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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손가락 마디처럼 떨어진 동백꽃송이

by 답설재 2008. 2. 9.

 

 

지내다보면 주변에 이런저런 물건이 쌓이게 됩니다. 연구보고서나 단행본, 월간지 같은 자료가 대부분이지만 필통이나 필기구, 책갈피, 명함 통, 신문기사 스크랩 등 잡다한 물건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물건들을 잘 모으는 편이었습니다. 심지어 우편물이나 그 우편물의 봉투까지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모아온 책을 ‘왕창’ 버리는 경험을 한 뒤로는 사소한(책에 비하면) 물건들에 대한 집착을 어느 정도는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만큼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고, ‘아하, 그게 바로 물욕이었구나’ 싶기도 해서 스스로 제법 어른스러워진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들으면 어쭙잖다고 하겠지만 이러면서 생에 대한 아집과 집착을 버리고 어느 날 좀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승을 떠날 수 있게 되는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물건에 대한 애착심의 강도를 조금이라도 낮춘 것은, 사실은 그 집착을 완전히 떨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바로 책에 대한 집착의 강도를 이만큼으로라도 낮추지 않을 수 없었던 상실감이 대단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물건 중에서 남의 눈에 드러나는 쉬운 한 가지가 바로 집이나 사무실의 화분일 것입니다. 남의 사무실을 방문해보면 이게 온실인가, 화분 전시장인가 싶을 정도로 -자랑일까요, 취미일까요- 온통 전 공간에 화분을 배치해두고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푸나무라는 것이 특히 화분에 옮겨 심으면 각각 저만의 성격을 가지게 되어 어떤 것은 물이나 거름을 자주 주어야 하고, 어떤 것은 한 달에 한 번 잊지 않고 물을 주어도 충분한 것이 있어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닙니다. 그래서 화분이 많은 집에 가보면 가족 중에 분명 꼼꼼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나도 이곳저곳 옮겨 살면서 십 여 개씩의 화분을 관리하며 살았는데,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우선 웬만한 식물은 차츰 1주일에 한번 일요일 오전에 대충 물을 뿌려주는 내 습관에 그것들이 스스로 제 성격을 맞추어 주더라는 것입니다. 화원에서 가져올 때는 이건 매일, 이건 1주일, 이건 한 달에 한 번 정도 등으로 제각기 그 성격을 자랑하거나 고집하지만 나에게 맡겨진 후에는 차츰 그 특성을 버려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가령 비교적 잘 자라는 벤자민 같은 식물은 '저 가지가 내 책상 위로 늘어지면 내가 이렇게 앉아서 책을 보는 모습이 참 그럴듯해보이겠구나' 싶어 하면 곧 다른 가지보다 먼저 그 가지를 쭉 벋어 내가 바란 대로 해주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벋은 가지를 남에게 자랑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들이 과학적으로 이치에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비과학적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내 생각이 바로 물건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사를 다니면서도 데리고 다닌 화분 중에는 수령이 이십여 년은 되는 동백(冬柏)도 있습니다. 벌레도 꾀지 않고 물만 주면 그 가지가 쭉쭉 벋어나는 편이어서 1년에 한두 번 꼭 전지를 해주어야 할 정도이므로 -사실은 전지가 아니라 무성한 줄기 뭉텅뭉텅 잘라내기였지만- 화분을 잘 관리한다는 칭찬을 듣기도 좋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아내가 좋아하는 화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이곳으로 이사 와서는 좁아터지는 베란다에 화단을 꾸미게 되었고 화분에서 지내던 그 동백도 꺼내어 함께 심게 되었는데, 일을 맡은 사람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이놈은 잘 자라기는 하는데 우리 집에 온 그해 겨울에만 두어 송이 꽃을 보여주더니 이후로는 한 번도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동백은 새로 난 가지 끝에서 꽃이 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동백은 주인을 잘못 만나서 그동안 한 번도 꽃을 피울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겨울에는 스무 남은 개의 꽃망울을 맺게 되었고 정월이 되자마자 빨간색의 요염하고 탐스럽고 화려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동백꽃은 바로 내 화단에 피었기 때문인지 그 빛깔이 너무도 곱습니다. 빨간 꽃잎과 노란 꽃술을 들여다보며 무엇이든 제대로 알아야 결실을 볼 수 있구나 하고 동백이 꽃피우는 이치를 알게 된 것이 흐뭇했고, 그 이치에 한 치도 어긋남 없는 개화(開花)가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꽃을 보면서 아내에게 미국에서는 스승의 주간에 그 반의 모든 가정에서 딱 한 송이씩 정원의 꽃을 꺾어 대표 학부모에게 보내면 대표는 꽃바구니에 모아서 담임선생님께 드리는데, 우리 같으면 당장 어느 어머니가 나서서 “그런 꽃바구니라면 내가 맡아서 혼자 준비하겠다”고 할 것이라는 얘기도 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정성들여 가꾼 꽃송이를 모아 선물하는 값어치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화단에 나가 이 송이 저 송이 꽃송이들을 바라보다가 꽃송이도 아니고 가지를 조금만 건드렸는데도 그만 그 생생한 꽃 한 송이가 뚝 떨어지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땅에 떨어졌지만 그 꽃송이는 가지에 달린 요염한 모습의 꽃송이들과 다른 점이 전혀 없어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꽃송이는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문득 나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어느 날, 꿈에 손가락 마디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소스라쳐 일어나던 어린 시절의 그 새벽이 떠올랐고, 이어서 소록도에서 서러운 생애를 보내며 서러운 시(詩)를 쓴 한아운 시인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이 무너져 떨어지는 모습까지 시로 나타내었습니다. 얼른 거실로 들어와 그 시집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2/3 정도의 책을 버릴 때 그 시집도 포함된 것 같았습니다. 혹이나 싶어서 설날 연휴에 있을 만한 곳을 연거푸 서너 번은 더 살폈으나 이미 없어진 책이므로 나타날 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떨어진 동백 꽃송이를 보고 손가락 마디가 무너져 떨어지는 느낌을 가지게 된 것도 다 내 물건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또 하는 며칠을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