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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Ⅰ)

by 답설재 2007. 10. 16.

 

 

 

 

완연한 가을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가을을 탑니다.2005년 12월,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로 정년을 맞이한 함수곤 선생은 예전에 교육부 편수국장을 지냈습니다. 정년 기념으로 『함수곤의 편수교류기』라는 책을 냈는데, 그때 저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을 냈습니다. 올가을에는 그 생각이 나서 여기에 그 글을 옮깁니다. 좀 길어서 나누어 실었습니다.

 

 

 

그분은 노래방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분은 몇 사람이 오랜만에 모였을 때 저녁식사만 하고 헤어질 때가 있었을까 싶고, 식사까지 합쳐 3차까지는 가야 제대로 된 모임이라는 느낌을 갖는 것 같다. 그러므로 누가 그분의 기분을 좀 맞추어 주고 싶다면 식사를 하면서 대뜸 "우리 식사하고 나서 노래방에 들렸다 헤어집시다" 하면 당장 교과서를 제대로 만들었을 때보다 더 큰 칭찬을 받겠지만 내가 그렇게 제안해본 적은 없다. 나는 그런 제안을 할만한 처지에 있지도 않거니와 내가 매번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할 때쯤이면 이미 그분이 그 제안을 스스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두고 싶은 것은, 식당이 깔끔한 것쯤은 아예 언급하지도 않지만 새로 차린 노래방에 들어가 시설이나 분위기가 그럴 듯하면 언제 다시 찾아와야 하겠다는 듯 "이 노래방 괜찮다" "괜찮다" 하기도 한다.

 

그분이 노래방에서 다른 사람을 제치고 맨 처음에 노래를 한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다섯이면 다섯, 열이면 열, 모두 한 곡씩 뽑게 한 다음에 그 라운드의 마지막이 자신의 차례가 되게 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말하자면 좌중(座中)을 평정한다고나 할까? '평정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유도 있다. 요즘은 '노래방 문화'가 젊은이들에게는 한물갔고 당연히 좀 나이든 사람들의 문화가 되었거나, 아니면 텔레비전의 노래자랑 프로그램을 보면 아마도 주부들의 전용문화가 되었구나 싶도록 '전국적으로' 노래를 잘 못 부르는 주부가 있을까 싶고 "저 사람이 언제?" 싶도록 예상도 하지 못한 사람도 잘들 부르지만, 그러나 그 몇 사람이 부르는 동안 제법 멋진 노래를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트롯'(도롯또)도 나오고 난데없이 더러 <선구자> 같은 가곡도 나오는데 비해, 그분은 이제 자기 차례가 되면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썩 나가서는 틀림없이 발라드 풍(?)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게다가, 노래방에 들어갔다 하면, 돌아가면서 세 곡씩을 부르는 것이 시간 조정상 아주 적당한데, 그분은 세 곡 다 그 발라드 풍으로 곡목을 장만하는 걸 보면, 아마도 트롯 정도는 노래로 여기지도 않는 걸 알 수 있다.

 

적어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새롭고 멋진 노래가 자꾸 나와서 그분도 또 다른 노래를 첫 곡으로 선정하고 있지만, 전에는 아마도 패티 킴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이 늘 첫 곡이었지 싶다. 이 첫 곡으로 아예 사람들 기를 죽이는 것이다. 첫 소절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까지 부를 때는 그 특유의 몸짓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시작하지만,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로 넘어가면서 드디어 고개를 들고 약간 외로 기울어지게 하여 좌중을 바라보게 된다. 이때쯤이면 역시 그 특유의 바리톤이 진가를 발휘하게 되므로 한 곡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하여 매우 쑥스러운 나 같은 사람은 물론이고, 잠시를 못 참고 천방지축으로 떠들고 있거나 모니터를 쳐다보던 사람 등 딴 짓을 하던 모든 사람이 그분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이 부를 때와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노래방 문화라는 것이 왜 그렇지 않은가. 부르는 사람은 혼자 멋들어진 제스처를 하면서 때로는 악을 쓰며 불러도, 한두 사람은 곡목의 번호를 찾는 책을 들고 이리저리 넘기고 있고, 몇 사람은 그 속에서도 아까 식사 때 못 다한 이야기를 외쳐 대느라고 정신이 없고, 한 사람은 벌써 화장실에 가고, 단 한두 사람만 건성으로 노래를 따라가는데 그것도 그 사람을 보는지 모니터를 바라보는지 모르는 상황. 그러다가 노래가 끝나는 부분에서는 ‘언제 우리가 그랬느냐’는 듯 고함을 치며 격려하고 박수를 치는 모습. 그러나 그분이 노래할 때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왜 그렇게 되는지 나는 정확하게 밝힐 재간이 없다. 다만, 그것도 다 그분의 카리스마라는 생각뿐이다. 그분이 그 노래의 그 부분에서 고개를 들며 우리를 둘러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그분이 이런 생각으로 노래하고 있을 것이라는 그림이 저절로 그려진다. 즉 '모두들 노래를 그렇게 밖에 못 부르나? 한때 편수관까지 지낸 주제에. 그래놓고 남 노래하는데 떠들긴 뭘 잘했다고 떠드나? 노래란 이렇게 하는 거야. 봐, 멋있잖아.' 그리하여 그분의 노래가 '사랑할수록 깊어 가는 슬픔에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었나. 당신의 눈물이 생각날 때 기억에 남아 있는 꿈들이 눈을 감으면 수많은 별이 되어 어두운 밤하늘에 흘러가리'까지 흘러가는 동안, 나는 그분이 노래를 참 잘 부르는 것에 매번 감탄하기도 하지만 '저분이 만약 교육자로서, 그것도 편수관 대장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무슨 사연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긴다. 왜냐면, '아~ 그대 곁에 잠들고 싶어라, 날개를 접은 철새처럼. 눈물로 쓰여진 그 편지는 눈물로 다시 지우렵니다. 내 가슴에 봄은 멀리 있지만 내 사랑 꽃이 되고싶어라'라는 끝 부분으로 넘어갈 때는 '저분의 가슴이 저렇게 아프도록 한 사람이 실제로는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만약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면 당장 이 자리에 불러와서 좀 따져보고 혼을 내주고 싶구나'라는 생각까지 들도록 열창을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후렴으로 넘어가기 전 간주가 나올 때의 그분의 모습도 감상해 볼만하다. 나처럼 그냥 밋밋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패티 킴과 같은 제스처나 율동은 아니지만 마이크를 조금씩 흔들면서, 그리고 우리를 하나하나 둘러보면서 그 곡에 맞추어 감정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때도 우리는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다.

