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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무서운 일가견(一家見)

by 답설재 2007. 10. 24.

  교육전문출판사 ‘중앙교육진흥연구소’에서는 오랫동안『교육진흥』이라는 저널을 발행해 왔는데, 연전에 그 간행물을 그만 발행하겠다면서 제게 종간호에 실을 원고 하나를 부탁해온 적이 있습니다. 그 종간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습니다. 이 글이 어떤 분에게는 상처를 줄 수도 있지만, 그런 분은 ‘별 희한한 놈도 있구나.’ 하시기 바랍니다.

 

 

일가견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1. 자기대로의 독특한 의견이나 학설(일가견을 가지다, 일가견이 있다), 2. 상당한 견식을 가진 의견(일가견을 피력하다, 一家言)으로 풀이되어 있었다.

 

공짜 책에 대한 이야기 한 가지. 선배들이 이 글을 읽으면 주제넘은 놈이라고 하겠지만, 이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처지여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학교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정년퇴임을 한 분들이 더러 있게 되었고- 길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정년퇴임을 한 분은 표가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그들 중에는 또 더러 손수 정년퇴임 기념 문집을 들고 오기도 한다. 며칠 전에도 서울에서 교장을 지낸 분이 마지막으로 근무한 학교의 이름을 따서 ‘○○ 꿈동산’이라는 제목의 문집을 가지고 이 학교를 찾아왔다. 펴보나마나 앞부분에는 그분의 세세한 이력이 나와 있고, 평생을 써 모은 혹은 마지막으로 학교와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소박한 이야기들을 담은 글들이 체계도 논리도 없이, 그러나 일가견-사전의 풀이 중 1에 해당하는 일가견-을 지닌 채 나열되어 있을 것이었다. 또한, 한 가지 일에 수십 년을 몸담고 있은 사람이 그 정도의 생각이나 견해도 없이 지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오히려, 그 정도의 생각이나 견해로 함께 생활한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려고 했을 장면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기도 하는 것이다. 또 그 소름끼치는 글들 뒷부분에는 교감과 교사들, 운영위원회위원장, 학부모회장, 그리고 아이들의 글이 수십 페이지에 걸쳐 올망졸망 들어 있을 것이었다. 누가, 이러한 정년퇴임 기념 문집을 모아 놓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런 자료를 두 가지 이유로 매우 싫어한다. 그 첫째 이유가 세세한-그 부인이 보면 분명히 칭찬할 수밖에 없는-이력을 밝혀 놓은 것으로, 나로 말하면 이미 그런 자료를 만들기는 영 걸러먹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아내가 보면 당장 한소리들을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정년퇴임 기념 문집 치고 보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경우가 드물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글에서 ‘책 모으기’와 ‘책 버리기’에 대하여 쓴 적이 있지만, 책을 모으거나 버리는 일이야말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인데, 게다가 정년퇴임 기념 문집이라니, 그런 걸 모은다는 게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료는, 내놓은 사람 몰래 바로 버리면서, 영 개운치 않은 느낌을 받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누가 남의 정년퇴임 기념 문집을 열독(熱讀)하는 사람은 있는지 모르겠다. 거의 확실한 것은, 그런 문집을 만드는 사람은 남의 책은 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남의 책을 읽는다면, 어떻게 그걸 책이라고 내겠는가. 아! 훌륭한 정년퇴임 기념 문집도 물론 있다. 그 책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학교에 근무하면 책을 사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 예전에는 어쩌다가 교직을 떠난 사람들이 월부 책 사라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그런 사람은 볼 수 없고 이상한 이름의 출판사에서 나온 학생용 교양서적 목록을 가지고 와서 무슨 특권을 가졌다는 듯이, 혹은 무슨 특혜의식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출입문에 “업체 관계자는 행정실로 가시기 바랍니다”라는 팻말을 붙여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덜컥 문을 열고 들어와서 ‘당신은 당연히 이 책들을 사야 한다’는 조로 말을 꺼낸다. 그런 경우 차마 말도 하기 싫은 어떤 기관에서 낸 협조 의뢰 공문까지 내보이기도 한다. 이런 경우도 있다. 연감 이야기다. 연감을 내는 기관이 얼마나 많은가. 연감은 냈다 하면 십 몇 만 원짜리는 되는데 그걸 상하권으로 내는 데도 있다. 우리는, 몇 만원밖에 하지 않는,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의 주소와 우편번호, 전화번호, 학급 수, 교장 이름 등이 다 나타나 있어 매우 편리한 전국 초․중․고․대학교 및 수많은 교육행정기관의 명부와 교육연감도 선뜻 사기가 어려운 형편인데, 그런 연감을 사라고 일년 내내 전화를 해대니 참 어렵고 귀찮은 일이라는 것을, 곧 교장이 되려 하는 분 중에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으면 잘 알아두기 바란다. 이제 세 번째 경우를 이야기해야 할 차례이다. 미안한 표현이지만, 역시 정년퇴임을 한 분이 그런 짓을 하는 경우이다. 가령, ‘명연설 명훈화’, 이런 식이다. 견본으로 온 책을 한 장도 넘겨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국경일, 달력에 수없이 많이 표시되어 있는 크고 작은 연간 기념일과 여러 가지 학교행사 등에 대하여 교장이 연설할 대본을 묶은 책일 것으로 보인다. 연설을 잘 못하여 교장노릇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교장이 나서서 이야기해야 할 경우가 그리 많기나 한가. 게다가 ‘훈화’ 시간에 해야 할 이야기쯤이야 여러 선생님들이나 아이들이 더 잘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요전에는 그 훈화 자료집을 낸 무슨 거창한 호와 이름을 가진 분의 저서 10권을 반값에 팔고 있다는 장사꾼의 두 번째 전화를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좋은 책이겠지요, 물론. 수십 년을 교직에 바친 분이 쓰신 글들에 무슨 그릇된 내용이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도 그런 생각으로 책을 한번 내봤는데, 출판사에서 아직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게 잘된 책이어서 막 팔려나가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좀 들여놓으라고 하고, 우리 학교 바자회 때도 좀 내놓겠는데,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한 형편에 남의 책 팔아주기는 싫으니 양해하십시오. 그럼.”

