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남양주양지초등학교 오시는 길

by 답설재 2007. 10. 29.

 

 

 

큰길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도에서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를 찾아보고, 서울의 동쪽 포천․철원․화천 방향,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이런저런 일로 가보시는 일동이나 광릉수목원, 산정호수로 나가는 47번 국도를 달리다가 진접읍 장현에서 오남이라는 이정표를 보시고 우회전하여 우리 학교를 찾아오시면 참 쉽습니다. 더구나 오남 초입의 왼쪽으로 읍사무소가 있고, 바로 그 뒤에 우리 학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남양주 IC를 자주 드나들고 있으므로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서울외곽순환도로 남양주 IC를 나오거나(우측으로 붙어야 좋고 삼거리에서 끼어들 때 버스를 조심하십시오.) 구리 시가지에서 춘천 가는 46번 국도를 달리면 전철 도농역 앞을 지나게 됩니다. 이어서 구리남양주교육청․남양주제2청사․경찰서 앞이고 그곳에 ‘도농삼거리’가 있습니다.

 

도농삼거리는 춘천․양구․마석 방향과 덕소․양평․정약용기념관 방향으로 갈리는 곳으로 이곳에서는 좌회전을 해야 합니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간선도로의 끝부분인 육교 아래로 내리막길을 지나 들판을 달리다보면 ‘문화원삼거리’, ‘금곡역앞삼거리’를 지나게 됩니다. 저는 그 길로 해를 넘기며 출퇴근했지만 금곡역을 지나는 열차를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이 시골역은 이제 사용되지 않고 흔적만 남은 역인가 싶었고, 신문에서 본 적도 없는데 언제 그렇게 되었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도를 보면 지금도 경춘선이 지나는 역이 분명합니다.

 

금곡역앞삼거리에서는 진건․사릉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면 됩니다. 그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곧 시청이 나타나고, 마석․춘천․양구로 나갈 수 있으며, 우회전을 하면 큰길가의 홍릉(洪陵)․유릉(裕陵)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사실은 네 방향으로 되어 있으니 ‘삼거리’라고 이름붙인 것은 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좌회전을 놓치면 목화웨딩홀 앞을 지나 저 앞의 육교 아래에서 다시 한 번 좌회전할 기회가 있습니다.

 

홍릉․유릉은 구경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설명해주는 이도 없어 휴일에 찾아가도 혼자 돌아다니며 둘러보기 일쑤입니다. 잔디밭이 좋기 때문에 그곳에서 음식물을 먹고 있는 가족들이 오히려 반갑기도 한 사적입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모신 홍릉과 순종황후(純宗皇后)와 순명황후(純明皇后), 계후 순정황후(純貞皇后)를 모신 유릉이 함께 있어서 사람들이 흔히 ‘홍유릉’이라고도 합니다. 넓은 잔디밭과 새로 조성되고 있는 연못을 보며 들어가면 왼쪽에 홍릉, 오른쪽에 유릉이 있습니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홍살문, 신위를 봉안한 침전, 침전 앞에 세워진 석물들이 한꺼번에 보이고 침전 뒤로 돌아가면 능이 보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홍릉이나 유릉이 비슷합니다. 삭풍처럼 몰려오는 외세 앞에서 불의에 목숨을 잃은 명성황후(1895년, 을미사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되었으나 1905년에 일제의 강요로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1907년에 강제 퇴위를 당하여 1910년 한일합방을 지켜본 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승하한 고종황제, 고종황제의 차남으로 태어나 1907년에 황위를 이어받았으나 사라져가는 왕조를 힘없이 지켜보고 1926년에 승하한 순종황제, 순종황제 즉위 이전에 춘추 33세로 승하한 순명황후, 계후가 되었다가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고 1966년 춘추 72세에 승하한 순정황후는 모두 얼마나 무거운 슬픔을 가슴에 담고 살았겠습니까.

 

저는 그 능을 돌아볼 때마다 쓸쓸함을 감출 길 없었고, 민주주의를 잘 발전시키고 있는 영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은 그러면서도 어떻게 그 역사를 잘 지켜나가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쓸데없는 소리라고 한다면, 우리가 나라를 잃게 된 내력을 알 수 있는 자료라도 전시하여 학생들이나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그 억울하고 서러운 역사를 배우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그렇습니다. 두 황제나 황후가 밉다 싶다가도 그 왕릉이 너무 쓸쓸하여 얼른 송구스런 느낌을 갖게 됩니다.

 

