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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먼 나라로 살러가는 딸과의 작별

by 답설재 2007. 12. 18.

올해 서른여섯인 딸아이가 탑승한 런던 행 비행기는, 오늘 오후 1시 3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시각이 밤 10시 30분이므로 벌써 아홉 시간째입니다. 그러나 그 비행기는 아직도 세 시간을 더 날아야 착륙하게 됩니다. 딸아이는 그렇게 먼 나라에 가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살다보니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2녀1남을 두었는데, 그 아이가 맏이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일어나기 전에 세수를 마치고 아침식사를 기다렸습니다. 자신의 것은 포장지 한 장도 버리지 않지만 물욕이 없어서 옆에 있는 물건은 부모의 것이라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실력으로 남에게 뒤지는 것은 있을 수 없어 하는 성격입니다. 하는 일에 대해서도 부탁할 일도 없고, 훈계할 일도 없는 아이입니다. 노란 가방을 멘 아이들을 부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유치원에도 보내지 못했고, 학원 한번 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어영부영 세월이 가서 여기까지 왔을 뿐입니다.

지난날이 다 생각나지는 않습니다. 이 순간 떠오르는 것은, 다섯 식구가 신문지를 깔아놓은 부엌 바닥에 둘러앉아서 삼겹살을 구워먹던 그런 날들, 그 어려웠던 지난날들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그리워졌습니다. 아울러, 내가 그 아이에게 지나치게 대한 일들이 많았으므로 이제 차츰 그런 일들을 잊고 지내기를 기원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 아이는 아직 미혼입니다. 그러나 나를 잘 아는 사람이 그 아이가 지나갈 때 살펴보면 절대로 내 얼굴이 연상될 리 없는 예쁜 아이입니다. 눈이 크고 별처럼 초롱초롱하고 미소를 지으면 특히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내가 그 아이의 귀가 시간을 밤 아홉 시로 정하면 무리인 줄 알면서도 일단 지켜주었습니다. 가령 그리스·로마 신화는 꼭 읽을 만하다고 언급하면 당장 읽었고, 나로서는 도대체 어느 신(神)이 어느 장면에 나오는지 늘 아리송하지만 그 아이는 그 희한한 이름의 신들을 언제나 다 기억하고 있으며, 영어 교과서의 문장들은 미려하고 하자가 전혀 없는 문장들이라는 걸 어느 영어교육 전문가로부터 들은 대로 전했더니 교과서를 통째로 다 외워버렸습니다.

나는 그 이후로는 그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하고 지냈습니다.

 

그 아이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하도 재미없어 해서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자원봉사활동을 소개했더니 단정하게 드나들었고, 그 아이가 하는 일을 본 지켜본 총장이 직원으로 채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영어교육전공 석사학위를 받았고 곧 미국이나 영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해외라고는 제주도도 가본 적이 없지만 영어 걱정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AFKN을 보면서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가려낼 수 있었고, 영화 007 시리즈 제8편 『죽느냐 사느냐 Live And Let Die』에서 제3대 제임스 본드로 출연한 로저 무어가 방한했을 때는 그를 수행하는 통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유학에 관하여 내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영국문화원에 가서 시험을 보았고 그 나라 정부에서 주는 학비로 3년간 국제교육(International Education)을 전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런던대학교, 케임브리지대학교, 바스(bath)대학교, 버밍햄대학교, 브리스톨대학교에 지원하였습니다.

그 나라의 대학들은 설문을 보내어 인터뷰를 했는데, 힘들어 하는 그 아이에게 "영어를 잘 하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답을 써달라고 할까?" 물었더니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대학 교수들이 척 보면 다 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인터뷰 자료를 보내고 몇 날 며칠을 기다리더니 "어느 대학에서도 허가가 오지 않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영국문화원을 통해서 받게 된 그 학비는 어떻게 되는지 그게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교에서 연락이 왔고, 아이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학교에 가기로 결정하고 있는데 또 한 학교에서 연락이 왔고, 연이어 나머지 세 학교에서도 연락이 왔으므로 지원을 한 모든 학교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아이는 어느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는지 물었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옥스브리지'라고도 할 만큼 유명하므로 케임브리지가 좋겠다고 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며 그 학교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떠난 것이 2004년 9월, 학위논문을 제출한 것이 2006년 11월이었고, 올해 4월 15일에 귀국했으므로 그 아이는 2년 만에 석사학위를 새로 받고 캄보디아 현지조사를 거쳐 박사학위 논문을 쓴 것입니다.

