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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2

"제발, 저 좀 보세요!"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89

 

 

 

"제발, 저 좀 보세요!"

 

 

 

아이들이 인사를 합니다. 한 아이에게 "응, 그래." 하면 또 다른 아이에게는 다른 대답을 해주어야 하지만, 그때그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응대하면 자연스럽게 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좀 색다릅니다. 몇 명만 인사하는 것도 아니고, 한가지 인사말로 한꺼번에 인사하는 것도 아니며 네 명이면 네 명, 다섯 명이면 다섯 명이 모두 제각기 인사를 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저 사람이 다른 아이의 인사를 받으면 나는 나대로 따로 인사를 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누구는 인사를 하고 누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싶겠지요.


아이들은 그렇습니다. 모두들 나름대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 푸나무처럼 같은 종류끼리 분류할 수도 없고, 36색 크레파스처럼 36가지로 나누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50명이면 50가지, 100명이면 100가지로 다 다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걸 착각하는 경우가 흔해서 "너희는 이러저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거나 걸핏하면 "누구는 이러이러한데 너는 어째서 그 모양이냐?"고 대어들기 일쑤입니다. 그런 소리를 듣는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2004년에 와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보고 제일 먼저 의문을 표시한 것이 이것입니다. "왜 달리기만 했다 하면 우리가 어렸을 때처럼 아직도 키 순서대로 세우고 달리게 합니까?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무슨 신통한 다른 방법을 들어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키 순서대로 달리는 것이 교육적으로 절대적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 생각이 영 엉터리가 아니라는 것은, 1996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은 미 플로리다 주립대 해롤드 크로토 Harold W. Kroto 교수의 주장으로도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키 작은 학생에게 맞는 농구대가 있다면 그 학생은 농구를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 패러다임을 가진 크로토 교수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퍼부어 넣어줄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주제를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심지어 '선생님 의견에도 반대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창의적인 학생을 길러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조선일보, 2007. 6. 16, 8).


그렇다면, 우리는 미리 마련한 유리상자에 내 아이, 우리 학교 아이를 억지로 밀어 넣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유리상자는 부모도 마련하고, 학교나 국가가 마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이 장차 어떠한 인재가 될 수 있는지 개별적으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획일적으로 설정한 목표나 목적에 따라 이 아이들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님들은 이렇게 공부하고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덕목을 설정하여 강요하거나 심지어 아무 근거도 없이 너는 이런 사람이 되라면서 아이에게 다른 공부를 할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으려 하고,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아이들의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는 데 집중하기가 쉽습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학교에서, 집에서, 학원에서 대체로 네댓 개의 답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에 힘쓰는 것이 대학에 가는 공부의 핵심이라는 기막힌 현실에서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저는 10여 년 전에 영국의 어느 장학관이 우리나라 교육현장을 시찰하고 돌아가서 대한민국은 어느 교실에서나 학생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서 교사의 강의를 경청하고, 그런 모습은 모든 초·중·고등학교에서 거의 비슷하며, 심지어 과학시간에도 그렇다고 보고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참으로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한 지도 모릅니다. 어느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 실험의 즐거움은 잠시뿐이고 아이들은 나중에 시험에 어떤 도움을 줄까 생각하게 되고, 학부모들은 '왜 아이들을 놀게 하느냐?'고 항의한다."(조선일보, 2007. 6. 19, 12). 그런 학부모들이 자녀를 외국에 데리고 나가서는 그제야 인정합니다. "미국은 확실히 달라!"

 

또 이런 지적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에 유학 온 핀란드 학생의 말입니다. "학생들의 프리젠테이션이나 팀 프로젝트가 거의 없다." "모든 학생들이 단지 A+ 학점에 집착해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경쟁하기에 바쁘다."(문화일보, 2007. 6. 19, 10). 우리 교육이 이렇습니다. 이렇게 공부한 아이들이 어떻게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고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며칠 전 어느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에서 이런 메시지도 보았습니다. '대학생 49·5%가 진로 못 정해'. 무조건 대학에 보내놓고 보자는 풍조가 이런 학생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학생에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주문하고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 개성을 스스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제발, 저 좀 보세요!' '똑바로 파악해 주세요!'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고 인정받으려는 온갖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정만 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실제로 질병을 앓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펴보며 교사 구실, 부모 구실을 제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개성 파악과 그 개성에 따른 교육입니다. 아이들은 다 다르고, 모두들 분명히 '무언가'(이른바 '한가락'; 녹녹하지 않은 솜씨나 재주)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7년 6월 25일

 

 

 

추신 : 지난 23일 토요일 오후, 샌프란시스코 Claire Liliental 초·중학교 4·5학년 학생 7명이 지도교사, 학부모 3명과 함께 우리 학교에 도착하여, 몇몇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오는 토요일까지 우리 아이들과 학교생활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더불어 지내는 보람을 느끼고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