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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1

어떻게 해야 논술을 잘 하게 할 수 있을까요 ⑵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53

 

 

 

 

 

어떻게 해야 논술을 잘 하게 할 수 있을까요 ⑵

- 정상적으로, 교육과정대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 -

 

 

 

 

요즘 '체험학습사진전'을 열고 있습니다. 4층 '갤러리' 앞 복도에 가시면 대상·금상·은상·동상을 받은 30여 점의 작품과 그 설명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눈에 띄는 작품이 많지만 보여드릴 수가 없으므로 설명문 한 편을 옮겨 쓰겠습니다.

 

 

 

라면 끓이기

 

성복초등학교 2∼2 김민서

 

오늘은 방학숙제 나만의 요리책으로 라면을 끓였다. 먼저 물을 끓이고 뜨거운 물을 조금 덜어서 덜은 물로 라면의 나쁜 기름을 씻은 다음 물이 다 끓으면 스프를 넣는다. 그다음에 씻은 라면을 끓은 물에 넣고 계란을 물에 풀어 넣고 5∼10분 정도를 기다리면 완성!

내가 라면을 끓이니까 조금 무서웠는데, 내가 엄마가 된 것 같았다.

 

 

 

금상을 받은 작품 중 하나인데 설명이 제일 잘 된 작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맨 왼쪽에 놓여 있어 이 작품을 선택했습니다. 차근차근 라면 끓이는 모습이 귀엽고도 어른스러운 데가 있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방법과 다른 점이 있어 다음에 이 방법으로 한번 끓여먹어 보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마음이 들도록 설명을 한 민서는 논술을 잘하겠구나 싶고, 어떤 아이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아이들의 글을 보면 웬만하면 모두 이와 같은 칭찬을 하고 싶은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파란편지> 52호에서는 '논술로 들끓는 사교육 시장'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세 살 배기에게 논술 공부를 시키는 건 모이도 먹지 말고 알부터 낳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모이 아니냐?"고 하시면, 정상적으로 가르치지 않고 그렇게 가르치니까 얼마든지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아이가 평균점수나 받는 '무정란'이 되고 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겠습니다.

 

"그럼, 정상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란 뭐냐?"고 하시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온갖 체험을 시켜주는 일, 남에게 내 생각을 알리기도 하고 남의 이야기를 해석하여 내 관점의 수준을 높여나갈 수 있는 토론의 장場을 만들어주는 일, 독서를 많이 하여 사고를 넓히는 일 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요령이나 피워 평균성적만 얻는 논술을 벗어나 독특하고 창의적인 논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쥐어짜지 말고 정상적으로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책 한 권 읽을 때마다 꼭꼭 "독후감상문을 써라" "책 내용에 따른 그림을 그려라" "퀴즈 풀어라"도 그렇지만 거기에 더하여 논술이라니, 여러분 같으면 책을 읽고 싶겠습니까? 넌더리가 날 텐데 무슨 재미로 읽겠습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의 책 읽기는 참으로 행복했지만, 그것은 독후감을 쓰지 않아도 될 때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아이들이라고 별다르겠습니까? 아이들은, 분명한 목표도 없이 고생스럽기만 한데도 부모님이 시키니까 학원에 가고, 억울한 면이 있어도 선생님이니까 따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행복한 책 읽기를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 책을 읽은 시간이 그리운 추억이 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아이들에게 맡겨 때로는 지은이와 책이름·출판사·출판 연도만 적을 수도 있고, 달랑 한 문장으로 된 느낌만 적을 수도 있고, 줄거리만 적을 수도 있고, 줄거리 몇 줄과 느낌 한 문장을 적을 수도 있고, 핵심 문장 혹은 문단 하나를 옮겨 적을 수도 있고, 더러 제법 무게 있는 독후감을 쓰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조건 독후감이라는 걸 쓰게 하여 글자 모양이 어떠니, 띄어쓰기·맞춤법이 틀리니 맞으니 해대니까 글 한 줄 쓰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그렇게 볶아대니 아이들이 무슨 수로 재미를 느끼겠습니까?

 

제 생각은, 초등학교 시절에는 우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게 하고, 읽게 하고, 또 생각하게 하고, 다른 아이나 선생님, 부모님과 의견을 나누어보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어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되고, 비로소 논술을 쓸 수 있는 기초적·기본적 능력으로서의 사고력이나 이해력, 자료수집능력, 창의력, 표현력을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물에 대한 깊은 흥미와 관심이야말로 사고력이나 창의력의 바탕이 되며, 체험을 시키고 책을 읽히고 토론을 시키는 것도 다 이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전략일 것입니다.

 

우리는 논술을 가르친다며 세 살 배기가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하게 하는 것은 범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논술을 중시하는 거야 세계적 경향이고 워낙 고전적이어서 당연한 학습과제가 되겠지만, 어느 날 '음악 한 곡 듣고 감상문 쓰기'를 대학입학시험 과제로 제시한다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담이지만 쉽게 읽히면서도 깊은 글을 쓰는 사람이 부럽고, 그런 글을 볼 때마다 '글의 위력이 이런 거구나' '나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다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글은 풍부한 체험을 하고 깊이 있게 생각하며 많이 읽은 사람이라야 쓸 수 있다는 데 대해 스스로 한계를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추석을 잘 보내십시오. 우리 아이들이 뜻깊은 체험을 하겠군요. 그만큼 자라겠지요.

 

 

2006년 9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