한때 그 아이는 전화로 "교수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걱정을 하기에 "나는 우리나라 교수들이 하는 말도 다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대답해준 것이 나의 유일한 응원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쓴 논문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이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INVESTIGATING EDUCATIONAL POLICY RESPONSES TO CHILDREN'S WORK: VIEWS AND APPROACHES IN THE CAMBODIAN EDUCATION SECTOR // Chae-Young Kim / Lucy Cavendish College // A thesis submitted in fulfilment of requirements for the degree of Doctor of Philosophy / University of Cambridge Faculty of Education // 30 November 20

 

그 논문의 DECLARATION은 다음과 같습니다.

 

 I declare that this thesis is substantially my own work. It is not substantially the same as any that I have submitted for a degree or diploma or other qualification at any other University. It does not include any work done in collaboration with any person or institution. References to the works of others have been duly acknowledged in the text. The length of the thesis excluding footnotes, references and appendices does not exceed 80,000 word

 

논문은 339페이지로 되어 있고, ADB (Asian Development Bank) (2005) Country Strategy and Program: Kingdom of Cambodia. Manila: ADB로 시작되어 Yin, R. K. (2003) Case Study Research: Design and Methods. London: Sage로 끝난 참고문헌(REFERENCES)은 모두 237종이었습니다.

 

심사는 두 명의 교수가 맡았는데 그들은 무수정으로 그 논문을 통과시켜 주었답니다. 심사 결과표를 보았더니 두 명의 교수가 각각 아홉 가지 평가 중 제일 첫 칸(Approved for the Ph.D. without correction)에 √표를 해주었고, 들은 바로는 이런 성적을 얻는 학생은 4~5년에 한 명 정도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심사를 맡은 교수가 묻더랍니다. "논문 심사가 끝나면 무얼 할 예정인가?" "수정지시가 나오면 그 일을 하겠다"고 답했더니 웃으며 "다른 일을 계획해야 하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렇게 하여 그 아이는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 복귀하였고, 외교통상부의 '다자협력' 업무를 맡을 5급 계약직 공개 채용에 응시했으나 마지막 두 명이 남았을 때 외교통상부 내부에서 응시한 6급에게 밀려서 2위로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즈음 신문에는 "형식적 공개채용으로 눈속임, 편법 무더기 '승진잔치'도 눈살", "고충처리위원회도 내부용 '편법 공채', 홍보처와 비슷한 시기… 계약·별정직 9명, 5급으로 전환" "공채(公採) 사기극" 같은 기사가 보이기도 하여 그 아이에게 내가 미안했고(?) 그 아이가 그런 기사를 볼까봐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그 낙방으로 국내에서 생활하는 것에 회의를 느낀 그 아이는 8개월 만에 다시 그 영국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나는 그 아이가 하는 일에 대하여 쓸데없는 관여를 하고 싶지 않았으며, 더구나 연구실은 없지만 시간(혹은 세월)을 두고 한 십 년 정도 보따리를 싸가지고 다니며 시간강사를 열심히 하다가 교수가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 그 애의 아버지인 나는 기가 막힙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맡아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해야 할까요? "열심히 공부하면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고, 이 나라는 그러한 인재가 얼마든지 쓰일 수 있는 나라"라는 걸 힘차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이제 밤 12시가 되었습니다. 1시간 반 후면 그 아이가 런던 공항에 도착하겠군요. 내게는 눈발 날리는 아침으로 시작된 오늘 하루가 참 길고 가슴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기막힌 일도 있고, 살아보면 모든 것이 덧없지만, 그러므로, 그렇게 덧없으므로, 그 아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그야말로 '정진(精進)'하기를, 이 밤 간곡한 마음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2007년 12월 15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