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中)·일(日)을 통해서 보는 국가간의 정의(正義)
히틀러는 어떤 일도 그답게 말한 것 같다. 상대국과 평형화된 힘을 가져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허약한 비겁자는 역사(力士)와 싸울 수 없으며, 무장하고 있지 않은 협상자는 만일 저울을 평형화시키기 위한 자신의 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여전히 저울의 다른 편에 얹혀 있는 브레누스(기원전 4세기 초 로마를 정복했던 갈리아의 장군)의 칼을 참고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아돌프 히틀러,서석연 옮김, 『나의 투쟁』㉻, 범우사, 1996, 434쪽).
이 대목을 읽어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지만, 도대체 국가간의 정의(正義)라는 것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그 중의 한 가지가 된다. 국어사전에서는 ‘1.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2. 바른 의의(意義). 3. <철학>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 4. <철학> 플라톤의 철학에서 지혜·용기·절제의 완전한 조화를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히틀러가 이 풀이를 본다면 아마도 1, 2, 3에 대해서는 “저런 나약한 의식이라니” 혹은 “이루어지지 않을 꿈에 젖은 사람들의 말놀음”이라고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며, 4의 플라톤 철학에서의 풀이에 대해서만 겨우 동의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사실은 거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이러한 풀이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대해 과잉반응이라고 할 사람이 많겠지만, 평소 ‘우리의 이웃나라들이 우리나라를 괴롭히지만 않아도 우리끼리 그럭저럭 잘 살아가겠는데’ 싶은 의식을 가지고 지내다가 그 이웃이 독도문제나 역사문제를 들고 나올 때마다 “저들도 정의라고 판단되는 논리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활동할 텐데, 도대체 저들이 생각하는 정의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보다는 분통이 더 잘 터지는 국민들은 그 이웃나라 대사관 앞에 몰려가 고함을 지르고 그 나라 국기나 지도자의 초상화를 불태우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더 분통터지는 일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총리 아베 신조의 생각과 발언이다. 그는 ‘세계 모든 나라로부터 존경받는 아름다운 나라 일본’을 만들어나가겠다고 한 인물로서 일본의 경제 위상에 걸맞은 군사력을 갖추고 국제사회에서 상응하는 발언권을 인정받기 위한 ‘전면적 헌법 개정’과 ‘일본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도록 애국심을 명문화하고 학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기본법 개정‘을 그 전략으로 하고 있으며, 우리가 분통이 터져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건전한 내셔널리즘과 편협한 내셔널리즘은 무엇이 다른가? 편협한 내셔널리즘은 국기를 흔들고 국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국기를 불태우고 찢는 것이다. 일본은 그런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은 상대국의 국기나 그 지도자의 커리캐츄어를 불태우고 찢는 것이 그리 바람직하거나 능사는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아베의 그 생각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가령 당신이 ’종군위안부는 검정되지 않았으며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우리의 정의는 분통이 터진다!”
