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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1

부모로서의 삶과 생각을 지금 자녀에게 알려줍시다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51

 

 

 

부모로서의 삶과 생각을 지금 자녀에게 알려줍시다

- 특별히 6학년 학부모님들께 -

 

 

 

저의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마흔 여덟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7남매를 낳았고, 얼굴을 보려면 집으로 가기보다는 밭에 나가 콩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찾아가는 것이 쉬운 분이었습니다. 겨우 한글을 읽기는 했지만 평생 손에 책을 든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제가 집에 없을 때 '이게 내 아들이 읽는 책이구나' 하고 쓰다듬어보기는 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제 몇 가지 일화만 떠오르게 되었으나, 힘들 때마다 60을 넘긴 이 나이에도 가만히 "엄마" 하고 불러보고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 떠나게 되면 맨 처음 그분을 찾아볼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분이었는데, 그럴듯한 내용은 무엇이든 한번 들으면 차곡차곡 기억해두었다가 저를 나무랄 때마다 하나씩 인용하였습니다. 그분은 유달리 저를 자주 꾸짖었기 때문에 주눅이 들어 키조차 자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10여 년 간 온갖 병으로 수없이 병원을 드나들었고, 좀 남긴 농토는 제가 그 뒤처리를 하고 보니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지만, 저는 오늘까지 남에게 칭찬 한번 듣지 못하고 덕지덕지 비난만 들으며 사는 불효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출신 성분은 참 보잘것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집안 내력을 찾아서 위로 또 위로 가물가물하게 거슬러올라가 보아도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아 생활한 미관말직 하나 찾을 수가 없고, 그렇게 약 500년을 헤아리면 드디어 관리로 살다간 분들을 찾을 수 있으니, 조선왕조실록 사초에 세조의 즉위를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함으로써 1498년(연산군 4년), 저 유명한 무오사화가 일어나 능지처참의 극형을 당한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 할아버지나, 그분의 조카로서 역시 그 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겨우 풀려나기는 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 때 또다시 관직을 박탈당한 김대유金大有 할아버지가 바로 그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들 이후 500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에 제 조상들은 농사일 이외에 한번도 직업을 바꾸지 않고 살았으며, 제 선친 또한 윗대의 어른들보다 하나도 더 나은 것 없는 세상을 살다간 것입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저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분들이 바로 그 선친先親과 선비先妣 두 분입니다. 그분들이 저를 골탕 먹이려고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이 일 저 일 저를 못살게 군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 없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저는 그분들이 두고두고 그립고 안타깝고 송구스러울 뿐이며, 저도 그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 때 덜 부끄러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생각해보아도, 제가 건강하고 편안하게 지내기를, 그분들만큼 애타게 기원한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입니다.

 

더불어, 참으로 신기한 것은, 진정으로 남아 있는 기억이나 추억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일들이라는 점입니다. 그 시절에 그분들과 함께 했던 일들이나 그분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가슴 저 깊은 곳에 자리잡아 그것이 책에서는 읽을 수 없는 교훈이 되고 뼛속까지 사무치는 정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기야, 그런 일, 그런 이야기도 어렸을 때라야 먹혀들지 좀 자라면 함께 하는 시간을 좋아하지도 않고 눈치나 살피게 되며, 도움이 될 이야기도 귀찮아하여 '또, 저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제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기 전에 우리가 겪었던 일들, 어려웠던 일들, 꿈으로만 남긴 일들, 두 분이 만나 사랑한 일들, 그렇게 살아오면서 잊지 못하고 있는 일들을, 지금은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이 아이들에게 전해주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안하면, '내가 살아온 것은 이 아이에게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의 남루하기 이를 데 없는 사례까지 들어 이야기하였으므로, 여러분께서도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어 보시면 제 생각에 동의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놈이 더 크면 이야기해주리라' 생각하신다면, 그때는 이미 늦다는 것을, 그때의 이 아이들은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으려는 자세를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부모님들의 그 이야기를, 저는 6학년 아이들에게 <부모님 자서전 쓰기>라는 과제로 제시했습니다. 두 분 중 한 분이 언제, 시간을 좀 내셔서 차근차근 가슴속에 묻어두고 계신 그 일화들 중 몇 가지를 골라 들려주시면, 우리 아이들은 그 일화를 나름대로 기록한 다음, 부모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 명심해야 할 점, 앞으로 노력해야 할 점 같은 것들을 덧붙여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기록으로 간직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그 기록들을 하나하나 읽어보고 멋있는 한 권의 책을 만들어줄 계획입니다. 소박한 대로,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어떤 내용이든 하나하나 주옥같은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부모님의 생애만큼 특별한 이야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모님만큼 특별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협조를 간곡한 마음으로 기대합니다.

 

 

2006년 9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