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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2

이 아이들에게 미안한 것들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88

 

 

 

이 아이들에게 미안한 것들

 

 

 

  일찍 출근한 어느 날 아침, 어느 아름다운 여 선생님이 육상지도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웬 일이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육상대회에 나가려면 연습을 해야 한다면서 좀 가르쳐달라고 하더랍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이상할지 모르지만, 저는 "아이들로부터 그 요청을 받기 전에 지도해주지 그랬느냐?"고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저 이렇게 말하고 들어왔습니다. "그것 참, 제대로 된 일이군요. 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느냐 아니냐는 다음 문제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주저앉아 가르치는 대로만 배우는 아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이렇게 의젓합니다. 제가 그들의 됨됨이를 좋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의젓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모두들 그대로 자라지 못하고 더러 엇길로 나가기도 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고, 그렇게도 자라는 원인이 궁금할 뿐입니다. 또한 저는 이런 아이들을 860여 명이나 가르치고 있으므로 이들에게 미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올봄에는 운동장 동편의 동산에 뻐꾸기가 오지 않았습니다. 자동차를 노랗게 덮던 송화(松花)가루도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뻐꾸기도 오지 않게 되고, 송화가루도 날리지 않게 된 저 동산의 변화가 안타깝고 아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아침의 교문 앞은 자동차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룹니다. 좀 비꼬아보면 우리 학교의 학구가 몇 십리나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별안간 돈을 좀 벌어서 처음으로 자가용 자동차를 구입한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얼른 교장실로 들어오고 싶은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그렇지 않은 척 길이 트이기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해오름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올라온 아이들이 제게 인사를 하면 저는 그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까닭 없이 미안할 때도 많습니다. 그 싱그러운 눈동자들, 미소들, 재잘거림들, 웃음들을 보고 들으면 제가 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인 것이 미안합니다. 그 미안함은 복에 겨운, '내가 이렇게 그냥 있으면서 저 모습들을 보고, 저 소리들을 들어도 괜찮은가' 싶은 호사스런 미안함입니다.


  그런 아이들이, 천진난만 놀거나 무얼 하다가 다치게 되면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미안하게 됩니다. 피를 흘리는 아이, 팔이 부러졌는지 엉엉 우는 아이, 머리가 아프다며 기운 없이 걸어오는 아이, ……, 그런 아이들을 보면 '아, 저것이 무얼 배우겠다고 와서 저 꼴을 당했구나" 속이 상하고 그 속상함만큼 미안함을 느낍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운동장에서 지내는 시간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나 반에 따라서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날 체육수업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정표를 보면 그걸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그 반 아이들에게 참으로 미안합니다.

 

  우리 학교는 강당, 식당, 시청각실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따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지내다 보면 그러한 시설이 없다는 사실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올해의 성복골 축제가 또 하루하루 다가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점심밥을 실은 배식차를 밀고 오는 아이들을 만나는 것도 두렵습니다. '저런 활동을 시청각실에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때도 많습니다. 우리 학교 시설이 결코 후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는 아이들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조회를 하며 상장이나 표창장을 주게 됩니다. 그 상장이나 표창장의 문장이 고답적이거나 신통하지 못하거나 아름답지 못하거나 갖추어지지 못한 문장일 때 저는 그것을 읽으며 앞에 서 있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또 당당히 겨루어 특별한 학습결과를 나타낸 아이들에게 시상하는데도 상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이들이, 새롭거나, 귀엽거나, 희한하거나, 창의적이거나, 합리적이거나, 제각기 특징적인 생각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그런 생각을 아무도 언급해주지 않을 때, 저는 화가 나고 그 아이에게는 참 미안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이 학교로 등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침에 저는 미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가장 부끄럽고 미안한 일입니다.


  더러 아이들의 어머니가 와서 아이와 함께 오가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표정에 답답하다는 느낌을 담고 있을 때, 저는 그 아이에게 너무도 미안합니다. 그 아이가 아직 그처럼 어리고 무구한데도 무엇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는가 싶고, 제가 분명 무엇을 잘못 가르쳐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자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아이가 다른 나라로 유학을 갔다는 걸 알게 되면, 저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아이에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미안함을 느낍니다.


  반장선거 같은 선발로도 미안한 점이 있고, 시험 때문에 미안한 점도 있고, 교육의 본질에 비추어 미안한 점도 있고, 미안한 일을 열거하려면 도저히 끝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섭섭한 점을 물으면 예상 외의 답변도 수없이 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저는 그 미안한 마음을 덜어보려고 여기에 이렇게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2007년 6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