 

노래방에서도, 3차에서도, 자리를 함께 하는 측에서 큰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왜냐면, 나처럼 노래를 잘 못하는 사람의 18번을 정확하게 기억해 뒀다가 몇 년 만에라도 귀신 같이 그 창고에 들어가 꺼내오기 때문이다. "어이, 김 선생. 자네 차례야. 망설이지 마. 그 왜 있잖아. '안다성'의 <바닷가에서>" 그러고는 좌중을 향하여 "“김 선생은 음성도 안다성을 닮았으니까 한번 들어 보라"고 거창하게 새로 뜨는 가수 소개하듯 소개한다. 그러면 나는 '안다성의 <바닷가에서>보다는 <추풍령 고개>가 더 만만한데…' 싶은데도 그냥 안다성 노래를 부르고 만다. 또 노래방에 들어가자마자,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첫 사람의 노래가 끝나면 대체로 그분이 앞에 나서서 "지금부터 90점을 넘는 사람은 벌금으로 일금 만원씩을 낸다"는 규칙을 정하기 때문에 그 돈을 어떻게 처리하나 고민하지 말고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좌중에서 3차를 주관할 만한 사람에게 인계하면 소주와 안주 정도는 살 만한 자금이 마련된다.

 

 

그분은 사람을 꼼짝못하게 하는 관계를 맺는다

 

 

한번은 내가 근무하는 학교를 찾아왔는데, 전 교사가 모인 자리에서 난데없이 "김 교장은 감성적이고, 의리가 있고,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소개하여 '참 희한한 말씀이구나. 내가 그 세 가지 중 한 가지에나 해당되나?' 하고 짚어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분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강의 시간에는 교육과정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알아듣기 쉽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뿐만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면서 틀림없이 설득력 있는 열강을 하고, 교원대학교 교육행정연수원에서 교장자격연수를 받은 전국의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중 그분을 안다고 2층 안쪽 그 연구실을 찾아간 사람 치고 식사를 함께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 있기 때문이다.

 

돈은 버는 대로 다 쓰기만 하는지, 그러다가 나중에는 뭘로 쓰려는지, 런던대학교 연구교수로 가 있을 때는 교원대학교 앞 교수아파트를 매각한 돈을 여행경비로 다 썼다고 하고(하기야 몇 천만 원 안 되니 그분 딴에는 아껴서 썼겠지만), 케임브리지에 공부하러 가 있는 필자의 딸을 찾아가 하루 종일 함께 하고 헤어질 때 학자금까지 두둑이 주더라고 해서 사람을 꼼짝못하게 하였다.

 

 

그분은 때가 되어야 이야기를 들어준다

 

 

처음 만나서는 뭘 좀 아는 척하려고 해도 받아주지를 않고 혼자서 이야기한다. 그분 혼자서 이야기한다는 것을 잘못 해석하면 독선적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상대방은 아직 잘 모르는 것이 많으므로 친절히 가르쳐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한밤의 사진편지」6개월 기념호(05.8.8)에서 이렇게 썼다. "이 사람과 함께 가도 괜찮은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봐야 하는데도 혹시 기분에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 그때 그 사람 얘기를 좀더 잘 들을 것을…' '아, 좀더 신중하게 판단했어야 했는데…' 하면서 후회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는지, 아니면 형식적으로, 체면상 그렇게 써본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의 경우는 이렇다. '저분이 함수곤'이라는 거야 1980년대 후반 교육부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알았고, 그러다가 발령을 받아 인사도 드렸지만, 내가 그분을 제대로 만난 것은 1993년 12월 어느 겨울밤 정부종합청사 18층 사무실의 사회과학편수관실에서였다. 그 날밤, 공교롭게도 나 혼자 싸늘한 사무실을 지키고 앉아 있었는데 그분이 늦은 밤에(그때도 맥줏집 '어제그'가 있었나?) 다시 들어와 내 자리로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방은 대한민국의 교육목표와 내용을 정하는 곳이다. 편수국의 불이 꺼지면 그 일의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 그 말을 남기고 그분은 곧 사무실을 나갔는데, 나는 당연히 그 뜻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말해주는 그것이 바로, 그분이 나를 조금이라도 '인정'해준 것이라는 점도 몰랐을 것이다.

