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멘토링(mentoring) Ⅱ

by 답설재 2008. 5. 19.

누구나 한때 어떤 일에 미쳐 나날을 보낸 경험을 가지게 되지만, 저는 그러한 시기를 현장교육연구보고서를 쓰는 일에 바쳤습니다.

제가 처음 연구보고서를 쓴 그 해는 교사가 된지 7년째 된 해였습니다. 며칠 간 책을 구해 읽고 ‘아, 이거다’ 싶은 주제를 정해 계획서라는 걸 써서 의기양양하게 교육연구원을 찾아갔습니다. 마감을 하루 앞둔 날이어서 저 말고도 여러 명의 교사들이 담당 교육연구사에게 지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연구사는 그 지방에서 명망이 높은 교육자였습니다. 그분이 차례로 여러 교사들의 계획서를 이리저리 넘기면서 무어라 질책을 하는 말들을 엿들었는데, 제가 생각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고, 어떤 교사는 우선 글씨가 그 모양이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물론 아직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은 때여서 당연히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때였습니다. 저는 얼른 제 차례가 되어 그 연구사로부터 칭찬을 듣고 싶은 초조감을 안고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침착하게 기다렸습니다. 제 앞의 교사들이 모두 그 모양이니 제 차례가 되면 우선 글씨만 보고도 그 연구사가 깜짝 놀라 뒤로 벌떡 넘어지지나 않을까 싶어 한시가 지루했습니다.

 

한심하게도 쓸데없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느낌으로 오래 기다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의 입에서 “그래, 바로 이거야!” 그런 찬사가 터져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 표정을 뚫어지게 살폈습니다. 그분이 제 계획서 전반을 검토한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잠시-제 느낌으로는 단 몇 초-제 소중한 계획서를 이리저리 넘겨보던 그분은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김 선생, 김 선생은 처음이니까 다른 사람의 계획서를 많이 읽어보고 내년에 정식으로 계획서를 내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건 말이야, 계획서라기보다는 독서요약이라고나 할까?” 그분이 그렇게 덧붙인 까닭은, 아무리 단칼에 내려친다 해도 정확한 수준은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는가! 그 짧은 시간에 제대로 살펴보기나 한 걸까? 어이가 없어 어떻게 그것이 계획서가 아니고 '독서요약'인지 정신을 차려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대로 일어섰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그 거리를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모릅니다. 제 몰골이 어떠했는지는 아내의 반응을 보고 당장 알 수 있었습니다. 저를 거의 다 죽어 쓰러져가는 사람을 맞이하듯 했고, 한참 만에 간신히 제 사연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래요. 다시 하면 되지.” 저는 그 길로 쓰러져 잠이 들었고,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앉았습니다. 우선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 순간 ‘그렇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신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누워 있긴 했지만 끙끙대는 제 옆에서 아마 잠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생활은 그때부터 오래오래 계속되었습니다. 공부다운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보고서를 쓰는 데 욕심을 내어 되지도 않은 글을 쓴다고 수많은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박사과정도 밟고 제대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우선 필요한 책만 정선하여 읽고, 언제나 자신의 전공분야의 격식을 갖춘 글을 쓰겠지만, 저는 항상 이것저것 덤벼들다 마는 꼴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슨 생각이 나면 아무데나 메모를 해두었고, 읽은 책 중에서 ‘이것 봐라?’ 싶은 데가 있으면 필사를 해놓고 정리는 하지 않으니 아내는 제가 메모해둔 종이조각이 아무리 시시해 보여도 정성스레 모아두는 비서 꼴이 되어 살았습니다. 기나긴 세월 단칸 셋방에서 살며 무지막지한 저는 방에서도 담배를 피워댔고, 금방 아기를 낳은 아내 옆에서 선풍기를 돌려대며 글을 읽고 써대었으니 아내가 저를 가리켜 ‘원수 같은 사람’ 혹은 ‘원수’라고 하면 ‘설마’ 하다가도 ‘정말 나는 저 사람의 원수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을 때가 있어서, ‘저 사람도 나처럼 잊고 살게 되겠지’ 하고 스스로 위안하며 살아왔습니다.

 

이튿날은 계획서 제출 마감일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나타나자 그 연구사는 일단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아마 “왜 이 계획서가 독서요약이냐?”고 항의하러 왔거나 부족한 대로 접수해 달라고 떼를 쓰러 왔거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찾아왔으니 헛일 삼아 제 계획서를 다시 보겠다는 표정이던 그는 또 놀라게 되었습니다. “언제 썼지요? 이 계획서는 무조건 도(道)에 제출하겠습니다.” 그 한마디는, 어쩌면 영영 실의에 빠질 번한 저를 살려냈고, 또 어쩌면 제가 비정상적인(?) 교사생활을 하도록 한 촉매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현장교육연구’에 미쳐나간 것입니다. 그 해 내내 책과 씨름하였고, 읽은 내용을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적용해보는 일에 그야말로 매진하였습니다. 본래 그냥 가르쳐도 대충은 따라하는 것이 아이들이므로 책을 읽으며 제법 조직적으로 가르친다고 애를 썼으므로 그 아이들이 엉망으로 할 이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가당찮게 ‘내가 연구를 하며 가르치니까 아이들이 미루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라는구나!’ 하고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책을 사 모으고 읽고 무언가 쓰는 일로 세월을 잊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아마 제 자식들은 사전(辭典)에서 ‘아버지’를 찾아보면 ‘항상 무언가를 읽는 사람, 또는 무언가를 쓰는 사람’으로 정의될 것으로 생각할 것이었습니다. 아, 저는 그것을 얼마나 가슴아파해야 할 것인지, 또한 지금에 와서 얼마나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고 있는지…….