그래서 떠오르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서로가 생각하는 정의가 다르다는 것이며 혹은 최소한 논리적인 정의와 그 실제는 아주 다르다는 생각이다. 일본만 그렇다면 ‘저들의 행태는 본래가 저렇다’거나 ‘저러니 우리는 정서적으로 일본을 좋아하기가 어렵다’고 단정 짓고 말았을 것이나, 역사적으로 우리와 관계가 더 깊었던 중국 또한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것 하나도 없는 나라임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무렵의 중국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논리 하나를 세우고 이번에는 ‘동북공정(東北工程)’1)이라는 거창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그들의 그러한 행태는 이미 ‘서북공정’ 등을 통해 충분히 예견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프로젝트의 핵심이 직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봄쯤으로 중국의 한 신문에 ‘고구려는 수․당의 변방국가였으므로 을지문덕, 연개소문과의 싸움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통일전쟁이었을 뿐’이라는 글이 게재된 일이었다. 이런 논리로 보면 우리나라가 중국과 조공무역을 한 일이나 고구려 이전, 이후의 국가의 성립과 발전, 외세와의 투쟁 등이 우리의 역사관에 따라 제대로 정립될 수가 없게 되며, ‘사실은 만주벌판까지도 우리의 영토였다’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저들은 평양성까지도 그들의 영토였다는 주장을 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그 진위를 가리는 일이 조급하고, 뻔한 일을 다시 논의해야 한다는 것에 분통이 터지고,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일을 양국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동원하여 하나하나 새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답답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기라성 같은 역사가들이 차근차근 논리를 세워 대처해나갈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우리 학자들이 하는 말이므로 우리 정부에서는 무어라고 하기가 어렵다”는 중국 정부의 논리에 대해서는 우리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 대한민국 이상으로 학자들이 자유로운 주장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 정부에서는 추호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 동북공정에 참여하는 수십 명의 학자들에게 실로 방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중국 정부에서 그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정의에 바탕을 둔 논리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점에서 중국 정부와 우리 정부의 다른 점은 중국 정부의 생리(논리)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중국 정부의 논리를 대체로 수용할 수 있는 안타까울 정도의 탄력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좀 더 설명하면 좋겠지만, 이것이,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른 문제에 앞서 역사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던 논리라면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연구재단」 설립의 어려움
2003년 초겨울부터 시작된 ‘고구려연구재단’ 설립 업무는 나에게는 그 어려움이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물론 아직도 모든 일에 대해 실명(實名)을 들어 이야기하기가 어색한 부분은 있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더구나 그 재단 설립․운영의 실무책임자였던 사람으로서의 느낌으로는 그 재단은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얼른’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으므로 대충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당장 생각나는 몇 가지를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역사학자들을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당초의 생각을 절대로 바꾸는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바꾸는 것이 좋다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애국심과 열정이 남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국사’ 과목을 ‘사회’ 교과 속에 넣은 사람들을 ‘매국노’라고 부르며, 국사과 독립과 국사 담당교사 양성, 국사 지도시간 확대를 문제해결의 최우선 과제로 여긴다. 어쨌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졸고‘「고구려연구재단」설립에 관한 추억⑴’(『편수의 뒤안길』제7집)에서 이야기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비록 사실이라 하더라도 기록과 유물․유적 같은 것에 근거하여 역사로 인정하고 해석하는 말하자면 ‘정통파’ 사학자들과, 가령 고조선의 역사를 ‘신화’나 ‘설화’, 혹은『삼국유사』와 같은 책에만 실려 있는, 그래서 더 밝혀보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이미 온갖 자료로써 충분히 밝혀진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재야 사학자들 간의 장벽이 너무나 견고하여- 나는 지금 이 설명을 역사학자들처럼 하지는 못하고 있지만-아예 서로 상대를 하지 않으려하고 겨우 ‘피식’ 웃고 마는 것이 고작이라는 사실이다.
