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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영어, 영어, 영어

by 답설재 2008. 2. 14.

지난 겨울방학에 3박4일간 일본에 연수출장을 다녀온 우리 학교 W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일본을 다녀온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 선생님은 서슴지 않고 몇 가지 대답을 했습니다. 일본은, 작고 정교하고 단정하고 친절하고 질서가 잡혀 있으며, 학교 시설․환경에 대한 투자는 어느 정도 되었다고 보는지 정지되어 있는 느낌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일본어를 할 수 없어 영어를 했고, 그들은 일본어를 그대로 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퇴근길의 광화문역에서 신길 방향 열차를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경복궁역에서 경복고등학교나 청와대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농학교 남학생이 타임지를 들고 여학생과 수화(手話)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그 남학생은 그 여학생을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사무실의 특수교육 전문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농학교 아이들은 장애아들이지만 실력이 꽤 좋은 편이지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아이야 좋겠지요. 그러나 그 아이들 중에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모를 일입니다.”

 

이명박 정부인수위원회에서는 정책면에서는 ‘경제 살리기’와 교육력 강화의 두 축에 ‘올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육력 강화에 대해서는 대학입학전형문제와 영어교육이 주요 내용입니다. 영어교육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아이들도 걸핏하면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심지어 우리보다 교육수준이나 문화수준이 한참 뒤지는 나라로도 서슴지 않고 떠나는 경우를 많이 보아온 나로서는, 그동안 이번에 인수위에서 제안한 정도의 정책이 나오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기도 합니다. 또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미안하기도 하며, 나 자신조차 영어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을 고백하고자 하면 자신이 분명 지능지수 중 언어능력이 특히 우둔한 것이 분명하다는 자평(自評)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도 합니다.

영어교육을 강화하자고 하면 “영어 안 하고 살아갈 사람도 다 배워야 하나?” “사실은 국어교육도 그만큼 시급하다.”고 하고, 영어교육 시간을 늘리자고 하면 가령 “과학시간도 부족하다.” “국사시간도 부족하다.”고 하고, 영어를 잘 하는 전용교사를 뽑아서 가르치게 하자고 하면 “이제 아무나 교사 하나?” “교사자격증을 가지고 교사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비판적인 시각을 나타내는 것이거나 위기감 같은 걸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오죽 하면 그런 소리를 하겠나 싶기도 하여 이쪽 편을 들기도 뭣하고 저쪽 편을 들기도 그렇고 하여 어떻게 되나 지켜보자는 심사로 앉아 있습니다. 이러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나 같은 경우는 정책을 결정하는 일을 맡을 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가령 나처럼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런 설문을 해보면 어떨까요.

“귀하는 영어회화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까?” 혹은 “영어에 능통한 우리나라 사람이나 서양인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는 우리가 이런 물음에 솔직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그리고 솔직한 대답을 한 후에라야 제대로 된 정책을 수립하거나 정책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제조건은 또 있습니다. 용인 수지의 성복초등학교에 근무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클레어 릴리엔탈 학교와 협정을 하고 펜팔, 작품․도서․의류 등 물물교환을 하다가 1년에 한 차례씩 서로 방문하기로 했는데, 지난해 여름에 덜컥 그 학교 아이들과 학부모, 지도교사가 그 학교를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나누어 홈스테이를 시키고 낮에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모든 활동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드디어 토요일이 되어 떠나는 날 강당에서 환송식을 하며 그 아이들에게 한국을 방문한 소감을 우리말로 발표하게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세계 최고’인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미국의 그 아이들이 1주일 만에 홈스테이한 가정의 특징, 우리와 함께 재미있게 지낸 일 등 각자가 생각한 대여섯 문장 정도의 인사를 미국인 특유의 억양을 드러내는 우리말로 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 아이들 중에는 교포 2세가 있었는데, 그 아이만은 “안녕하세요. 저는 ○○○입니다.” 하더니 한동안 입을 닫고 서 있다가 결국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그래, 이 순간도 너에게는 값진 경험일 것이다’ 그 아이에게서 특성을 찾는다면 ‘교포 2세로서 미국인이 다 되어버린 아이’ ‘영어밖에 못하는 아이’ ‘그러나 미국인이 다 되어 “까짓것 한국말 못하는 게 뭐 부끄러울 일이냐” 하지 않고 1주일간 겨우 두 마디의 한국말만 익힌 것을 순수한 마음으로 부끄러워하는 아이’ 등일 것입니다.

 

딱 한 가지가 더 있을까요? 미국인 아이의 부모는 한국여행을 가는 자녀에게 “가거든 한국어 좀 배워 오라.”고 부탁했을 텐데, 아니 그들은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그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 교포 2세 아이의 부모는 평소에 자기소개는 -참 한심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어느 텔레비전 방송국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 나온 어느 미녀가 그걸 지적하면서 그게 바로 자기소개 시간이 지루한 이유라고 했습니다) ‘한국어야 뭐, 영어를 잘하면 그만이지.’ 같은 생각을 은연중 심어준 것은 아니었을까요?

 

또 있다고 한 그 전제조건이 바로 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될 수 있다면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말을 못하는 것도 부끄러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충격’으로 표현한다면 그 교포 2세 아이에게는 순수 미국인 아이들보다 자신이 한국어를 잘 못하게 된 것이 충격이었을 것이고, 나에게는 ‘한국어를 잘 못하는 것도 부끄러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제 전제조건이 뭔가 희미하고 복잡한 느낌입니까?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만한 자질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저러나 나는 영어를 못하는 것이 참 답답하고 우선 피곤합니다. 우리 남양주양지초등학교에는 캐슬린이라는 참 신비한 미국인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 아가씨 선생님이 걸핏하면 교장실에 와서 자신도 나처럼 떠듬떠듬 지껄이고, 내가 그처럼 떠듬떠듬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다 돌아갑니다. 그는 귀를 기울이지만 나는 그야말로 온몸을 기울입니다.

 

지난 설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크리스, 다니엘라 부부와 캐나다에서 온 알렉시라는 처녀가 우리 집에 와서 차례를 지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그 떡국을 먹더니 점심때가 되어도 돌아가지 않고, 드디어 순수 한국식 저녁식사까지 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깻잎과 마늘과 무말랭이를 특히 좋아하더군요. 나는 이번 설날 그야말로 ‘중노동(重勞動)’을 한 것입니다. 다 영어를 못하는 까닭이지요. 그러니 몇 마디라도 좀 배우고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말다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