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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지상에서의 변함없는 사랑

by 답설재 2008. 5. 11.

“영감, 이제 그만 돌아가요.”“응, 그럴까? ……. 그러지.”“아무리 깡통이지만 무겁잖아요, 날씨도 차가운데. 그만해도 빵 몇 개는 사겠어요.”“자꾸 눈에 띄니까 하나라도 더 줍고 싶네. ……. 곧 할멈 당뇨병 약도 더 사야하고…….”“오늘은 어디서 자든 교회엔 가지 말아요. 그 집사라는 분 말이에요. 아무래도 나쁜 사람 같지 않아요?”“뭐가?”“아니, 어떻게, 남의 일, 남의 자식 얘기라고 그렇게 막말을 할 수 있어요? 그래, 우리 애가 그렇게 보여요? 우리 돈 팔천만 원 가로채고 제 부모 버릴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에요? 그 애가 알면 얼마나 맘 아프겠어요?”“할멈도 참,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다 우리 처지 딱하게 여겨서 하는 말인데…….”“그래도 그렇지. 듣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야지. 한인회(韓人會) 사무실에 자꾸 연락하는 것 좀 봐요. 우리가 귀찮아서 그러는 것 아니겠어요? 안 봐도 번한 일이지요. 그 애는 곧 우리 내외 영주권이 나와서 이 캐나다에서 맘 편히 지낼 수 있다고 했는데, 교회 사람들은 비잔가 뭔가 기간이 만료되어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잖아요.”“그래도 그 집사는 부인만 봐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그렇게 착한 부인이 고약한 남자 만나 살겠어? 그 부인이 아무 말도 않고……, 부부가 우리 애들에게는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게 틀림없지만, 우리를 볼 때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소.”“그 여자는 그래요. 먹음직한 건 우리에게 챙겨 주잖아요. 그렇지만 그 집사는 믿음이 가지 않아요. 우리를 꼼짝 말고 교회에 있으라고 하는 것도 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인 것 같다니까요?”“꿍꿍이속은 무슨……. 괜히 교회에 와 있으라고 조르겠어? 우리가 게 있으면 그분들이 더 귀찮기만 할 텐데…….”“알 수 없는 일이에요, 사람 속은. 나중에 우리 둘 거두느라고 애썼다면서 돈이나 우려내려는 수작인지도 몰라요.”“할멈은 참,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야. 누가 듣겠구먼.”“듣기는요. 여기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에 우리말 알아듣는 사람 있겠어요?”“……. 한인이 많은 동네인데.”“아무튼 교회에는 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무슨 일을 시키거나 공짜 밥 먹는다고 손가락질 하는 건 아니지만 편하지가 않아요. 교회 오는 사람들마다 저희끼리 모여 우리 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이제 쳐다보는 것도, 걱정해주는 것도 다 싫어요.”“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이 기도하면서도 우리 애들 욕만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맘 편한 건 아니야.”“…….”“…….”“영감? 그 호텔 찾아갈 수 있을까요?”“호텔은 왜? 말도 통하지 않는데 가면 뭘 해.”“애가 찾아왔다가 애만 태우고 울면서 돌아가면 어떻게 해요? 그 날 새벽에 말도 없이 갈 때는, 사람들은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며 매몰차게 이야기하지만, 우리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무슨 큰일이 있었을 거고, ……, 곧 돌아오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 걱정을 얼마나 했겠어요. 지금은 또 얼마나 애를 태우고 있겠어요.”“그야 그렇지만, 교회 사람들이 호텔 지배인에게 우리 딸 오면 바로 연락해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잖아. 그 지배인도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지 않아.”“난 믿기지가 않아요. 교회 사람들도 미덥지 않은 건 마찬가지지만……. 그 지배인인가 뭔가 하는 놈 보세요. 우리 딸이 보이지 않자, 그날 점심 때 우리를 첨 본 사람 보듯 짐승처럼 몰아냈잖아요.”“호텔 지배인은 그렇다 쳐도 교회 사람들이 어떻다고 그래.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한인회에 부탁해서 한국으로 돌려보내준다고 하는데…….”“이렇게 돌아가면 어떻게 해요? 우리를 애타게 찾아다닐 애는 어떻게 하구요?”“…….”“자꾸 생각나요.”“뭐가?”“영감은……,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내가 딸만 낳는데도 그 딸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던지…….”“그야 고것들이 사랑스럽고 귀여워 그랬지. 그래도 남들처럼 못해준 게 얼마나 많아?”“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영감은 그 애들 낳을 때마다 정말로 좋아했어요. 그것들 학교 다닐 때도 어떻게 하든 돈 때문에 기죽지 않게 하려고 애쓴 거 다 알아요.”“…….”“다른 일들도 다 생각나요. 아무 말 않고 아이들 데리고 놀러 다녔고 수학이다 영어다 컴퓨터, 피아노, 학원이란 학원은 모두 보냈잖아요. ……. 커서는 외국여행 가고 싶다 할 때마다 다 보내주었잖아요. 부자도 아니면서 근사한 식당 보이면 모두 데리고 다녔고……, 그래요, 우리는 아이들은 부잣집처럼 키웠어요. 내가 한 일은 담임선생님 찾아가 인사 몇 번 한 것밖에 없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 게요?”“이럴 줄 알았으면……, 영감한테도 더 잘해주는 건데…….”“그 참, 할멈은……. 그렇다고 할멈이 날 업신여긴 것도 아니고……. 걔들도 우리가 기대한 대로 공부를 잘 했잖아. 늘 1등 아니면 2등이었지. ……. 우리가 뭐 그 애와 헤어지기라도 했나? 어째 멀쩡한 자식, 멀쩡한 남편 두고 저승 갈 사람처럼 구는가.”“그 애가 한국으로 우리 데리러 왔을 때 살갑게 구는 것 영감도 다 봤지요? 얼마나 좋은 앤데…….”“그러니 우리 찾아오는 날만 기다리면 될 걸 가지고…….”“영감이 저승 이승 할 때마다 그래 그만 죽을까 싶어도, 그것들 생각하면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아요.”“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제 그만 갑시다.”“어디로요? 이제 교회는 싫다니까요.”“그래도 잠자리야 그만한 데가 없는데……. 우선 이 깡통 바꿔서 돈부터 쥐고…….”“그것이 끼니나 제대로 챙기고 우리 찾아다닐까요?”

