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의 이 영사가 그렇게 들어앉아 있지만 말고 놀러 좀 오라고 사정을 하는데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 밤 메일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요즈음 이곳 산과 들에는 먹거리가 ‘천지’입니다. 대나무밭에는 죽순이 즐비하고, 논둑 밭둑에는 마늘만한 달래가 한없이 깔려 있고, 머위도 아주 좋아 욕심내지 않고 먹을 만큼만 따옵니다. 지난주에는 더덕을 한 자루나 캐왔습니다. 참 좋은 계절입니다. 산나물을 먹을 줄 모르는 민족들과 살고 있으니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즐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1997년 11월에 열흘간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도쿄에 있는 일한문화교류기금이 초청하고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주선한 교사연수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연수단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20명으로 구성되었고, 교육부에서 근무한다고 내가 단장을 맡았습니다. 교포 3세인 아가씨 한 명과 외무성에서 나온 수미꼬 오지마(壽美子)란 중년 여성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도쿄의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에도박물관을 보았고, 일한문화교류기금 회의실에서 강의도 들었습니다. 동경여자대학 조교수 미도오카는 일본이 결코 좌경화하거나 군국주의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고, 한국에는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일본에는 한국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 많다고 했고, 상미학원단기대학의 어느 교수는 요즘은 학부모들이 뭐든 학교에 다 떠맡기려 한다면서 우리 교육자들도 가정이나 지역사회에 요구할 것을 생각해봐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도쿄 하르애소학교와 나가노 고리소학교도 방문했습니다. 교육위원회에서 지도주사 두 명이 나와 있었습니다. 하르애에서는 파티장 시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고리소학교에서는 활동 중심의 사회과 수업을 보았고 ‘한국실’이라는 이름의 특별실도 보았습니다.
관광도 했습니다. 도쿄타워, 나가노 젠코지(善光寺), 교토 도다이지(東大寺), 호류지(法隆寺), 도쿠가와 이애야스의 별장, 킨가쿠지(金閣寺),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오사카 성이 우리가 본 대표적인 관광거리였습니다.
오사카 성에서 들은 무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용감하고 대담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꾀꼬리가 울지 않으면 죽여 버려라.”라고 했고, 평민 출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울려보겠다.”고 했으며, 귀족 출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답니다. 후에 니토베 이나조라는 사람이 쓴『사무라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도 이 인물 비교가 나와 있었습니다.
어느 신사(神社)에 갔을 때는 함께 걷던 교사 중에 사찰로 착각하는 교사가 있어서 얼른 앞으로 뛰어가 사찰이 아니라는 걸 인식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그곳에 돈을 바치거나 절을 하면 무슨 꼴이었겠습니까.
만찬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만찬은 일한교류기금의 만찬과 나가노국제친선클럽의 만찬이었습니다. 나가노국제친선클럽회장은 사이호쿠칸 호텔 만찬장에서 ‘내년 2월에 열리는 동계 올림픽 때 천황이 묵을 숙소’라는 걸 강조하며 생색을 냈습니다.
단장이 하는 일은 관광지를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도 대표로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한두 번 해보았더니 이력이 났습니다. 누가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젊잖고 재미있으면서도 우리나라의 입장을 드러내는 일, 말의 구조를 단순하게 해서 통역이 쉽도록 해주는 일, 추상적 내용보다는 구체적, 실제적 사례를 드는 일 같은 것이 그때 체험한 요령이었습니다.
단장으로서 한 다른 한 가지 일은 좀 우스운 일이지만, 가이드를 맡은 두 여성이 심심하지 않게 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내 비서처럼 굴었기 때문에라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평소에 읽은 책 중에서 제법 여러 가지를 인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루스 베네딕트의『국화와 칼: 일본문화의 틀』, 西澤潤一의『암기편중교육에 대한 직언』, 오에 겐자브로의『개인적 체험』, 이부카 마사루의『나의 벗 혼다 소이치로』, 노구치 유키오의『초학습법』, 소설『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좀 야한 얘기 투성이인『실락원』(와타나베 준이치),『인간의 조건』(고미카와 준페이),『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무라카미 하루키),『달에 울다』(마루야마 겐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오지마 상은, 일어(日語)라고는 “아리가토 고자이마스”밖에 모르는 나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단장이 멋있다” “외교관이었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아무 말 않는데도 단원들이 진짜로 따른다”며 치켜세우기도 했습니다.
이제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나는 일본의 유적지, 관광지, 학교 같은 곳을 돌아보면서 어느 곳, 어떤 것에서도 감명을 받거나 감흥이 일지 않았습니다. 선물에서도 정을 느낄 수 없었고 보고 들어서 배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나가노(長野)에서였습니다.
나가노 현 서쪽 고산지대(3000m)는 '일본의 지붕'이라 불리며, 자연이 아름다워서 사시사철 스포츠와 레저로 인기가 높은 곳입니다. 당시만 해도 관광객 수가 1억 명을 넘는다고 했습니다. 연수단원들은 그곳에서 1박2일간 민박을 했는데, 나는 본부가 된 와메르바르코 호텔에서 묵었습니다.
이튿날, 그날은 오지 않아도 될 오지마 상이 아침 일찍 오더니 모처럼 조용한 날에 무얼 하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온천에 가고 싶다거나 유적지에 가고 싶다거나 하기가 뭣했습니다. 목욕을 하거나 관광을 하면 뭐가 그리 좋을까 싶었습니다.
그녀가 야외(野外)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그곳이 바로 어릴 때 살았던 그 시골이었습니다. 우리는 단풍이 찬란한 마을을 지나 벼가 익은 들길을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였는지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메뚜기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곳이 일본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고, 모든 걸 잊을 수도 있었고, 가능하다면 교과서 편찬이고 회의고 다 치워버리고 그냥 그곳에 있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있어도 얼마든지 좋을 것 같았습니다. 오지마는 그 ‘야외’에서도 논둑이 좁아 나란히 걸을 수 없는 곳에서는 꼭 앞에서 걸었습니다.
밤에는 내내 호텔에 있었습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그런 밤에 그런 곳에서 책을 읽기도 싫어서 자주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 가을밤이 너무 공허할까 싶어서였던지 한 무리의 안개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달빛도 있었던 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가노(長野와 長夜)의 그 들판은 저녁 내내, 깊은 밤 내내 '지나치게' 조용했습니다. 어쩌다가 열차가 그 정적 속을 소리 없이 달려 저쪽으로 가물가물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생각을 한 밤이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은 이렇게 정겹게 사는구나. 언제까지나 복작대지 말고 싸우지 말고 오순도순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만 떠오릅니다.
오지마 상의 남편은 도쿄시청 직원이었는데, 후에 들으니 부부가 프랑스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로 가기 전 한국에 왔을 때 나를 찾아와 주었습니다. 오지마 상은 “오지 마!”라고 생각하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기 좋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5월에는 휴일이 겹치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단기방학을 하는 곳이 많아서 외국으로 여행가는 사람이 많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외국여행을 한 사람은 하지 않은 사람과 어떤 점이 다릅니까? 그렇게 많이들 나가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찍고 양주 사고 화장품 사고 골프 치고 골프친 다음 여자들 만나보고, 그런 일만 일삼지 말고 무언가 얻어 오면 외화가 나가는 만큼 우리나라 문화 수준이 높아질 것입니다. 교육도 그만큼 쉬워지고 품위 있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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