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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그리운 숭례문, 그리운 서울남대문(Ⅰ)

by 답설재 2008. 2. 15.

  읍내의 중학교에 다닐 때는 하숙이나 자취를 하며 지냈으므로 방학이 되어야 그 시골집으로 돌아가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여름방학에는 농사일도 좀 도왔지만, 겨울이면 마땅히 즐길 거리도 없어 그런 날 밤에는 아이답지 않게 걸핏하면 이 집 저 집 사랑(舍廊)을 찾아다녔습니다.

 

  어른들 중에는 짚 몇 단을 들고 오는 분도 있었었습니다. 그런 분은 남들이 화투를 치거나 잡담을 할 때 새끼를 꼬면서 이야기에 끼어들고 화투를 치던 사람들이 마련하는 밤참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런 밤에 제가 그 사랑에 가서 어른들 틈에 끼어든 것은 그 분위기가 한없이 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른들의 잡담은 재미있었습니다. 어쩌다 서울을 다녀온 사람이 서울역에 내리니까 남대문이 빤히 보이더라고 하면 틀림없이 누군가가 나서서 서울역에서는 절대로 남대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그러면 당장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며 그 논란은 판단할 길도 없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남대문의 높이나 크기, 모양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덧붙여져 논란거리는 늘어나고 가본 사람보다 사진이나 본 사람이 더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어 논란이 이어질 만한 이유는 더욱더 많아지기 마련이었습니다.

 

  1989년 12월,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얘기가 좀 쑥스럽지만 지방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문교부 일을 하게 된 것이므로 당시의 그 기대감과 포부와 희망, 자부심과 긍지는 하늘을 찔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죽하면 오색영롱한 기구를 타고 훨훨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겠습니까.

  가족은 두고 우선 혼자 올라와 있었으므로 서울역은 눈감고도 돌아다닐 정도로 익숙했습니다. 그 서울역에 내려 택시를 타면 곧 남대문, -그때까지 우리는 “남대문, 남대문” 하다가 언젠가 남대문이 아니고 ‘숭례문(崇禮門)’이며 혹 ‘서울 남대문’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지요.- 아름답고 웅장한 그 건축물 옆을 지나게 되고, 그러면 곧 높고 늠름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 같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를 지나 해태상이 지키는 광화문 앞에서 유턴하여 정부종합청사(현 정부중앙청사)로 들어섰습니다.

  청사 현관에서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웅장한 뜻을 담아 쓴, 특유의 멋을 지닌 휘호가 보입니다(저는, 10여 년간 혹시 지상 20층 웅장한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1층 벽면의 그 휘호를 ”깨부수자!“는 사람이 나올까봐 공연히 조마조마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문교부의 교육과정, 교과서 정책에 관한 일을 하게 된 저는, 그러므로 온갖 것이 배울 것이었고 온갖 것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처음에는 주로 초등학교 내용을 담당했기 때문에 서울역, 남대문, 이순신, 광화문, 경복궁, 정부종합청사,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대부분 옛 서울 도성 안의 것들이며 청사 앞 그 광활한 거리가 바로 옛 서울의 육조거리였다는 것 등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다루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자연스레 그 내용에 애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실은 기초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지방에서 올라온 제가 아는 척할 수 있는 경우가 거듭되면 그러한 애정은 더 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의 3, 4학년 사회 교과서는 많이 달라지고 다채로워졌지만, 당시의 사회 교과서를 보면 ‘문화재’ 하면 당연한 듯 국보 1호 남대문과 고려청자 한두 점부터 다루었습니다. 생각나십니까? 구름과 학이 아름다운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혹 모조품이라도 갖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제 아무리 희한한 물감이라도 고요와 사색에 사무친 고려청자의 아득하고도 깊은 빛깔을 그처럼 물들일 수는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최순우 선생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설명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최순우, 199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167).

  그분의 책을 보면 외워두고 싶은 문장이 너무나 많아서 저는 그만 밑줄 치는 걸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남대문에 대해서 배우고 가르치던 그 내용. 남대문은 그 지붕이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직선, 2층은 곡선으로 되어 있으면서도 서로가 기가 막히게 어울리며 그 모습은 저 멀리 경복궁, 청와대 뒤로 흐르는 산줄기와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린다는 그 설명.

 

  그런데 그렇게 낯익은, 사랑하는, 언제까지라도 그곳에 그렇게 있을 줄 알았던, (‘소중한’이라고도 쓸까요?) 그 남대문, 그 숭례문이 그리운 남대문, 그리운 숭례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1996년에 ‘한국관(韓國觀; 한국바로알리기)사업’으로 오스트레일리아(호주)를 방문한 일이 떠오릅니다. 그때 오페라하우스와 함께 하버브리지(harbour bridge)도 보았습니다. 1923년에 시작하여 9년 만에 완성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다리(1149m)로, 영국 차관으로 건설하여 통행료를 받아 그 빚을 갚고 유지보수와 해저터널 공사비로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설명하는 관광버스 기사는 덧붙였습니다. “이 다리는 밤낮으로 두 명이 순시하며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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