 

그 해 가을, 그렇게 실천한 결과를 정리하여 ‘보고서’라는 걸 제출했는데 얼마 만에 군(郡) 교원 단체회장상과 교육장 표창장을 받았고, 연구사는 입상한 교사들을 모아놓고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잘 정리하여 도 대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내라고 했습니다. 저는 도 대회는 또 어떻게 개최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동료교사들이나 교장, 교감이 걸핏하면 ‘도(道), 도’ 했지만, ‘도’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 군(郡)과 어떻게 다른지, 그곳에서는 누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니 그냥 얼버무려 아는 채하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들 저를 보고 그랬습니다. “김 선생은 운(運)이 따른 거야. 첫해에는 군 대회에 입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 제 귀에는 그런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얼른 돌아가 아내에게 그 상장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운이라는 게 있다면 제게는 다시 한 번 그 운이 따라주었습니다. 초겨울 어느 날 도 대회에 참가하라는 연락이 온 것입니다. 도 대회는 보고서 심사와 함께 면접심사도 실시했는데, 심사위원이라는 교수가 제 발표를 듣고 심사평을 해주었습니다. “이론적 배경은 책을 읽은 내용을 무턱대고 요약하기가 일쑤인데, 김 선생님은 해결해야 할 주제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파헤쳤습니다. 또 가설을 추상적으로 진술하여 과연 이 가설이 증명되었는지 아리송한 경우가 많은데 이 보고서에는 가설을 설정한 이유가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어서 연구결과에 대한 해석이 명쾌합니다.”

 

“김 선생은 운이 좋다”고 한 사람들이 이제는 저를 달리 보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들을 둘러보면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뭐, 어째? 운? 이것들이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서…….’ 사람들은 저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바로 그 해에 산골 학교에서 시내의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로 옮겨 보고서 쓰는 일을 했고, 전국 공개를 대비한 학교 환경조성에 온 여름방학을 다 보냈습니다. 또 교장승진을 위해 점수를 모으는 교무주임교사의 종용으로 함께 학습자료도 제작하여 출품했고, 전국공개를 하는 날 그 학교의 모든 교사들이 ‘일반수업’이라는 것을 하기로 했지만 저 혼자서 ‘시범수업’을 하라고 해서 그것도 준비하면서 남몰래 제 보고서를 쓰는 일에도 열중하였으므로 아, 잊지 못할 그 해에 저는 전국현장교육연구대회에까지 올라가 영예의 ‘푸른기장’이라는 것까지 받고 그 일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전국대회 날은 다른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접근하더니 보고서 쓰는 일에 대한 흥정을 하자고 했습니다. 이미 30년도 훨씬 지난 그 옛날이었는데도 일단 전국대회에 나갈 보고서를 써주면 50만원, 1등급 ‘푸른기장’을 받게 되면 100만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연전에는 석․박사 학위논문을 대신 써주고 100~300만원의 돈을 받는 곳이 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도 있지만, 그때는 아직 보고서를 대신 써주는 일 같은 건 상상도 못할 때여서 대가도 그만큼 어마어마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워낙 단호해서였던지 그 희한한 사람은 당장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 고생을, 그리고 그 영광을 어떻게 돈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싶었습니다.

 

학교로 돌아오자 그러한 사례가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돈으로 보고서를 사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희한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었습니다. 저는 곧 ‘김 선생은 문제해결의 방향은 이야기해주지만, 보고서를 써주지는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잘 들었는데도 실패한 사람이 생겨서 지금까지도 무어라 변명할 수 없이 미안한 동료도 있지만, 연구주제나 연구의 방향을 알려주어 점수를 따고 승진하는 사람도 여럿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보고서가 입선되기만 하면 나이는 더 적지만 나를 형님으로 모실 것처럼 굴다가 실제로 그렇게 되면 언제 보았느냐는 태도로 돌변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지낸 세월을 자주 후회하고 있습니다. 고스톱만으로도 밤을 지새울 수 있는 동료, 낚시를 가서 이튿날 돌아와『삼국지』에 나오는 어떤 호걸처럼 얘기하는 동료, 술집이나 노래방에 들어가면 절대로 그만 돌아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는 그야말로 ‘신명 많은’ 동료, 어떻게 무슨 수를 썼는지 아파트가 또 있는 동료, 제가 부러워할 만한 동료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래서 그런 동료들이 제 이야기를 할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잡문 쓰는 일에 ‘몰입’하였을 뿐입니다. 사람마다 몰입하여 즐거움을 찾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저는 남보다 잡문을 쓰기에 적당한 사람일 뿐입니다. 잡문은 박사학위 논문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알고 보면 사실은 우스운 사람이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잡문 쓰는 일에 세월을 보낸 웃기는, 미친 사람이다.'

 

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이렇게 된 것이 바람직하든 아니든, 그 옛날 바로 그 연구사입니다. 그분이 제 계획서를 떨어뜨린 바로 이튿날 그렇게 감탄해주지만 않았어도 저는 오늘 이렇게 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이 글은 졸저(拙著)『보고 읽고 생각하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에 실었던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그 책은 3천권이나 찍었는데 겨우 천여 권만 팔리고 전국의 모든 서점에서 사라져버렸고, 이제는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사람들에게 1년에 겨우 한두 권만 팔리는 처량한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책이 많이 팔릴 줄 알고 만든「아침나라」의 황근식 사장에게는 두고두고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장 컬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디가 대한민국입니까? 누가 대한민국입니까?  (0) 2008.07.11
퇴근길에 만난 졸업생들  (0) 2008.06.25
멘토링(mentoring) Ⅰ  (0) 2008.05.15
제1장 제1절 학교장 인사  (0) 2008.05.09
학교장의 경영관  (0) 2008.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