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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1

아이들의 생각, 어른들의 생각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초등학교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아이들의 생각, 어른들의 생각

 

 

 

우리 아이들이 겨울철에 들어 불조심을 하자는 포스터 그린 걸 구경해 보셨습니까? 지금도 복도나 현관 이곳저곳에 붙어 있습니다. 제가 이 편지를 통하여 그대로 다 보여드릴 수는 없고, 그 중 몇 장의 포스터들이 담고 있는 생각(표어 ; 경구)이라도 옮겨 보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저 유명한 "자나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같은 것들과 비교하면서 보십시오.

 

·우리들의 소중한 재산이 타고 있어요
·미정이 집 정미네 집 불조심!
·라이터로 장난하지 맙시다
·약한 ♧(불꽃 모양 그림)도 꼭 끄자
·꺅! 지구가 불났다
·서로서로 불조심
·작은 불씨 지옥 만든다
·자고 있는 순간도 생명 위협한다
·불, 번지는 데 5분, 끄는 데 1시간
·작은 불씨 큰 산 하나 없앤다
·자연이 타면 사람도 불탄다
·살고 싶으면 불을 끄자
·방심 속에 위험한 생명
·산불은 순식간에
·장난삼아 한 불장난 산의 생명 없앤다
·FIRE WARNING!!
·내 재산 내 생명 내가 지키자 조심하자
·불씨라도 조심! 불씨가 불러온 환경 파괴, 불씨라도 없애자
·재미로 한 장난 평생 후회한다 …….

 

어떻습니까, "자나깨나 불조심"이나 "꺼진 불도 다시 보자" 혹은 "○월은 불조심 강조의 달"처럼 우리가 늘 보던 표어에 비해 마음에 와 닿는 강도가 떨어집니까?


아이들은, 우리가 사물을 개념화, 추상화하여 보는데 비해 이처럼 구체적, 실제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른들은 이것저것 생각하며 자신의 실제를 나타내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아이들은 단순하게 혹은 순수하게 그 사실 자체만을 생각하므로 사실은 아이들의 생각이 진짜라고나 할까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사람은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드리우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라고 했는데(라이너 마리아 릴케·김재혁 옮김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문학과의식, 2001, 20쪽), 이러한 생각은 아이들에게는 글을 쓸 때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 적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이들의 생각에서 자주 발견의 기쁨을 느끼게 되고, 아이들의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긴장을 느끼거나 잔잔한 미소를 짓게 됩니다. 아이들은 웬만하면 그들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생각을 드러내고 그 생각으로 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의 이러한 관점이 제대로 보존되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공교육위원회 의장이 되어 새로운 고등교육 방식을 정한 사람은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 철학자 콩도르세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다니바나 다카시·이정환 옮김,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청어람미디어, 2003, 71∼72쪽)


그렇다면, 우리가 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친다면, 이 아이들이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힘들고 어렵고 고생스러워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단순하거나 순수할 때는 그 생각과 말에 귀를 기울입시다.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꾸중을 할 생각을 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라고 하거나, "나를 봐라!"라며 우리를 추종하는 아이를 만들지 맙시다. 기다려 봅시다. 아이들의 그 생각, 그 말은 우리 아이들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의 뿌리에서 우러나온 생각이고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아이들로 하여금 남들처럼 생각하게 하고, 남들처럼 말하게 하고, 나처럼 생각하게 하고, 나처럼 말하도록 만들어버리고 나면 우리의 희망은 이제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무슨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세상을 만들어 줄 수도 없으며 만들어줄 필요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그린 불조심 포스터들을 우리끼리만 보고말기가 안타까워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나저나 늘 불을 조심하며 지냅시다.

 

 

 

2005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