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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Ⅱ)

by 답설재 2007. 10. 16.

 

그분은 알고 보면 가까이 갈 수 있는 틈을 준다

 

2005년 2월초부터 그분이 친지들에게 '한밤의 사진편지'를 보내고 있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고 있겠지만, 나에게 특히 인상깊은 점은 그분이 취재하는 세상의 수많은 일들, 이런 저런 교육단상 같은 '멀쩡한' 사연 아래에는 꼭 볼 만한 사진을 곁들이는데 그것이 대부분 낯뜨거운(그래봤자 단 한번도 그 흔한 포르노그라피는 아니고 매번 예상보다는 더 '홀랑홀랑' 많이 벗어버려서 혼자 보는데도 '낯뜨거운') 장면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건 초기의 일이었다. 그분의 처남이라는 분이 나서서, 평생을 교육에 몸바쳤으므로 그런 사진을 모아 보내기보다는 교육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충고를 해왔다면서 그분이 당장 그 비판을 수용한 이후로는 내가 보기에 사진들의 강도가 영 퇴색하여 안타깝지만 사진이 주는 재미는 줄어들고 말았다. 하기야 1주일에 토․일요일을 뺀 5일치의 「사진편지」에 듬뿍듬뿍 실을 만큼, 그분이 어디서 무슨 수로 그런 사진을 그리 많이 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보내주는 메일에 계속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분은 "하루의 일과를 이 편지를 열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알려주신 수많은 애독자가 계시고, 만나면 이 편지를 화제로 삼고 칭찬해주시는 수신자가 늘어가고 있어 저는 보람을 느끼고 있으며 행복합니다"라고 쓰고 있지만, 사실은 며칠마다 한번씩이라도 소감을 보내주지 않으면 공짜로 메일을 보내주지는 않겠다는 '협박'을 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소감을 보내야 하고, 또 하나의 다른 사실은 읽어보고 싶은 재미를 주는 경우가 속속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만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레오폴드 박물관처럼 누드 입장객은 누드화 무료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무료입장을 선택하겠습니다(물론 아내는 절대 반대하겠지만…)"라고 쓰기도 하며, "무더위에 몸조심하시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쓰기도 한다. 나는 하루 중 10분의 5는 거의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데 남의 머릿속 사정을 귀신 같이 알아맞히어 그렇게 충고하는 그분의 머릿속 사정은 어떤지 그것이 궁금하기도 하다.

 

 

1993년 12월 어느 날, 나는 앞으로 그분 앞에서 까불면 절대 안 된다고 결심했다

 

 

1993년 말이라면 '매우 늦은 감'이 있지만 사실은 그 날도 뭘 제대로 알고 그렇게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분의 교육과정․교과서관을 간략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이렇다. 그분은 우리나라에 '학교교육과정'의 개념을 실제적으로 처음 도입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직은 나밖에 없고, 그러므로 내가 처음으로 밝히는 셈이거니와, 이건 정말 정말 대단한 사건이라는 걸 모두들 알아야 한다. 학교교육과정이 없다면, 교과서를 무슨 성전(聖典)쯤으로 여기고 있는 우리나라 형편으로 보면 "그냥 교과서대로만 가르치자"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한심하긴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학교교육과정'이라는 것의 개념이 제6차 교육과정에 이르러 그분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

 

교과서 편찬에 대해서도 그분이 늘 강조하던 바이었거니와, 편수관은 (그분이 이렇게 분류한 것은 아니지만) 집필진․검토 협의진․편집인․인쇄인․사진삽화가․예산 집행자 등 관련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종합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말하자면 그 일에 대한 전문성과 사람 다루는 전문성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참으로 적절한 비유이며, 앞으로 우리나라 교과서 편찬사업이 하루속히 그렇게 변화․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슴깊이 새기며 그 글을 읽은 적이 있거니와 그때부터 나는 어떤 책을 보더라도 그 생각을 하며 읽게 되었다. 하나만 예를 들면, 현대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커는 이렇게 썼는데, 나는 이 글을 읽을 때도 그분의 견해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식에 기초한 기업과 모습이 가장 닮은 지식조직은 심포니 오케스트라인데, 거기에는 대략 30여 종에 달하는 각종 악기들이 하나의 팀으로서 동일한 악보를 연주한다. 훌륭한 오케스트라는 위대한 기악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협연을 최대로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다." "최고경영자들은 우수한 대학의 책임자나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즉 성공의 핵심은 사람의 잠재력을 파악하고 개발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점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피터 드러커․이재규 옮김,『Management in the Next Society』, 한국경제신문, 2002, 241~244쪽). 글을 이렇게 읽는 것이 이른바 곡학아세(曲學阿世)인가? 그 정도는 아니라면 이게 바로 ‘편리한 오독(誤讀)’인가? 곡학아세면 어떻고 오독이면 또 어떠랴. 분명한 것은 교과서 편찬은 그렇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자. 1993년 12월, 어느 토요일, 그 날 오후에는 추위가 좀 풀려 청사 별관으로 올라가는 길가의 얼음이 지적지적 녹아 내리고 있었다. 웬만한 직원들은 퇴근도 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그분을 수행한 것은 아마 정영권 연구관, 김영일 연구사와 나 이렇게 세 명이었던 것 같다. 그 별관 2층은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위원회'가 들어 있는 건물이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왠지 들어가기가 껄끄러운 느낌이었다. 더구나 대통령자문 교육개혁위원회 제1차 회의로 교육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냥 느낌대로만 쓰기로 하자. '수행원으로 왜 내가 뽑혔나?' 생각하며 들어간 그 회의실에는 노숙하거나 엄격하게, 혹은 꿰나 까다롭게 보이는 학자 20여 명이 빙 둘러앉게 되었고, 우리는 이쪽 출입구 옆에 흡사 법정의 참고인처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학자들 중 10여 명이 연이어 교육과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줄기차게 했고, 내가 생각해도 ‘이쯤에서 이제 우리도 한마디 할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었지만 그분은 그대로 잠자코 듣기만 했다(잠깐! 참고로, 2003년에 교육혁신위원회 전문위원들이 '교과서 자유발행제' 도입을 이야기하자고 해서 그분을 외부 전문가로 모셨을 때도 바로 그 자리였고, 그때 필자 혼자 전문위원들의 이 질문 저 질문에 답할 때도 그분은 역시 시종일관 듣기만 했다. "교육부 관리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 어떻게 '점진적으로 하자'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느냐!"며 그 전문위원들이 필자를 향하여 호통치는 모습을 보며, 아마도 1993년 12월, 그때 그 자리에서의 일을 기억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곳에서 하기로 하자). 누군가가 이야기할 것이 있으면 해보라고 하는데도 그분은 다 듣고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풍선이면 벌써 터졌을 텐데, 어떻게 저처럼 참을 수 있을까' 싶었다.