․예산을 마련하는 일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고위층으로부터 전해진 ‘우선 50억원의 예산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는 당위성을 가진 지침이므로 실무책임자로서는 그 50억원을 마련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직접적으로 그 지침을 받지 않은 기획예산처 담당자는 이 업무를 맡은 실무책임자의 논리에 아무런 하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설득력이 있을 때 그 요청을 수용해주게 된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곳저곳에서 달라는 대로 다 준다면 국가 예산은 당장 거들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설명은 애가 타는 입장에서 들어도 ‘고위층으로부터 50억원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나의 논리보다 그럴듯하고 정연하였다. 나는 그로부터 고위층의 지시보다는 담당자의 논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배워가며 그가 설득되는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주변에는 어려운 일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사업을 담당함으로써 명예를 높일 수 있다는 판단으로 업무를 가로채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일을 시작한 후 세 차례에 걸쳐 어느 고위직으로부터 “해낼 수 있겠느냐?”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지내야 했다. 정신을 놓는다면 당장 병원으로 가야할 만큼 비몽사몽인 상태에서도 그의 말은 내 귀에 잘 들렸고 그때마다 내가 확실한 대답을 했으므로 그가 그 말, 혹은 그 제안을 한 의도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어느 한순간에 내가 물러서고 말았다면 그가 지명한 서기관 하나가 그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 서기관은 그 일로 빛나는 날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그냥 시골 초등학교 교장으로 나온 나를 보면 참 답답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정부에는 역사 혹은 역사교육 정책의 중요성과 비중에 비해 그 조직이 불충분하다는 것도 분명히 커다란 어려움이다. 당시 교육과정정책과에는 두 명의 역사 당당자가 있었지만 한 명은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문제에 매달려 있었고, 재단 설립은 역사교육전공이 아닌 과장과 역사교육 담당자 한 명(장학관 이충호), 영어교육 담당자 한 명(교육연구사 김상재) 등 세 사람의 몫이었다. 그 초겨울부터 그들은 허구한 날 퇴근을 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일본으로, 미국으로 날아가 한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다 해도 나로서는 하나도 섭섭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어려움에 비하면 나의 어려움쯤은 구차한 것들뿐이었으므로 그것을 들추어내는 일이 오히려 공연한 자랑으로 들릴 것쯤은 아무리 어리석지만 나 자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을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그들의 애국심이나 관리로서의 역할에 아무런 의문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며, 혹 어떠한 일이 있다 하여도 나로서는 그들의 정신보다는 그들의 판단을 의심하고 싶을 것이 분명한 것도 사실이다.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하다못해 힘을 내는 데 필요한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는 입장이 된 나로서는, 그들의 영광에 어떤 노력이나 실적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면 그때 그 수많은 밤들의 그 일들만으로도 충분하기를 기원할 뿐이다. 이들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 정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중에는 내부적인 일로는 분통이 터져도 말하지 않는 사람, 비록 하급관리이지만 상급관리만큼 성실하고 충성심이 강한 사람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교육부 교육과정정책과에서는 역사연구재단 설립과 지원 및 해체,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설립과 지원, 지금은 한국학중앙연구소(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위탁하고 있는 한국바로알리기사업 지원, 국사편찬위원회 지원, 다양한 형태의 역사 관련 단체 지원 등 역사문제와 관련된 업무가 방대하며, 이러한 일들에 대해 보다 체계적, 계획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관리하려면 최소한 역사교육정책과 정도의 별도 기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제 부끄러운 어려움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지식과 행정력의 부족함에 관한 것이다. 나는, 2003년 초겨울에 가칭 ‘고구려사연구소’ 혹은 ‘고구려사연구센터’라는 이름으로 구두 지침이 내려와 시작된 그 기구의 설립이 ‘재단’으로 정립되어 이듬해 3월 1일 오전 발족을 맞이하기까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어느 날 저녁, “내일 아침까지 재단법인과 사단법인이 무엇인지 좀 잘 알게 해 달라”고 하자 김상재 연구사는 법제처에서 500페이지는 될 것 같은 책 한 권을 들고 왔다가 기가 막혀하는 내 표정을 보고는 그 이튿날 아침에 딱 한 장의 페이퍼를 내밀었지만 나는 잠시 그 자료조차 분석해볼 여유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러나 일이 되어가자 정관 초안을 만들어주는 서기관도 나타났고, 재단의 등록에 필요한 3억원을 내어준 기관장(장을병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 그 등록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게 해준 부교육감(박경재 경기도부교육감)도 생겼다.
▶ 지도자의 힘과 믿음에 대하여
다른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있다 해도, 나는 ‘아직까지도 지쳐 있으므로’ 그때 우리가 한 일들의 흔적이 남은 서류들을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거의 없을 것이므로 이제 내가 그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정말로 중요한 까닭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해 한겨울 어느 날, 그때까지 일이 진척되어가는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던 안병영 부총리께서는 “이제 이 재단을 누가 이끌어가게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이 장학관과 김 연구사는 또 밤을 새우게 되었고, 달랑 한 명의 명단을 가지고 그분을 만날 수는 없으므로 그 밤에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명단을 만든 다음, 그 명단의 맨 위쪽에 김정배(전 고려대학교 총장) 교수의 이름을 놓고 그분과 다른 분들의 연령, 업적, 인품 등을 암기하여 부총리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명단부터 내놓는 것이 순서이고 도리라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나는 대뜸 이렇게 말문을 열게 되었다. 그것은 참 어렵고 아찔한 순간이었다. “부총리님께서는 어떤 분이 좋을지 생각해보셨습니까?”
