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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엄마, 바보야!" "선생님, 바보야!"

by 답설재 2007. 10. 24.

지난 10월 22일 월요일 저녁, 퇴근하여 식사를 하면서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닥터스」라는 MBC 의학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데 보신 적 있습니까?

 

갑자기 네댓 살쯤인 아이가 병실 침대 위에서 울부짖었습니다. “엄마, 바보야!” 뺑소니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쳤는데, 응급실의 젊은 당직의사가 한 말은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봐서는 두피가 벗겨지고 피가 흐르는 정도지만, 걱정스러운 것은 뇌일혈인지 아닌지 하루 정도 두고 봐야 하겠습니다.”

 

“엄마, 바보야!” 그 외침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고, 그 어린애가 가엾기 짝이 없었습니다. ‘저 어린 것이…….’

 

그 애는 제 엄마를 왜 ‘바보’라고 했을까요? “왜 뺑소니를 못 잡나?” 그런 뜻이었을까요? 아니면, “왜 나를 방치하여 이렇게 되도록 했나?” 혹은 “왜 하필 이런 내 모습을 텔레비전에 나오게 하나? 방송국 돈(좀 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치료 못하나?”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왜 이렇게 아픈데도 어쩔 수가 없나! 엄마는 모든 걸 다 해결해 주는 사람 아니냐. 엄마이니까.” 그런 뜻이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다만, “엄마, 바보야!” 그 부르짖음 속의 ‘엄마’라는 단어의 무게는 그 아이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무거운, 그렇게 표현해 봐도 아무래도 이상하고 차라리 가볍고, 그래서 도저히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군요.

 

다행히 하루가 지난 후의 CT 촬영 결과를 본 그 의사가 다른 이상은 없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만약, “엄마, 바보야!” 하고 부르짖었을 때의 그 지각력과 이성이 그 아이에게서 영영 사라지게 되었다면, 그 외침은 얼마나 가슴 아프고 기막힌 일이겠습니까.

 

나는, 주제넘지만, 내가 만약 우리 양지 아이들에게 그 엄마와 같은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이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거액의 돈도, 서울과 수도권 사람들이 다 선망하는 어떤 아파트 한 채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높은 직위도 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선생님, 바보야!

 

여러분, 내가 그런 교사, 그런 교장이 되는 건 불가능할까요? 아무래도 그렇다면, 불가능하다면, 좀 물러서서 다시 질문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사는 아니라고 해주실 수 있습니까? 아이들보다 먼저 태어나 먼저 배운 것뿐인데도, 더구나 이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위대한 인물이 될지 아직 아무도 모르는데도- 어렸을 때 학교에서 온갖 구박을 받은 아이가 위대한 인물로 성장한 경우가 세계적으로 얼마든지 있는데도. 설령 그런 인물이 아니라 해도 이 사회의 일원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무슨 대단한 자리에 있는 양 군림君臨하는 교사, 교사가 진정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 채 그냥 일반 직장의 봉급쟁이와 다른 점이 없는 하나의 봉급쟁이인 줄만 아는 교사, 기이한 생각, 창의적인 생각의 싹은 여지없이 자르고 덧셈뺄셈을 가르치는 데만 혈안이 되어 그 아름다운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치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습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삼엄한 분위기로 몰아넣는 교사, 인간은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개인별 단점이 쉽게 발견된 아이를 주눅 들게 하는 교사, ……, 무엇보다 제 아이를 그렇게 다루면 좋아하겠는지 스스로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 그런 교사만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꿈에라도 한번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 바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