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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노老 교사의 힘

by 답설재 2007. 10. 1.

사진 2019.1.22(덧붙인 날짜 2021.1.29)

 

 

지난 9월 13일은 부산한 하루였습니다. 그날 오후에는 3학년에서 학부모님들을 초청하여 수업을 공개하는 날이었고, 오후 4시에는 한국교과서연구재단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회의는 1년에 세 번 발행하는 저널「교과서연구」편집기획위원회로, 내가 위원장이기 때문에 결석을 하기는 어려워도 내 형편에 맞춰 날짜를 정할 수는 있었는데, 사전에 학교의 주요 업무와 대조하여 일정을 조정하는 데 소홀하여 이미 확정해준 날짜여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개최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곳에 갔었다는 것을 누가 기억해줄는지 모르지만, 오전에는 한덕종 교감선생님과 이웃 오남중학교 식당 개관식에 가서 우리 오남읍을 중심으로 한 구리․남양주의 여러 기관 인사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점심식사까지 같이하고 학교로 들어왔습니다. 이어서 오후 1시에는 ‘미래관’에서 3학년 학부모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우리 학교 교육을 어떻게 전개하고 싶은지에 대해 40분간 말씀을 드렸는데, 마음이 조급해서인지 멋진 강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기야 날이 갈수록 멋있게 보여야 하고 이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이 가장 멋있는 일이므로 처음부터 멋지게 보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벌써 2시가 넘었으므로, 3학년 각 교실을 잠깐씩만 둘러보고 곧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각 교실에는 ‘미래관’에서 내 말씀을 듣고 내려온 학부모들이 10여 명씩 들어가 계셨고, 벌써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들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공부를 하게 되었으므로 어느 교실에서나 아이들은 다소 흥분되어 있었고, 선생님들께서도 당연히 긴장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내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제대로 지켜볼 수 없게 된 점이 미안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어느 연로하신 선생님의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시詩를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는 국어 시간이었는데,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아이를 불러내어 차례로 발표를 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내가 들어섰을 때, 선생님께서 마침 또 한 아이를 지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아이는 좀처럼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보다는 젊으시지만(선생님께서는 올해 54세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교사로서는 적은 연령이 아니므로 내가 그 수업을 다른 반에서보다 더 오래 지켜보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상황이 어떻게 해결될는지 궁금하여 도저히 그 교실을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여러 번 독촉하면서도 결코 당황하거나 그 아이가 안절부절못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다려주었고, 따뜻한 음성으로 용기를 내라고만 했습니다. 드디어 어머님 중에서도 그 아이에게 “화이팅!”을 외쳐주는 분이 있었고, 더러 다른 아이들도 그 아이의 용기를 북돋워주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짐작으로 5분은 흘러갔을 때 드디어 그 아이가 일어섰습니다. 나는 단호한 자세로 일어서는 그 아이에게 마음속으로 깊은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교실을 나섰습니다. 사실은 그 선생님의 기다림, 그 깊은 마음에 보낸 박수였습니다. 그 아이의 발표 내용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생님께서 그날 그 아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아이는 또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늘 뒤로 빠지며 지내다가 언젠가 그보다 더 큰 곤혹스러움을 겪어야만 - 결국은 그런 경험을 해보아야만 - 용기를 내야 할 일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두려움이나 수치심 같은 걸 이기며 일어선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대체로 그렇게 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날 그 아이는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시 감상법도 중요하지만, 왜 용기가 필요하고, 왜 용기가 중요한지,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그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선생님께서 기다려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 선생님께서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하루가 다르게 각종 교육용 기자재가 풍부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실은 그런 면에서는 세계적으로도 결코 손색이 없으며, 선생님들의 교육용 기자재를 다루는 솜씨도 좋아서 그런 걸 사용할 줄 모르는 선생님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조잡한 그림이 그려진 괘도나 그림연극 틀, 환등기 등이 고작이었는데 그 환등기조차 걸핏하면 전구가 나가서 - 그러면 교장에게 미안하기 때문에 - 좀 사용해보려고 하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은 사용할만한 기자재가 너무 많아서 아무리 좋은 교수자료라도 선생님들의 마음에 들어야 선택될 수 있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에도 폐단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선생님은 그런 기기를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여 아이들이 생각할 겨를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문제에 대해 5분간 생각해보라고 하고는 프로젝션 TV 화면에 재깍재깍 초침이 움직여 4분 59초, 4분 58초, 4분 57초…… 시간이 흐르는 긴박한 모습을 보여주니 누가 제대로 생각에 잠길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장면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기계나 컴퓨터 같은 것에 너무 의존하는 수업은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편리해보이지만, 그렇게 기계적, 표피적이고 아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배려가 소홀해지기 쉬운 수업이 사고력, 창의력을 잘 조장시킬 것이라는 가정은 아예 성립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공부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계획에 따라 읽고, 생각하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요?

 

나는 아직 그 연로하신 선생님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학교의 이곳저곳을 오다가다 몇 번 만났을 뿐이며 그럴 때 그냥 의례적인 눈인사만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날 그 인자하고 느긋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대하시던 그 선생님의 모습, 그 교육관에 대해 저는 한없는 신뢰를 느낍니다. 누가 나이든 교사를 꺼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