 

주제넘게 '인정'이라고 했지만 지금 그 이유를 생각하면 이렇다. 나는 교육부에 들어가자마자 그분이 편수국장이 되기 전에 담당관으로 있던 교육과정담당관실 연구사로 근무했다(그때야 당연히 그분은 나를 '뭐 그렇고 그런 놈이겠지'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겠지. 이 자리에서 틀어놓으라면 꽤 쓸 만한 놈이라고 강변한 분은 딱 한 분이었는데, 그분은 바로 김○○ 장학관이었다). 발령 받은 지 아직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중앙대학교 이원영 교수 팀의 유치원교육과정해설서 원고를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아예 내가 며칠 밤을 새워 다시 써서 "이거 내가 다시 쓴 원고"라며 다짜고짜 이 교수에게 내밀었더니 순간 안색이 변했다. 당연히 '뭐 이런 게 있나' 싶었겠지. 어쨌든 가지고 가서 찬찬히 보기는 보았는지 며칠 후 나타나서는 "지금부터 김 연구사가 말하면 무조건 승락"하겠다고 했고 그 이야기를 국장실에 들어가 그분에게도 한 것 같았으며, 이후로 그분은 나를 인간 취급은 하게 된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편수의 불이 꺼지면 안 된다"던 그 말은 시시때때로 생각났지만, 혼자 눈물을 흘리고 혼자 그 눈물을 닦으며 그 족쇄가 특히 원망스러우면서도 그리웠던 적이 있었다. 편수국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초․중등 교육과정․교과서는 중시하면서도 유치원이나 특수학교 교육과정․교과서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분이 편수국에 있을 때는 유치원, 특수학교 교육과정․교과서 전문가들이 자주 들락날락했고 그분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제7차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은 1997년 12월 30일에 고시되었으나 특수학교 교육과정은 이듬해하고도 6월 30일에 고시되었다. 그것은 내가 그 일을 맡아서 고집을 피우며 지연시켰기 때문이었다(장관결재문서 외에는 그 일의 책임자가 나였다는 문서는 아무데도 없지만). 당시 교육과정담당관실에서는 ‘특수학교 교육과정쯤이야, 까이꺼 뭐 대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었지만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업무를 해본 나로서는 도저히 그 상태로 고시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 각론시안은 연구책임자(김정권 교수)가 강조하는 교육과정의 취지에도 맞지 않고 전체적으로 제7차 교육과정의 체제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구대학교연구위원회에서는 이미 예산을 다 집행하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실은 특수학교 교육과정이 일반학교의 그것보다 구조적으로는 훨씬 더 복잡하여 깔끔하게 마무리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간단하지가 않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 수많은 파일을 주말에 대구대학교 실무진을 불러 정리하다가 '이렇게 가서는 걸러먹었다. 이제 차라리 혼자서 정리해야 한다'는 느낌에 와락 눈물이 나와 복도로 달려나갔고 광화문의 봄날 밤, 그 밤의 야경을 내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는 손수건이 다 젖어 그만 울기로 작정한 다음 그들을 서울역으로 데리고 나가 대구로 내려보냈다. 그러므로 나는 그 해 1월부터 6월말까지 '빨리 결재를 받으라'는 독촉을 받으며 하루 하루를 살았고, 평소에는 다른 일도 얼마든지 많았으므로 도저히 그 일을 펴놓을 수가 없어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새벽 3시까지는 밤을 지켰다. 그러면서 그분의 "편수의 불이 꺼지면 안 된다"는 그 말을 원망하고 그리워했다. '참 어렵군요, 그 말씀.'그 말의 뜻을 되새긴 기억이 어디 그때뿐이랴. 모두들 남의 이야기 듣기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쯤 해 두자. 남들은 무슨 일을 어떻게 잘 했는지 굵직한 표창, 훈장 잘도 받는데, 그 흔한 장관표창 한 장 받지 못한 채 파견까지 합치면 14년 반, 그 청사에서 머리에 흰눈을 뒤집어쓸 때까지 참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래, 맞아. 단지, 생각할수록, 살아갈수록 깊어 가는 그 말의 의미 때문이었을 뿐이므로(패티 킴도 그랬지. "사랑할수록 깊어 가는 슬픔에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었나. 당신의 눈물이 생각날 때 기억에 남아 있는 꿈들이 눈을 감으면 수많은 별이 되어 어두운 밤하늘에 흘러가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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