교육부장관을 두 차례 역임한 마거릿 대처처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두 번에 걸쳐 교육부장관과 교육부총리를 역임한 그분의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그분이 누구보다 신중하다는 것쯤은 아무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므로 나도 그분의 그러한 면에 대해서는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행운이었던 것은, 그분은 당돌한 나의 물음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평소대로 매우 신중하게 답을 내놓은 것이었다. 나는 2003년 가을에 미흡한 방법의 보고를 하다가 그분으로부터 “내가 핫바지인 줄 아느냐?”는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으므로 더 큰 행운이었던 것은 그분이 내놓은 답이 다음과 같았다는 점이었다. “여러 군데 의견을 들어보았더니 김정배 총장이 적격이라는데 어떻습니까?” 그 순간에 느낀 힘으로, “그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겠느냐?” “어려우면 그 업무를 내놓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등 세 차례에 걸친 그 고위직의 제안을 마지막까지 거절할 수 있었고, 그런 말을 들을 때의 쓰라림과 분통터지는 괴로움을 이길 수 있었다. 나는 그 후로, 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직접 지켜보지 않고 있지만 그분은 다 짐작하고 있으며, 내가 늘 똑바른 판단을 하며 지낸다는 것을 그분은 믿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으므로 어느 한순간 그 긴장을 늦춘 적이 없었다.
▷ 사족 1 : 편수국이 사라지고 교육과정담당관실과 교육과정평가담당관실로 나뉘어 일할 때였으니까 1996년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교육과정평가담당관실의 연구사로, 어느 날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설립 업무를 넘겨받았다가 단 며칠 만에 다시 그 업무를 내놓은 적이 있었다. 이유는 전문직이 그 일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고, 우리 담당관과 교육과정심의관이 간부회의에서 이미 그 업무를 내놓기로 결정하고 왔다고 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구려연구재단’ 설립 업무까지 내놓을 수는 없었다.
▷ 사족 2 : “감사패, 성복초등학교 교장 김만곤, 고구려연구재단의 창립과 발전에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귀하께 감사드리며 앞날의 건승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2005년 6월 10일,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 김정배”
▷ 사족 3 : 2006년 8월말, 어느 신문에 ‘고구려연구재단’의 해산을 결정하는 이사회가 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사장의 얼굴이 크게 나온 인터뷰 기사와 ‘동북아역사재단’인가, 다시 다른 기구를 만든다는 기사도 났는데, 이미 나에게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들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읽어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다만, 2004년 어느 봄날, 한국학술정보연구원 건물에 세 들어 지내던 고구려연구재단 회의실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던 국회 교육위원회 의원들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르기만 했다.
▷ 사족 4 : 들으니, 며칠 전 안병영 부총리께서는 연세대학교 어느 강의실에서 고별 강연을 했다고 한다. 지난해인 2005년 가을 어느 날, 안병영 부총리께서는 이곳 성복초등학교를 찾아와 우리 아이들에게 1시간, 우리 교사들에게 2시간의 강의를 했다. 아마도 그분의 생애에서 이처럼 조촐한 대상을 두고 강의를 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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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에서 중국 동북부의 역사․지리․민족 문제 등을 연구하는 국가적 연구사업‘동북변강사여현장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2003년 2월에 프로젝트를 확정해 왕락림(王洛林) 사회과학원 부원장을 중심으로 지린(吉林), 헤이룽(黑龍), 랴오닝(遼寧) 등 동북 3성의 사회과학원과 대학, 연구기관을 총동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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