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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전근 축하 전보와 편지

by 답설재 2007. 10. 4.

 

 

 

근무처를 옮기면 전근인데, 사람들은 일단 이를 '영전'으로 표현하며 전근이라든가 좌천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번에 내가 전근 왔을 때도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를 하거나 화분을 보내거나 전보나 편지를 보내준 분들이 있었습니다.

 

직접 방문한 사람을 영접하거나 화분을 받거나 전화를 받는 경우에는 대체로 반갑고 고마운 느낌이 드는 것은 물론이지만, 유독 축전이나 편지를 받으면 일단 고마워하면서도 그 짧은 문장이나 문양을 분석하게 되는 것이 버릇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이미 정해 놓은 문안 중에서 고르고 전보의 값에 따라 고급이나 중급의 문양을 정하는데 뭘 분석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그 단순함 속에도 보내는 사람의 정성과 성의가 담겨 있으니 분석 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편지 형식의 축하 서신인 경우에는 대체로 이미 정해진 문구의 전보를 받는 경우보다 정성이 깃든 것이므로 받는 사람이 당연히 '정성어린 서신이구나!'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먼저, '영전' 축하 문안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두 열한 가지입니다.

 

1. 너무 멋지신 거 아녜요? 영전 축하드립니다.

(나는 이 문안의 전보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신세대 취향의 문안이라서 그런 걸까요? 간지럽습니다.)

 

2. 영전을 진심으로 축하하오며 더욱 발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흔히 받아볼 수 있는 문안입니다. 다만, 내게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3. 영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좀 단조롭기 때문일까요? 말하자면 단조로워서 성의가 없어 보인다고 생각되는 문안일까요? 그렇지만 앞으로 나는 이 문안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해두었습니다. 간결하니까요. 사실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입장을 고려하여 내가 생각한 문안을 적어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4. 영전을 축하드리며 앞날에 더 큰 성공을 기원합니다.

(역시 흔히 받아볼 수 있는 문안입니다. 글쎄요, 내가 어떻게 해야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을까요. 교장으로서 다른 학교로 전근하는 것이 성공이기나 할까요? 위의 예 2와 비슷한 문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받아본 적 없는 문안입니다. '주인공'이니 하는 것이 좀 '닭살'이고, 너무 치켜세우는 느낌을 주는 걸까요?)

 

6. 영전을 축하하며 앞날의 발전과 행운을 빕니다.

(무난하여 흔히 받아볼 수 있는 문안입니다.)

 

7. 영전을 축하하오며 높으신 뜻 새로이 펼치시기 바랍니다.

(흔히 받아볼 수 있는 문안입니다. '이 사람이 내 뜻이 높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이 사람은 내가 그 뜻을 새로 펼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지 알고 있으며, 그러나 그렇게 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일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8. 영전을 축하하오며 더 큰 영광 있기를 기원합니다.

(역시 흔히 받아보는 문안입니다.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과연 내게 더 큰 영광이 남아 있을까,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9. 영전을 축하하오며 성공과 건투를 기원합니다.

(받아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문안입니다. '성공'이나 '건투'라는 용어가 우리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교장으로서, 혹은 교사로서 성공적으로 근무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으며, 성공적으로 근무하려면 '건투'가 필요할 것입니다. '건투'라는 용어가 투쟁적입니까? 사전을 보면 "씩씩하게 싸움"도 있지만 "씩씩하게 잘해 나감"도 있으니 괜찮은 것 같습니다.)

 

10. 영전의 기쁨을 함께하며 앞날의 발전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더러 받아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문안입니다. 무난하기 때문일까요? 굳이 따진다면 '함께하며' 같은 용어는 부담스러운 경우가 없지 않으나 그런 경우라면 축전을 보내지도 않겠지요.)

 

11. 창의와 노력으로 이루신 영전의 기쁨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받아본 적 없는 문안입니다. '창의' '노력', 이런 단어가 눈에 거슬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일까요?)

 

이런 문안은 어떻습니까?

"교장선생님.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더욱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 보낸 전보지만 무난한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건강이 자신의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남이 보면 '닭살'일지 몰라도 그는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므로 사람(입장)에 따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참 정성어린 서신이구나.'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여 '이 사람이 나를 뭘로 보나.''자신도 교장이라고 이제 나와 맞먹자는 건가.' '내가 자리를 옮긴 것을 대단한 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자신은 벌써 그 대단한 자리에 있다는 걸 과시하는 건가.' 싶은 서신의 예를 소개하겠습니다.

물론 받아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를 것은 물론이므로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 편지를 받고 언짢아지는 이유는, 예를 들면 흔히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한 시 한 편, 혹은 짤막한 글을 인용했거나 자신이 직접 창작한 문안의 편지를 여러 장 복사하여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두루 보내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편지의 예를 다 보여드리기는 어렵고 부분적으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번에 귀하께서 승진(영전)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

(수고스럽더라도 승진한 사람에게는 '승진', 전근한 사람에게는 '영전'이라고 바꾸어 인쇄(출력)하는 성의라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바쁘다면 아예 편지를 보내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 ○○도의 학생들은 소중합니다. ……. 멋진 리더십과 철저한 성품으로 …… 사랑으로 가르치고 이끌어갈 ……."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나로서는 그 이유를 구태여 설명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떤 경우로 교장이 되었든 이 정도는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건방지게 혹은 주제넘게 그걸 인식시키려고 한 그런 편지입니다.)

 

"오랜 기다림으로 애태웠던 그 긴 시간들을 ……."

(오랜 기다림이라니요. 나는 자신이 이제 나이가 들었으므로 교장을 하라고 했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만한 내 경력이나 전문성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착각입니까? 그러나 '기필코 교장을 한번 해야겠다' 혹은 '전근을 가야하겠다'고 오랜 시간 그렇게 애를 태워 기다리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게 애태운다고 됩니까? 애를 태운다고 교장 시켜주거나 전근시켜주면 되겠습니까? 나는 교사에서 전문직으로, 전문직에서 교감으로, 교감에서 다시 전문직으로, 전문직에서 다시 교장으로 전직만 해왔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승진을 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애를 태워야 되는 건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나에게 - 본인은 어떻게 하여 교장이 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 마치 교장을 하기 위해 불철주야 애를 태우고 그렇게 한 걸로 말씀하시면 나로서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내가 뭘 잘 몰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살면 삶이란 것이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 그런 생각도 좀 합니다.)

 

내가 참 어처구니없는 글을 썼습니까? 까다롭습니까? 그러나 나는 상대방이 맞춤법도 다 틀리고 앞뒤도 맞지 않는 비문(非文)으로 된 편지나 메일, 문자 메시지를 보냈을 때 오히려 더 깊은 정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참 솔직하게 표현했구나.'

그러면 다 된 것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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