)

“나는 듣고 잊어버린다. 나는 보고 기억한다. 나는 하고 이해한다.”(닐, 1921, 서머힐을 창립한 영국의 교육가)

“지식의 유일한 원천은 경험이다.”(아인슈타인)

- 존 브록만 엮음, 이한음 옮김,『앞으로 50년』중 로져 샨크의 글「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299쪽)에서 -

 

“우리는 이들의 지혜, 이들의 마지막 선언에 공감하면서도, 실제로는 무시하고 있다. 다만, 우리의 전통인 지식주입식교육, 암기교육을 신봉하고 있을 뿐이다.”(파란편지)

 

 

 

 

 

 

선생님의 교실, 선생님의 학교는 어떤 교실, 어떤 학교입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한물간 학자로 취급하고 있지만, 세계적으로는 아직도 그가 생각한 것들이 얼마든지 옳다는 해석이 회자되는 그 ‘한물간 철학자’ 죤 듀이(John Dewey, 1859~1952)의 비판대로 학생들의 머릿속에 “퍼부어서 가르치는” 방법 중심의 교실이라면, 그 교실은 교사가 주연을 맡고 있는 교실입니다.

 

지식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교실이 그런 교실입니다. 식상한 표현입니까? 그러나 고쳐지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라도 그 비판을 자꾸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컴퓨터의 모든 기능과 최근에 구입한 프로젝션 TV 등 최신의 현란한 자료와 도구들을 활용하고 있으므로 지식주입식 수업과는 벌써 헤어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도구들을 동원한다고 해서 “그런 뒤떨어진 수업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입니다. 그런 교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교사가 설명해주든 기계가 설명해주든 ‘설명해주면’ 그건 주입식교육입니다. 그런 교사는 무엇이든, 어떻게든 설명해주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알아야 할 것들은 교과서에 씌어 있고, 나는 그걸 다 알고 있으므로 당연히 내가 설명해주어야 이 아이들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이 아이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달이 주입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전달’ ‘전수(傳授)’라는 말 자체가 사라져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달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아이들은 아직 모르는 상태이고 우리는 알고 있으므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군림(君臨)하기가 쉬우며 그럴 때의 지휘봉은 ‘규율 준수’ ‘엄격’ ‘훈련’ ‘복종’ ‘반복’의 상징이 되기 쉽습니다. 때로는 ‘회초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교육이 아직도 지식주입식 교육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증거로 단정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교육학자들이나 행정가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연수회나 회의 때마다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 적도 있지만, 웬일인지 요즘은 모두 잠잠한 것 같고, 그 대신 여러 가지 시책 구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식주입식교육은 이제 구시대의 산물이 되었다는 뜻일까요? 거듭 밝히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강조해도 우리나라 교육은 지식주입식교육을 탈피할 수 없었으므로 이제는 아예 포기하자는 뜻일까요? 그것은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2006년 연말에 우리나라에 온 앨빈 토플러가, 우리가 하도 “경제, 경제” 하니까 그랬지 않습니까? ““풀빵 찍듯 하는 교육, 국가경제 망칩니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우리의 유명한 어느 가수는 “만약 후배를 양성해야 한다면 정규교육을 받아서 획일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학교도 다니지 못한 고아원의 아이를 선택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서는 다시 혜성처럼 나타나는 어느 가수는 “아직도 중학교를 스스로 중퇴한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교는 아직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대중가수라니! 하고, 별것 아닌 예로 생각됩니까? 그렇다면, 이미 인용한 바 있지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전효선 박사 팀의 국제비교연구(2008)를 들겠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 ‘공부를 잘 하려면 수업을 잘 들어야 한다’는 아이가 프랑스에서는 단 1.0%, 일본 0.9%, 영국 0.8%인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무려 72.6%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프랑스나 영국, 일본의 아이들은 100명 중 겨우 한 명이 설명을 잘 듣고 있을까요? 그러므로 그 나라들의 교실은 설명을 듣지도 않는 아이들이 우글대는 난장판 교실일까요? 이런 조사결과가 발표되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끈질긴 주입식수업의 전통입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들으려고’ 학교에 다니는 꼴입니다.

 

지난 9월 26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최 국제학술세미나에서 호주 커틴대학교 교수 콜린 마쉬는「덜 가르치고 더 많이 배운다(Teach less, learn more)」는 싱가포르의 교육정책처럼 학생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교육과정 운영에 힘써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각 학교에서 학생중심의 다양한 교육과정 개발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사는 덜 가르치고, 학생은 더 많이 배우게’ 하려면 교과서와 교사용지도서 외에 다른 계획이 필요하며 그 계획이 바로 ‘학교교육과정’입니다. “우리 학교에도 학교교육과정은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 문서가 직접적으로 ‘덜 가르치고 더 많이 배우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것입니다.

 

더 자극적인 예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미국의 유명 대학으로 유학 간 우리나라 학생들은 44%가 중도 탈락하여 졸업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까닭은 바로 입시위주의 공부를 한 탓에 미국의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던, 아이들을 질서정연하게 앉혀놓고 우리가 ‘원맨쇼’ ‘매직쇼’를 하며 주연의 역할을 하던, 그 ‘빛나는’ 자리에서 내려오면 허전할까요? ‘주연’의 역할을 하던 교사는 분명히 허전할 것입니다. 허전해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연이 아니기 때문에 그동안 주연을 맡은 데 대해 미안해하며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나라 교실도, 설명해주고 그 설명에 대해 질문을 하면 ‘겨우 대답하는 교실’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하다가 우리에게 질문을 하면 안내해주는 교실, 즉 ‘질문하는 교실’로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도 나는 질문을 받으면 충분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아예 가르쳐주지 말라고 하면 될까요? ‘아이들이 주연’이라는 교사의 의식(意識)은, 그러므로 아이들을 귀여워하고 사랑해주는 정도의 의식이 아닙니다. 그럼, 뭐지? 하시겠지요. 몇 번이고 설명하기는 했지만, 한마디로 딱 떨어지게 말하지 못하는 게 제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한마디로 이야기하는 건 포기하겠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주연(主演)을 맡고 있습니다. 부디 그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조연(助演)을 맡기 싫으면, 그럼 연출(演出)을 맡으십시오. 다만, 연출은 무대의 중앙은커녕 무대에 오르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