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戰戰兢兢, 그리고 포옹

by 답설재 2008. 2. 27.

교장들끼리 만나면 참 시시한 이야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가령 ‘업무추진비를 어떻게 써야 감사에 걸리지 않는지’ 같은 자잘한 화제가 그런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처신을 잘못하여 구설수에 오르는 얘기도 합니다.

 

어느 자리에서였는지 후배 교장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생각납니다. “남자애는 대체로 마음 놓고 포옹해 주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자애는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기준을 정하고 있는데, 저학년 애는 더러 포옹해주기도 하지만, 고학년 아이에게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3, 4학년 여자애라도 수치심(羞恥心)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묻습니다. “그러면 고학년 여자애에게는 어떻게 대합니까?” “악수를 합니다. 사실은 악수하는 것조차 조심스럽습니다. 아이들은 대체로 교장이 악수해주는 걸 특별한 일로 받아들이지만, ‘저건 끔찍하다는 뜻이 아닐까?’ 싶은 표정을 짓는 아이를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수를 하고 싶다’ 혹은 ‘악수를 해도 좋은가?’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견해가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그야말로 전전긍긍이겠지요(戰戰兢兢 : 두렵고 조심스러움, 고려 말 공양왕 때 문하시중 이성계가 그 직에서 물러나고자 올린 전(箋)에서『詩經』을 인용하여 쓴 말,『龍飛御天歌』(鄭麟趾 외, 이윤석 옮김, 솔출판사, 1997), 166쪽).

 

언젠가 6학년 아이의 아버지에게 몇 년생인지 물어보았더니 내가 대학에 들어간 그 해에 태어났더군요.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전철역 매표구 앞에 서서 지갑을 꺼내려고 하면 ‘경로우대증’인가 뭔가를 꺼내려는 줄 알고 얼른 경로우대권을 내주는 꼴을 당하기 쉽고, 아파트 승강기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이 자녀에게 “할아버지께 인사드려.” 할 것은 뻔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분이 혹 나처럼 교장이라면 이렇게 물어보고 싶군요. “다른 교장이 귀하의 손녀를 ‘덥석(왈칵 달려들어 물거나 움켜잡는 모양)’ 포옹한다면 그 모습(꼴)을 보는 느낌이 어떨까요?” 그러면 “교장이 내 손녀에게 그렇게 대해주면 참 좋겠다.”보다는 “아무래도 좀 게름직하겠다.”는 느낌 쪽에 ○표를 할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한다는 것쯤은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기야 교장에게 상장이나 표창장을 받고 악수한 일을 자랑스러워할 아이도 있겠지만, 교장이 결코 대단한 존재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오늘 본의 아니게 포옹을 한 사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먼저 일상적이라고 해야 할 사례입니다. 내 딸아이는 언제 돌아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공항에서 헤어질 때 포옹을 하고 싶어 합니다. 처음에는 좀 어색했는데, 다음부터는 괜찮았습니다. ‘또 오랫동안 이별이구나.’ 싶어서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나 하게 됩니다.

 

다음에는, 연전(年前)에 있었던 일입니다. 복도에 나갔더니 보건실 쪽에서 예쁜 여자애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뛰다가 미끄러지면 어떻게 하나!’ 얼른 두 팔을 올리고 막아섰습니다. 그러나 그 애는 토끼처럼 그렇게 달려왔고, 게다가 1미터 전방쯤에서 팔짝 뛰어올라 두 팔로 내 목을 감고 나무줄기를 기어오르는 무슨 귀여운 동물처럼 짝 달라붙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의 더러운 볼에 솜털같이 보드랍고 소중한 그 볼을 비벼댔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그 순간 나는 참 행복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나를 사랑해주신다’고만 생각했을 그 아이의 가슴을 안고 아이가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 그렇게 서 있었던 자신이 참 초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2월 20일, 전국 스키대회가 열리는 용평스키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좀 포근해진 날씨였지만 눈밭의 바람은 매서웠습니다.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 분위기가 얼른 파악되지 않았고, 우리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았습니다. 비슷비슷한 운동복에 스키를 타고 오가는 아이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각 학교의 고칭스태프와 경기운영요원들도 섞여 있어서 요령껏 찾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일론 끈으로 엮은 펜스가 대충 서 있었는데 그 안의 경기장에도 출발 준비를 하는 아이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마침 남자애 한 명이 아는 체하여 정답게 악수를 하고 또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지만, 내 힘으로 아이들을 찾기는 어렵겠다 싶어서 나중에 만나기로 마음먹었는데, 저쪽에서 한 여자애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얼핏 봐도 우리 애였습니다. 그 애는 순식간에 달려와 펜스를 사이에 두고 마주서게 되었고, 우리는 인사고 뭐고 누가 먼저였는지 서로를 포옹했습니다. 아무 말 않고 그 애의 등만 토닥여주었습니다. 바람이 차가왔지만 우리는 따뜻하고 아늑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