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5년 12월 <편수의 뒤안길>이라는 책에 실은 것입니다. <편수의 뒤안길>이란 책은 교육부 편수국에 근무하면서 교육과정, 교과서, 역사왜곡대책 등의 업무를 담당한 전직 편수관들의 모임인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에서 1년에 한 번 정도 발행하는 책입니다. 이 블로그에 자주 들어오시는 분들께 미안하여 지난 세월에 쓴 글이라도 보여드립니다. 읽으시다가 지루하시면 중간쯤부터 읽어보십시오.
「고구려연구재단」 설립에 관한 추억(Ⅰ)
"이 책은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의 헤로도토스가, 인간계의 사건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잊혀져 가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이 이룬 놀라운 위업들----특히 양자(兩者)가 어떠한 원인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정(事情)----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연구․조사한 바를 서술한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그의 『歷史』 첫머리에서 한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러므로 우리는 헤로도토스 같은 엄청난 역사가들이 연구․조사한 결과를 잘 외울 필요가 있다”고 인식하기 십상이다. 전철에서 역사 교과서를 읽으며 가는 학생들도 ‘역사를 왜 배우는가?’를 공부했겠지만, 시험을 앞두고 이른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외워야 하는 시간에는 “쓸데없는 소리 마라”고 할지도 모른다.
“파괴와 쇠퇴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다보지 않으면서 진보에 대한 모든 신념과 인류에 의한 더 나은 진보에 대한 모든 전망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배제해버리는 오늘날의 회의주의와 절망의 모든 조류는 엘리트주의의 한 형태----위기에 의해서 자신들의 안전과 자신들의 특권을 가장 현저하게 침식당해온 엘리트 사회집단의 산물, 그리고 한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확실한 지배권을 박탈당해버린 엘리트 국가들의 산물----이다.” 카가 그의 『역사란 무엇인가』 서문에서 한 말이다. 역사 전문가들은, ‘이것보다 적절한 표현이 많은데……’ 하겠지만, 필자로서는 이 말만 읽어보아도, ‘아, 역사란 정말 깊숙하고 복잡한 사고를 요하는 학문이구나.’ 싶었다.
필자는 역사학자․역사교육학자들을 대하기도 그만큼 어렵다. ① 우선, 누가 역사학자인지 누가 역사교육학자인지 구별하기가 어렵다(왜 그런지 설명할 수가 없으므로, 설명하려들지 않겠다). ② 다음으로는 그동안 역사를 읽는 데 노력했지만, 그래봤자 워낙 기초가 없기 때문에 머릿속에 어떤 체계를 이루지는 못하여 ‘역사는 아무나 공부하는 게 아니구나.’ 실감하였다. 뭘 좀 알아야 친해질 것 아닌가. ③ 또, 시험 기간만 되면 밑줄을 수없이 그은 역사 교과서만 읽고 외우며 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누가 뭐래도 역사는 아직 암기교과다’ 싶은데도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국․검정을 합하여 2300권이나 되는 책 중에 가장 모범적인 암기 교과서가 역사다!’ 혼자서 그런 생각을 했다(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생각한 것이므로 이 표현이 문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7차 교육과정에서 역사를 선택과목으로 전락시키고 사회과에 포함시킨 사람들은 매국노” 등 다른 할 말이 많은 그들에게는 감히 그런 말을 꺼낼 여유가 없기도 하다.
그런데도 필자는 ‘서슬이 퍼런’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저들은 내가 짐작하지 못하는 정말로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잘라서 말하면, 필자에게는 그들이 대체로 신채호 선생의 제자쯤으로 보인다. 다만, ‘저들은 왜 타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을까?’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의식과 느낌을 갖고 있는 필자가 ‘고구려연구재단’ 설립을 맡은 과장이었다.
2003년 12월 16일, 토요일, 저녁에 퇴근했다. 아파트를 들어서는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화장실에 들어가 한 손은 벽을 짚고 한 손으로 세수한 다음, 거실에 드러누워 아내에게 얼른 사관을 틔우라고 했다. ‘이러다가 내가 죽으면 재단은 누가 세우나’ 주제넘은 생각도 했다.
이튿날 오전, 내가 나서면 좋을 일이 있었지만, 오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을병 원장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혼자 나가서 처리해달라고 했다. 아내가 나간 후 시계를 보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빙글빙글 돌던 세상이 제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아직 튼튼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를 가지고 나가면 더 늦을 것 같아서 택시를 탔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번에는 설사가 나서 차를 돌렸고, 순식간에 샤워를 하고 다시 택시를 불렀다.
장을병 원장은 수십 번의 핸드폰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한 가닥 기대는, 한 시간 정도 이야기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으므로 점심시간까지 기다려줄 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필자는 잘 모른다. 다만,『思想界』라는 책에서 그 이름을 보았었다. 당연히, 그 이름으로 된 글은 필자가 읽고 해석해도 좋은 글들은 아니었다. 더구나,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는 모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의 이해와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뿐이었다. 당시의 필자가 보기에는 그런 일들뿐이었다. 꼭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필자가 느끼기에는, 역사가들은, ‘그 봐라, 우리를 업신여기고야 무슨 일이 되겠나! 중국이 <동북공정>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너희들이 우리를 찾기나 하겠나!’와 같은 태세일 것 같아서 모든 것에 대해 그분들의 요청과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분들에게 “우선 이렇게 해주십시오.” 할 만한 것은 별로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대한 필자의 기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의도의 그 호텔 커피숍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러저러하게 보이는 중후한 어른이 오래 기다리다 혼자 나갔다.” 종업원의 설명은 아무렇게나 들어도 장을병 원장에 대한 것이었다. 바람만 부는 그 커피숍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담배를 피우는 일뿐이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사람이 이충호 장학관(현 충북 옥천상업고등학교 교장)이었다. 사실은 ‘고구려연구재단’에 관한 업무 담당자가 이 장학관이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가 가여워서 이날 일이라도 혼자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필자는 이 장학관에 대하여 평소 ‘한마디로 몸이 가볍고 생각난 일은 저지르고 보는 성격으로, 가령 필자 같은 사람이 따라다니면서 뒷정리를 해주면 멋질 사람이며, 애국심이 특히 투철한 지일파(知日派)’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이 장학관은 15분 만에 달려왔고 착하게도 장을병 원장의 댁 주소까지 알고 있었다. “이 장학관, 지금 당장 와인 한 병을 사들고 가서 김 과장이 죽었다고 하든지 뭐라고 하든지 하고, 이러이러한 일이 그가 부탁드리고 싶어 한 유언이라고만 해주시오.” 이 장학관은 한참 만에 돌아 나와서 그 아파트 앞에 서 있던 나에게 말했다. “원장님은 혼자서 자장면을 시켜 드셨어요.”
며칠 후 회의장에서 만난 장을병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공무원 하기는 참 힘듭니다. 건강에 조심하세요.” 필자는 그 시각, 다시 멀쩡한 몸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장 원장 같은 분이, 나 같은 사람이 부탁한다고 들어주고 말고 하겠나. 다 당위성을 따져서 도와주고말고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다만, 어떠한 경우라도 정부의 관리가 정성을 다하여 격식을 갖추는가 어떤가는 검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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