금곡역앞삼거리에서 진건․사릉 방향으로 좌회전하셨지요? 길이 좁고 복잡하여 잠깐 그 시가지를 벗어날 때까지는 마음 놓지 마십시오. 곧 한산한 2차선 도로입니다. 거기쯤에서는 클래식이나 팝송을 들려주는 FM 방송을 들으며 지난 날 우리가 다정하게 지냈던 사람들 중 한 명을 골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고 그리워하며 오실 수도 있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는 오른쪽으로 곧 송릉리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사릉 앞이 됩니다. 그런 표지판과 함께 곳곳에 저런 숲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소나무 숲도 볼 수 있습니다. 송릉리에는 광해군(光海君)의 능과 문성군부인 유씨의 능이 있다는데 부끄럽지만 아직도 들어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송릉리라는 지명은 광해군과 그 부인의 묘가 있는 곳이라는 뜻일 것 같습니다. 선조의 차남인 광해군은 역사책을 보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에 의병 모집, 군량 조달을 잘 했습니다. 왕이 되어서는 곧 전란피해복구정책을 전개했으며, 명나라가 후금(여진족)과 전쟁을 벌여 원병을 요청하자 그 명나라와의 오래된 신의도 지켜야 하겠고, 그러자니 강력한 세력을 가진 후금의 보복이 우려되어 1만 명을 파병하여 일부러 패하게 한 뒤 후금에 투항하는 절묘한 외교정책을 구사했습니다. 그는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을 복간하고, 허균의 홍길동전(洪吉童傳),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간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오를 무렵 형 임해군을 교동에 유폐하고, 한 신하의 허위진술을 믿고 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했습니다. 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했고, 자신을 지지하여 왕위를 차지하게 해주고 정권을 독점한 대북파에 대한 서인들의 불만이 터지는 등 그 실정이 빌미가 되어 잔치를 벌이고 곤히 잠든 어느 날 밤 조카 능양군을 앞세운 세력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는 경운궁에 억류되었다가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옮겨가서 왕위를 잃은 지 18년 만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문성군부인 유씨는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릉(思陵)은 참으로 한많은 여인,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분은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했습니다. 열다섯 살에 왕비가 되었으나, 2년 만에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고 다시 2년 뒤에는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사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헤어진 뒤로는 남편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청계천의 영도교는 그들이 헤어진 사연이 깃든 다리라고 합니다.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시녀들이 동냥을 하여 연명했다고 하며 춘추 82세에 승하했답니다. 단종이 묻힌 장릉(莊陵)이 영월에 있어 장릉을 사릉으로 옮기거나 사릉을 장릉으로 옮기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문화재는 그 곳에!”라는 주장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이제 길 안내가 아주 단순해졌습니다. 사릉 앞을 지나고 춘천․마석․양평으로 가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시작되는 사능IC를 지나면 곧 진건으로 직진하는 네거리에서 오남 방향으로 우회전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편도 1차선이므로 끼어들거나 추월할 수 없으므로 편한 마음이 됩니다. 다만 동물들이 죽지 않고 건너편 산으로 옮겨갈 수 있는 생태 이동 통로인 육교 아래를 지난 네거리에서 퇴계원으로 직진하지 말고 다시 오남으로 우회전하여 직진하는 차들 사이로 끼어들어야 합니다. 이곳에서부터는 완연한 시골 풍경이 전개됩니다. 우회전하자마자 왼쪽을 보시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6호 ‘대은변안렬묘역’ 표지판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대은大隱 변안렬邊安烈(1334~1390)은 고려 말의 무신武臣으로, 그 조부(邊順)가 원나라에 들어가 심양후瀋陽侯를 지냈고 부친이 이어받았는데, 변안렬은 병란으로 중국의 심양에 가 있던 공민왕을 따라 귀국했답니다. 변안렬의 묘에는 신도비 형식의 묘표가 있는데 비신에는 운문일월도雲紋日月圖와 달 속의 토끼가 방아를 찧는 모습, 해 속의 삼족오三足烏 그림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제 특별히 다른 길이 없으므로 앞의 차가 가는 대로 뒤따라 느릿느릿 두 번 고갯길을 넘게 됩니다. 첫 번째 고갯마루에서는 왼쪽으로 제73보병사단 이정표가 보이고, 두 번째 고개 마루에는 남양주장례식장이 보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옛날에 어의가 낙향하여 산 동네여서 ‘어남이’란 지명이 생기고 그 고개 이름도 ‘어남이고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이 장례식장에 올 수도 있겠구나.’ 생각해서인지 좀 을씨년스럽기도 한 고갯길입니다.

 

그 고갯길을 오르면 바로 저 아래편으로 오남읍이 보이고 좌회전하면 진접, 직진하면 오남이라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우리 학교는 그 고개에서 10시, 혹은 11시 방향으로 건너편 산기슭에 있습니다. 오남 읍내의 길을 직진하여 오남읍사무소 바로 뒤에 우리 학교가 있으므로 그 길을 이용하면 착오가 없지만, 저는 그 길이 복잡해보여서 진접으로 가는 새로 난 우회도로를 이용합니다. 그 우회도로 끝의 다리에서 우회전하여 아파트 공사장 앞 골목을 지나고 조그마한 글씨로 된 제일병원 간판(우측은 남양주 우리병원 응급실)이 보이는 골목으로 좌회전한 다음, 바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신호를 틈타 도로를 횡단하면 오른쪽으로는 읍사무소로 들어가는 길, 왼쪽으로는 양지초등학교와 오남중학교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익숙하지 않으면 우회도로 끝에서 길을 제대로 찾기가 어렵고 위험하기도 하여 처음 오시는 분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읍내를 관통하여 오시다가 읍사무소나 양지초등학교 이정표가 보이면 그곳에서 우회전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양지초등학교와 오남중학교로 들어오는 길에서도 또 한 번 주의해야 합니다. 양지초등학교는 그 길의 중간에서 오남성당으로 들어가는 분들과 함께 우회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입로 양편으로 채소나 옥수수, 고추 같은 작물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제 혼자서 오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거의 언제나 혼자 간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걸핏하면 그걸 잊고 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