 

 

직접 시청하지는 못했습니다. 지난 4월 12일 밤, SBS TV에서 해외 고려장 편을 방송했답니다. 자식에게 돈을 빼앗기고 아무 연고도 없이 해외에 버려진 노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이었다는데, 인터넷에서 그 이야기를 읽은 후로 오며가며 자꾸 위와 같은 대화를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화는 모두 허구(虛構)입니다.

이 글의 제목「지상에서의 변함없는 사랑」은 대화의 끝부분 “그것이 끼니나 제대로 챙기고 우리 찾아다닐까요?”를 뜻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모들이 ‘유달리’ 자식을 사랑하는 그 모습이 때로는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고,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교육적인가’에도 회의감을 느끼게 한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소설가도 아니고 해서 자초지종을 알 수 있는 글을 쓸 수가 없어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은 또한『지상에서의 마지막 동행Hand in Hand』(타우노일리루시 지음, 박순철 옮김, 대원미디어, 1995)이라는 소설에서 따왔습니다. 이 글을 쓰려고 하자 자꾸 그 소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작지만 참 좋은 책입니다. 그야말로 ‘강추(强推)’입니다. 저는 정말로 좋은 책은 남에게 잘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입니다. 고약한 심사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이제(출판된 지가 10년이 넘었으므로) 서점에서 살 수 있는 재주 있다면 얼마든지 사보시오.” 하는 마음으로 추천하게 된 것입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병원에서 그는 가장 두려워했던 말을 들었다. 아내는 죽어가고 있었다. 은퇴한 시립 취업국장 토르 헬란더는 집에 가려고 시외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이렇게 끝납니다. 잘 보시면 이들 부부가 수면제를 먹고 영원히 자러가는(죽어가는) 장면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 먹어야 하나요?”“적어도 반은 먹어야 해. 물하고 함께 조금씩 삼켜봐.”두 사람은 알약을 먹기 시작했다. 한 번에 네다섯 알씩 입에 넣고 물을 마셔 삼켰다. 이 순간 모든 것은 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쉬웠다. 그들은 죽음이나 내세, 또 서로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흰 알약과 그것을 삼키는 데만 모든 정신을 쏟았다.그리고 나서 안니와 토르는 유리그릇을 탁자 위에 놓고 다시 누웠다. 서로 껴안고 마주보았다.“빵처럼 먹지 말라구.”토르는 미소를 지었다.“무슨 얘기에요?”“수면제 처방을 하면서 의사가 한 얘기야.”“그런 말을 했어요?”“응, 기분 좋아?”“좋아요. 당신은?”“아주 좋아. 여보, 우리는 죽음을 속여 넘긴 거야.”“그래요, 이젠 자야겠어요. 잘 자요, 내 사랑.”“잘 자요. 내 사랑, 안니.”“라디오를 켜놓았군요.”“그냥 켜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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