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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연주회 풍경과 교실 풍경

by 답설재 2007. 10. 22.

1990년대에 오스트레일리아에 갔을 때였습니다. ‘한국바로알리기’라는 거창한 이름의 사업 때문에 출장을 갔는데, 몇몇 기관을 방문하자 일이 끝났고 다시 시드니로 들어가 관광을 하게 되었는데 그 코스의 하나로 오페라하우스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네 명이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파운데이션’이라는 기관에서 나온 분이 제공한 티켓의 좌석을 찾아갔더니 3층인가의 맨 뒤쪽이었고, 무대는 그야말로 가물가물해 보여서 처음부터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좌석에 앉아서도 객석의 매너를 지켜야 하는지 의문이었고, 하루 종일 일정이 빡빡하여 피곤하기도 해서 곧 졸음을 참지 못할 지경이 되었으므로 조용히 그 유명하다는 오페라하우스를 나와 텅 빈 거리를 혼자서 쏘다니다 호텔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신문을 보면 무슨 음악회 후에는 꼭 객석 매너에 대한 음악 전문가의 평가가 실립니다. 그리고 그 평가는 천편일률적으로 관객을 꾸중하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곡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식해서 중간에 박수를 한 사람이 있었다느니 껌을 씹거나 핸드폰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느니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떠들게 했다느니 하는 내용입니다.

또 한 가지 평가가 있다면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으로 대성황이었다거나 기립박수가 이어져 연주자들이 행복했다거나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최근에 읽어본 기사 중에는 “숨죽일 땐 숨죽이고 열광할 땐 열광해야 한다. 무대와 객석이 서로 완전하게 교감하는 그것이 말 그대로 살아있는 ‘라이브’다”라는 표현도 있었습니다(조선일보, 2007. 10. 17, 29면).

나는 늘 이와 같은 두 가지 내용을 분석해보면서 잘못한 건 관객 책임이고, 관객은 일단 객석을 가득 메우고 기립박수를 하고 열광해야 할 의무나 책임을 지고 있는 ‘박수부대’ 취급을 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숨죽일 땐 숨죽이고 열광할 땐 열광하라니요. 음악 감상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까? 그날 그 시간에 그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은 모두 같은 정서를 지녀야 하고 같은 느낌을 가져서 숨죽이고 열광하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 어불성설이 아닙니까? 예술은 그런 것입니까?

 

나는 나이가 들고 교장이 되었기 때문에 더러 교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하러 다닙니다. 그럴 때 살펴보면 어떤 연수회장은 눈빛이 빛나는 젊은 교원들이 대부분일 때도 있어 ‘오늘은 할만하다’는 느낌으로 시작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드문드문 ‘또 그런 소리를 늘어놓겠지’ 하는 표정으로 처음부터 눈을 지그시 감고 있거나 ‘할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집에서 소파에 반쯤 누워 텔레비전의 연속극을 보는듯한 태도를 보이는 교원이 여러 명인 분위기에서 강의를 시작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다른 강사는 그럴 때 어떤 방법으로 강의를 시작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나는 그렇습니다. 한번도 “당신네들 중에는 강의를 들을 자세가 충분하지 못한 분이 있다.”는 발언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말로 그날의 강의를 시작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끝장’이므로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겠지요. 강의내용을 재미있게 풀어 가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저절로 똑바로 앉게 되며 청강에 열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아이들을 잡아놓아야 제대로 수업을 해나갈 수 있다는 교사가 요즘도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수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어린 것들을 앉혀놓고 내 가르침에 당연히 숨죽여야 할 때는 숨죽이고 열광해야 할 때는 열광하라는 마음가짐으로 아이들을 대한다면 한마디로 ‘한심한’ 교사가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 교사를 어떻게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수업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교사가 전개하는 하나의 ‘종합예술’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어떤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수업인데도 그 과정에서 하나하나의 활동이 술술 풀려나가고 그리하여 아이들은 수업내용을 아주 잘 파악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시간 각고의 노력으로 계획을 세운 수업이었는데도 그 과정에 차질이 생기고 교사가 우왕좌왕하여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무슨 활동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는 ‘죽을 쑤는’ 수업이 되고 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들 교사는 자신의 수업기술을 반성하고 평가해야 하며, 아이들 때문에 수업을 망쳤다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연주를 하겠다는 마음가짐 없이 무대에 서는 음악가는 없겠지만 때로는 그들을 대변하는(?) 입장의 비평가가 무조건 100%짜리 관객의 의무를 요구하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려운 횡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 교육자들은 그런 횡포를 저지르지 않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