 

길고 긴 발언들이 끝나자 드디어 그분이 나섰다. 처음부터 톤이 높아져 있었다. 대략 30, 40분간 그 톤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것은 흡사 준비된 것 같은 '연설' 혹은 '강연'이었다. 우리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에서 읽을 수 있는 광장에서의 웅변 같은 것이었다. 그분은 그 날 오후 '여러분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내가 해야할 말은 분명히 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았다. 그분이 그렇게 발표한 내용은, 아마도, 제6차 교육과정은 우리나라 교육과정 개정사상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개정절차를 밟았다는 것, 오늘날 우리의 초․중등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교육과정' 및 '학교교육과정'이라는 것의 의미, 제6차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인간상, 그리고 특히 '교육과정 결정의 분권화' '교육과정 구조의 다양화' '교육과정 내용의 적정화' '교육과정 운영의 효율화'로 요약할 수 있는 개정중점을 알려주고, 아직 이 교육과정을 제대로 한번 적용해 보지도 않았으므로 드러난 문제점도 없는 상태에서 무슨 교육과정을 또 개정하라는 말이냐,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물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심오한 무엇이 더 있었겠지만 나는 그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왔다. 역사의 현장에서, 그러나 보기만 하고 듣기만 한 수행자들로서는 뭐라고 할말도 없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기가 어려운 막막한 심정이었다. 그분도 그런 모습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얼마 되지 않는 그 거리가 참 답답하고 지루하였다. 네 분의 편수관(장학관)들만 따라 들어간 국장실에서 그분은 어둑어둑해졌을 때가 되어서 드디어 문을 열고 나와 그대로 퇴근했는데 바로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 시간에 이미 짐을 모두 쌌고, 사표까지 썼다는 것이었다. 사표라니!!!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설명할 것이 없다. 이미 아는 사람은 나보다 더 자세히 아니까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누군가 그때 직급이 높았던 분이 책임지고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내 이야기만 하면, 나는 앞으로 그분 앞에서 까불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고, 교육과정․교과서 가지고도 절대로 까불지 말고 일해야 한다고 결심했다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당연히 그분과 헤어진 후였지만, 시골에서 자란 나로서는 평생 처음으로 남몰래 영양주사를 맞아보는 사치와 호사를 누려보기도 했고, 전철에서 쓰러졌을 때는 퇴근길의 아시아나 항공 직원이 데리고 내려 사지를 주물러 주기도 한 적이 있었을 뿐이다. 참, 또 있다. 편수관이라는 주제에 교육과정 개정 세미나에 참석하여 앞으로 교육과정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질문하는 사람을 보고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 편수국은 '서서히' 그리고 '소리 없이', 소리가 나려고 하면 편수국 내부의 고위층에서 스스로 억눌러가며, 그러므로 참으로 '착실하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여기까지로 하자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더 있다. 가령, 그분이 공식석상에서 가족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흔히 가볍게, 무책임하게, 남의 일처럼 웃어버리지만, 그분의 곁에는 잠깐만 있었던 내가 보기에도, 그분은 그렇게 말하면서 사실은 그분의 가족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간절히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이 그렇게 표현된다는 것, 우리가 편지 같은 거라도 보내면 그분은 하나도 바쁜 일이 없는 것처럼 언제나 틀림없이 답을 해준다는 것 등 그분의 남다른 점, 따뜻한 점을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데, 그런 일 하나하나에 대해 의미를 찾아 이야기하자면 나는 옛 편수국의 그 날들처럼 또 밤을 새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만, 이 글의 제목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에 대해서나 좀 밝히자. 그분의 첫 곡이 전에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이었다고 했고, 사실은 '가을'이라는 계절의 이미지도 참 좋은 것이지만 단순하게 '가을'에 큰 비중을 두지 말고, <무엇을 남기고 간 함수곤>, 말하자면 나 같은 주제로서는 무엇을 남기고 가는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남기고 간 인물>, 뭐 그런 이미지를 좀 살려보려고 붙인 제목이다. 어쨌든 이 제목이 주는 '메시지'를 찾으려 하면 별것 없겠지만, 그것이 주는 그 '이미지'의 멋스러움에 대하여 모두들 좀 조용히, 정서적으로 생각해보기 바랄 뿐이다. 그럴 때 그분이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을 노래할 때의 그 특별한 정경이 뚜렷이 떠오른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말고 더 행복한, 혹은 교육적인 느낌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분과 정말로 가까운 몇 분들에게나 있을 수 있는 신비한 그 무엇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