 

예의 인사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정년퇴임을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을 글로 써서 책을 내면 아마도 전국 교육계에 난리가 날 것이다. 모두들 읽을 만한 책이 없어 쩔쩔 매다가 내 책을 읽고는 드디어 제대로 된 좋은 책이 나왔다고 떠들어댈 것이며, 어떻게 하면 내 책을 살 수 있는지 아우성이 날 것이다. 정부에서 교육개혁이네 뭐네 하고 수십 년을 떠들어도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내 책 한 권으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해결되고 말 것이다. 내가 누군가. 다니는 학교마다 선생님들이 내 이야기를 경청했고 그리하여 학교가 바뀌었고, 하다 못해 술자리에서도 내가 이야기하면 모두들 경청하지 않았는가. 빨리 책을 내야 한다. 빨리 내야 한다.’ 물론, 나도 책을 낼 때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 더 간절했다.

 

그분은 지금쯤은 눈치를 챘을까. 아직도 사람들이 그 진가를 알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전국의 교장들에게 전화를 하는 그 사람에게 “전화를 제대로 하라”고 다그치고 있을까. 나는 그분의 열정에 대하여 위로까지 하고싶지는 않지만 빨리 눈치채고 다른 일이나 하기를 기원하고싶은 것이다. 나조차 끼어 들어 그런 짓을 해보았으니, 어디 그런 생각으로 책을 내어본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나는 그랬다. 책이 나왔을 때, 우리 학교 교직원들에게 내 돈으로 수십 권 구입하여 한 권씩 나누어주고 교장이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았다. 우선 그들은 책을 읽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그냥 무지 바쁜 사람들일 뿐이었다. 바쁜 중에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지만 이들은 그런 소리를 할 정도로 바쁜 사람들이 아닌 모양이었다. 교육계에는, 내가 보기에, 일가견의 그 1번 일가견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나도 그런 생각으로 책까지 내었으므로 역시 그 1번의 일가견을 가졌다는 것을 나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책을 읽는 것을 고급스럽게 이야기하면 ‘독서’라고 한다. 사람들은,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고 한다. 그건 등산이나 영화감상처럼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스운 견해이고, 이러한 견해 때문에 독서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기를 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어떻게 누구나 독서를 해야 한다고 강변하는가. 독서를 하지 않고도 고급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 잘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나는 그렇다. 독서를 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다시, 사전에서 ‘취미’를 찾아보면 취미(趣味)란 1. 마음에 느껴 일어나는 멋이나 정취, 2. 아름다움이나 멋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능력, 3. (전문이나 본업은 아니나) 재미로 좋아하는 일(것)이다. 독서를 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이유는 독서는 즐거움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골치 아픈 책을 권하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때부터 나는 그를 싫어하게 된다. 독서에 대하여 지식을 습득하네, 인생의 바른 길에 대한 지침을 얻을 수 있네, 어쩌고 하는 어줍잖은 말들을 나는 경멸한다. 독서는 취미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할 수 없어 책을 읽은 것은 독서가 아니고 일(작업)일뿐이다. 독서를 하면, 어떤 경우에는 창의력이 증진되기도 한다. 그것은,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공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도가 넘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서음증(書淫症)이라고 한다. 서음증도 심하면 고치기가 어렵게 된다. 책을 사는 데 형편에 비해 과도한 경비가 들어가고 또 그만한 시간이 들어가서 할 일을 다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이제, 마치면서 18년 세월의 『교육진흥(敎育振興)』이 71호를 내게 되었고, 이것이 종간호가 된 데 대해 이야기해야 하게 되었다. 교원들은 『교육진흥(敎育振興)』 71호가 종간호가 된 것에 대해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교육진흥(敎育振興)』은, 말하자면 허필수 회장은, 교원들을 짝사랑한 책이고 사람이다. 그걸 진작에 알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 짝사랑은 그러나 역사에는 ‘참사랑’으로 기록될 지도 모른다. 『교육진흥(敎育振興)』이 독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책이야말로 보는 것이 좋다”는 책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하고싶기도 하다. 혹 아는가. 일가견을 가진 사람들이 그 일가견이야말로 참으로 위험한 것임을 인식하면서 “야, 참 희한한 책이네!”하고 덤벼드는 책도 있을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