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어느 고인(故人)의 진료기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진료비 상세내역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딱 한 페이지에 기록된 품목명만 해도 다음과 같았습니다.
크레아타닌(나375), *전해질종합검사, 소디움(나트륨)나379, 포타슘(카디움)나379, 크로라이드(염소)나3, 혈액총이산화탄소함량, C-반응성단백정량시험, *그람염색및비뇨기, 직접도말염색(나400가), 미생물배양동정약제감, 미생물배양동정약제감, 간침조직검사(나500가), 판독료(큰장기), BIOPSY대표수가CODE, OTHER, 면역조직4종(나55), OTHER, CA-19-9(나-423), 알파피토프로테인(나- ), 태아성항원(나422), 요검사응급(나3), 요현미경적검사(나4), *CBC+DIff(응급), 백혈구수(나105), 적혈구수(나104), 혈색소(나101), 헤마토크리트(나102), 혈서판수응급(나106), 백렬구백분율(응급), *응고종합검사, ACTIVATED PTT(나153), 프로트롬빈시간(나-15), 섬유소원정량(나-160), *전해질종합검사, 혈액총이산화탄소함량, 소디움(나트륨)응급, 포타슘(카디움)응급, 염소응급(나379다), *응급화학종합검사, 칼슘(나379마), 인(나379라), 인(나379라), 혈당(나371나), 요소질소(나373), 요산(나378), 총단백정량(나220), 알부민(나221), 콜레스테롤(나241)
진료비 상세내역은 품목코드, 품목명, 기간, 기본단가, 횟수, 계산금액, 선택진료로 구분되어 예를 들면 L3041 크레아타닌(나375) 2007-08-25~2007-08-31 1,370 1 4 7,124 0과 같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훌훌 넘겨보았더니 이러한 기록이 수십 쪽이었습니다. '아, …….' 저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제 앞에 서서 그 서류를 보여주던 사람이 저를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어떤 느낌으로 그 서류를 가져왔을까요? 넘기면서 헤아려보았더니 그 서류는 77매였습니다.
그것은 한 인물의 처절한 시기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기록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분은 어떻게 지냈을까요?
저는 그 기록을 그렇게 한꺼번에, 간단히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이 미안하고, 민망하고, 무례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무어라고 설명하기가 어렵고 복잡한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冥福)을 빌고 있었습니다.
꿈결 같은 시간, 꿈결 같은 세월을 보내는 이도 물론 있겠지만, 이렇게 보잘것없이 사는데도 자꾸 어려운 시간들이 이어집니다. 어디 불려가서 거짓말을 할 만한 것도 별로 없는 것 같고, 바라는 것도 별로 없는데도 뭐가 이리 어려운 걸까요? 살아간다는 것을 요약하면 본래 그런 걸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지내는 시간들을 저 진료기록처럼 꼬박꼬박 기록해보면, 또한 처절한 삶을 나타내는 다른 하나의 기록이 되는 건 아닐까요? 레테 강에 이르면 이승에서의 일들을 잊기 위해 그 강물에 여러 번 몸을 씻는다는데, 바로 이런 시간들을 잊고 싶어지는 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마주합니다. '이 사람은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 사람이 마음 아프지 않기를, '행복'이 뭔지 잘 모르지만, 그 행복은 ○×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고 양이나 수준으로 측정되는 것이라면, 제 눈에 띄는 이 사람들은 보다 마음 편하고, 보다 많이, 보다 수준 높게 행복하기를 기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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