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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1

논술지도는 누가 언제 해야 하는가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논술지도는 누가 언제 해야 하는가

 

 

 

「교수들이 고교 논술지도」, 이런 제목의 기사를 보셨습니까? 지난 5월 8일, 서울지역 대학교 입학처장들이 그렇게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무슨 근거로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이 아니면 아무나 교실에 들어가 가르쳐도 되는 건 아닙니다. 대학처럼 그 학교의 필요에 의한 요청과 일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사를 읽어보면 전국 1200여 일반계 고등학교 논술 담당 교사들을 대상으로 논술 지도 연수를 시킨다는 내용만 보이지만, 기사 제목이나 "일선교사 상당수가 학원강사를 불러다 논술교육을 하는 실정"이라는 인터뷰 내용을 보면 교수들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려는 계획이 아닌지 걱정스러워서 하는 말입니다. 논술(論述)이 뭐 별거겠습니까. 글을 쓸 주제에 관한 정보를 자신의 관점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논리적, 창의적 대안을 진술한 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힘은 단시간에 붙을 수 있거나 어디 귀신같이 가르치는 학원에만 좀 다니면 당장 얻을 수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말하자면 결코 쉽게 체득할 수 있는 능력(힘)은 아니지만, 그러므로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지도하고 공부하면 그처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잘 쓸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유명한 프랑스 대학입학자격시험 바칼로레아에서도 수학·철학처럼 논리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교과의 성적이 좋아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며, 가령 국어(불어) 수업에서도 리포트를 요구할 때가 많은데, 예를 들어 고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한 달간 에밀 졸라의 작품을 3권 이상 읽고 그 작품 세계에 나타나 있는 시대상황과 사회·경제·정치적인 역학관계를 분석하라는 식이랍니다. 이런 식이면 국어 한 과목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한 달간 학생들이 받는 고통은 사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을 준비할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며, 그처럼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만큼 창조성이 높아질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최병권·이정옥 엮음, 2003,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 바칼로레아의 예리한 질문과 놀라운 답변들』의 머리말, 휴머니스트).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한 학자는 국어(불어) 수업의 경우 읽고 요약, 비판하는 것이 주가 되는데, 이 수업과 관련해 추천된 책은 100권이 넘었다고 하면서 이 수업의 핵심은 독서력의 향상과 인생관의 정립이므로 오랜 기간 연습과 체계적인 사고, 독서 경험 없이 단 1년 간의 공부로 철학사를 관통하는 심오한 질문들에 답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위 책의 프롤로그).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 분야에서 리더가 될 자질을 갖춘 학생을 선발한다는 하버드는 다른 대학들처럼 입학 지원자들의 에세이(자기 소개서 application essay)를 심사합니다. 에세이는 그 글을 쓴 사람의 인생관을 알 수 있고 남에게 자기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좋은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대학도 정원이 있으므로 각 고등학교에서 전교 일등을 하는 학생도 입학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을 수 없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이 입학 지원 에세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문력, 창의력, 독창성을 중시한답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치원 때부터 Show and Tell이란 시간을 통해 자기 물건이나 가족 사진을 가져와 친구들에게 내용을 설명한 다음 다른 아이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훈련을 받기 시작한답니다. 말하자면 그만큼 자기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글과 말로 표현하는 훈련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The Harvard Crimson 엮음·민선식 옮김, 『하버드 대학생들의 생각과 자기표현은 어떻게 다를까?』, 조선일보사, 2003). 그런데도 우리는 공부든 무엇이든 새로운 것만 시작한다고 하면 '저건 어떤 방법으로 해야 순식간에 남보다 앞설 수 있나?'만 생각하게 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 전 노스웨스턴 대학에 합격한 우리나라 어느 고등학생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더니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키가 작은 제가 친구들과 축구경기를 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썼어요. 처음에는 키가 작은 것이 큰 단점이었는데 대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어 축구를 잘 할 수 있었다고 썼죠. 인생에 있어서 한 개인의 단점이나 결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말로 결론을 맺었어요."


우리 학교는 여러 교과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설명하거나 글로 나타내는 공부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또, 현장학습(아직도 '소풍'이라고 생각하는 학부모도 계시는 그 학습)을 가거나 단체활동을 하거나 학교행사를 하면 거의 매번 보고서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탐구박사제'라는 이름의 1인 1연구도 마찬가집니다. 선생님들은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다 논리적, 체계적, 창의적 사고와 정리, 보고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공부도 단계를 밟아 점차 그 수준을 높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령 "단 시간의 족집게 과외교습으로 우리 아이가 영웅이 되었어요"란 표현은 성립될 수 없지 않습니까('꾸준히' 과외를 받겠다면 할 말은 없지만). 우리 축구대표팀 엔트리 발표 때 어느 기자가 아드보카드 감독에게 "실망하고 있는 탈락자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없느냐?"고 묻자 그는 싸늘하게 답했답니다. "나는 그들이 왜 실망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실력을 보여줬어야 한다. 그것이 축구이며 인생이다."

 

 

2006년 6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